<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야광충! 235 >
“밖에는 안 나가세요? 친구는?”
20여 년 가까이 경비대장직을 역임하면서 그녀의 이름은 자연스레 주변에 알려졌다. 그래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대신 유명한 모험가나 범죄자, 귀족에겐 아는 사람이 꽤 있었다.
팔짱을 한 채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던 셀린은 이제 울파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말했다.
“괜찮아. 울파가 있어 주니까. 곧 애도 태어날 거고.”
쓰다듬는 저 배는 4개월 조금, 출산까지는 아직 몇 달이나 더 남았다.
밑밥을 깐 잔느는 이제 용건을 꺼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편지 한 장을 올려서 내밀었다.
“심심하시면 소일거리 잠깐 해보지 않으실래요?”
“소일거리?”
받아 든 편지는 다음 아닌 파본 제1경비대장이 보내는 것으로 글자가 멋지기로 유명한 그답지 않게 급하게 휘갈겨 쓴 글귀가 적혀 있었다.
<도와주시오!>
딱 그것뿐.
“푸흡!”
셀린이 폭소를 터트렸다.
곁에서 보던 로마니도 하하 웃는다.
“급하신가 보군요.”
마주 앉은 잔느가 대답했다.
“예, 뭐, 원체 일이 많으셨으니까요. 왜인지는 모르지만 도시 운영안 일부도 경비대장님이 처리하고 계셨거든요.”
“그건 초창기에 내가 맡았던 것을 그대로 가져온 거라서 그런 거야. 파본 경비대장님 고생이 많으신가 보네.”
그러면서 힐끔 로마니를 살피는 셀린이었다.
로마니는 푸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소와 요리 같은 건 내가 잘하니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말고 날개를 펼쳐 보시기 바라오. 귀중한 인재가 갈 곳 없어 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도 씁쓸하니 말입니다.”
그 편이 더 안전하기도 하고.
“정말요?”
“물론, 경비대는 아직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퇴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루함에 질려 있던 셀린이 밝게 웃으며 로마니의 가슴에 푹 안겨 들었다.
키 차이가 좀 나는 편이라 아빠와 딸 같은 느낌이었지만 보기엔 좋았다.
잔느가 약간 부러워할 만큼.
그리하여, 셀린이 새로운 직함으로 복귀했다.
경비대장 업무 보좌.
엄연히 일반인이라 제복 대신 소박한 원피스 차림에 경비대 자켓만 걸친 그녀가 강조했다.
“출산 때까지 임시니까요.”
그녀가 돌아옴으로써 파본 경비대장은 한숨 돌렸고, 보좌관들을 포함한 다른 경비대원들도 반가워했다.
경비대장 집무실에서 이제 일반인이 된 셀린과 마주한 잔느는 사악하게 웃음 지었다.
“으음후후후, 아기 낳고도 다시 돌아오게 되실걸요?”
“그런 일은 없을 거거든?!”
그리고 커다란 책상에 앉아 두 사람의 툭탁거림을 지켜보던 파본 경비대장의 귓가에 환청처럼 잔느의 목소리가 울린다.
다시 돌아오게 되실걸요?
번쩍이는 머리에 번개가 쳤다.
내가 왜 이걸 전부 혼자서 처리하려고 했었지?
“그거다! 으어어!”
철퍼덕!
냅다 일어서서 소리를 지른 파본 경비대장이 그대로 졸도해 버리자 깜짝 놀란 두 사람이 달려와 그를 살폈다.
“아차차, 3일 연속 철야하시더니 결국은.”
“바보야! 보고만 있지 말고 신관님을 불러와! 내가 어쩌다 경비대장에 얻어걸린 줄 알아!?”
“넵!”
경례를 붙인 잔느가 호다닥 달려 나간다.
새 경비대장이 과로로 쓰러진 상황이건만 그녀의 발걸음은 참 가볍다.
왜냐하면 내일 출근하는 기쁨 중의 하나가 늘어났기 때문이지.
“조직에서 문화를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거든요. 하하!”
제1경비대장 보좌담당관 잔느의 즐거운 경비대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 * *
출국을 위해 항구까지 가는 데만 닷새 이상 걸릴 것으로 생각했으나, 엘프들의 수송선을 이용한 덕분에 출발한 날의 저녁쯤 그들은 리즈넷 남부의 항구도시 파인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철썩-! 쏴아아아-!
밤바다에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던 조그만 캐롯이 삐약 하는 비명을 질렀다.
“우와! 저거 봐! 저거 봐! 파도가 번쩍번쩍거려! 마법이야? 응!? 마법이냐고!”
호들갑을 떠는 캐롯과는 다르게 반나절 만에 대륙을 가로지른 크랭크와 아리에테는 그저 넋 놓고 그걸 쳐다볼 뿐이었다.
항만에서 화물의 하역 작업을 감독하던 르클레르가 다가왔다.
“저건 야광충이다. 바닷물 속에 작은 벌레가 파도에 놀라서 빛을 내는 거지. 돌을 던져도 반짝인단다. 봐라.”
퐁당!
돌멩이를 집어 던지자 정말로 밤바다에 번쩍이는 파문이 일어난다.
캐롯은 거의 기절할 듯이 놀라서 돌멩이를 한 아름 주워다 그걸 바다에 뿌려댔다.
“우오! 우오오! 저거 좀 봐! 엄청 예쁘게 반짝거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남부에서 가장 큰 항구, 늦은 밤에도 불구하고 사방에 마법 등불을 켜 놓고 한참 하역 작업 중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바다를 보던 아리에테가 르클레르를 보더니 두 팔을 번쩍 들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엘프들의 수송선을 이용할 거라고 미리 이야기해야지 않냐! 이럴 줄 알았다면 짐을 좀 줄일 수 있었을 텐데!”
“보세요, 르클레르 님. 우리 아리에테는요, 짐의 절반이 속옷이래요.”
고자질쟁이 캐롯이 입가에 손을 세우고 말하자 허리를 숙이고 귀를 기울이던 르클레르의 눈빛이 파도의 야광충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 중에 고상한 취미를 가진 신사들이 꽤 있거든? 절반 정도는 내가 사줄 수 있어.”
“닥쳣-!”
벌겋게 된 아리에테가 소리를 질렀지만 르클레르는 배를 잡고 웃기 바빴다.
눈가의 눈물을 닦은 그녀가 손짓한다.
“화물의 하역은 이대로 맡겨 두면 된다. 배 안에 숙소가 준비되었으니 들어가자. 너희들은 지금 해외 사절단 소속으로 VIP 취급이란다.”
“세상에! VIP! 최고중요요인! 귀빈!”
두 손으로 볼을 붙잡은 캐롯이 호들갑을 떨면서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는 흐느적거리는 둘에게 손짓했다.
“빨리 와! 굼벵이들아!”
손짓하는 캐롯의 뒤로는 엄청난 빛을 발하는 거대한 화물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르클레르가 웃으면서 덧붙였다.
“퀸 엘리자베스호다. 오고 가는 물자가 장난이 아니라서 배도 크고 아름답지.”
“호아아아! 어, 잠깐! 그거 뭐지? 바람 받아서 나가는 돛단배 아니에요? 전에 해적선에는 그런 게 있었는데.”
르클레르가 하하 웃더니 허리에 손을 올리고 대답했다.
“이건 최신예 증기선이란다. 마력 보일러로 물을 데워서 그 증기압으로 움직이는 거지.”
캐롯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두 팔을 들고 소리를 꽥 질러댔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멋진 기술의 발전을! 찬양하라!”
“아하하!”
그 기술의 정점에 올라 있는 자동 인형 오토마톤의 외침에 르클레르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꾸밈없는 얼굴로 웃기 시작한다.
뒤에서 지켜보던 아리에테가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저 바보들을 좀 말려줬으면 좋겠군.”
“부러우면 지는 거다.”
웅장한 화물선을 올려다보는 크랭크의 말에 억하심정을 느낀 아리에테가 그의 어깨를 툭탁툭탁 두들겼다.
르클레르를 따라 선내로 들어간 그들은 화려한 귀빈실로 안내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누군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강단 있는 늙은이였는데, 유행을 압살하는 붉은색 선글라스 너머의 눈매가 몹시 날카롭다.
들어오는 사람들을 알아본 보이드 자작이 반갑게 손을 든다.
“여어, 친구들, 이 몸을 만나고 싶어 찾아왔는가?”
“호오옷! 보이드 자작님이잖아요? 자작님도 가요?”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난 보이드 자작이 쪼르르 달려온 캐롯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제1궁성 마법사가 사실은 이젤리아 사람이라는 것.
“기술 원조로 왔다가 눌러앉게 되었지. 그래서 이 직위에 작위가 자작에 머물러 있는 거고. 하여튼 미증유의 위기에 빠진 이 늙은이의 고향을 위해 발 벗고 나서주어 고맙습니다. 르클레르 아멕스 공작 영애.”
“천만에요. 동시에 제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인사말이 신기했던지 캐롯이 속삭였다.
“오오, 다른 세계야. 다른 세계.”
“음, 확실히 다른 세계다.”
“아니, 넌 얼마 전까지 저쪽이었잖아?”
아리에테가 캐롯을 내려다본다.
“섭섭하군. 지금의 내 자리는 바로 네 곁이다.”
캐롯이 히히 웃는다.
그때 크랭크가 슬그머니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투구 너머의 눈동자는 진지했다.
“저희는 아직 이젤리아의 그 미증유의 위기에 대해서 자세히 들은 것이 없습니다. 드래곤의 위협이라고 하셨는데,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요?”
지팡이에 두 손을 올린 보이드 자작이 대답했다.
“나도 이야기만 들어서 나머지는 직접 가서 봐야 할 것 같네만, 들은 바에 따르면······.”
드래곤은 이미 격퇴했다. 다만 그를 쫓아내기 위해 동원된 수단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었다.
크랭크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개미 말입니까? 크림슨앤트?”
“오아! 드래곤 킬러!”
언젠가 크랭크와의 잡담으로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에 캐롯도 한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아리에테는 처음 듣는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개미로? 개미로 드래곤을 잡는다고?”
“어엄청나게~! 큰 개미래. 떼거지로 덤벼들면 드래곤도 한수 접는다던데?”
보이드 자작이 덧붙였다.
“마왕령에 사는 괴수 중 하나지. 대대로 그걸로 드래곤을 퇴치했고, 이젤리아의 공식 의뢰로 우리 측 모험가들을 동원해서 성체를 생포해 보내주었다. 그중 하나가 여왕으로 우화했지. 다만······.”
르클레르가 그의 말을 받아서 이었다.
“다만, 어찌된 것인지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어. 적통의 여왕이 아니라 일개미가 우화한 여왕은 1세대까지만 자손을 낳고 그 뒤로는 자멸해야 하거든? 게다가 마왕령 밖에서 이러는 건 전례에 없던 일이지.”
“놀랍군.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런데 일개미가 어떻게 여왕으로 우화하지? 원래 그게 가능한 건가?”
준비도 없이 도망치듯 모험가가 된 아리에테는 모르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르클레르는 그녀의 질문에 팔을 X로 겹치며 입을 다물었다.
“그 이상은 국가 기밀이야.”
보이드 자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와 하는 소리를 내던 캐롯의 눈알이 크랭크에게로 향한다.
그의 음험한 주인님은 뭔가 알아챈 것 같은 눈치다.
좀 있다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캐롯은 테이블을 두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하나만, 하나만 더. 우리 그놈들이랑 싸우는 거 아니죠?”
보이드 자작이 금니를 드러내고 낄낄 웃더니 대답했다.
“걱정 말거라. 우리는 장비의 사용법 정도만 일러주면 더 이상 볼일은 없단다. 거기도 막무가내로 싸우는 전사들이 많이 있거든? 게다가 그 나라 사람들의 똥고집은 아주 볼 만하지.”
다름 아닌 이젤리아 사람의 셀프 디스가 이어지자 크랭크도 부담 없이 아리에테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과연, 아리에테의 저돌맹진은 이젤리아 특유의 종특인가.”
“크으래에엥크으으읏!”
퍽퍽퍽!
“아야, 아프다. 때리지 마라. 잘못했다.”
“영혼 없는 반성은 그만두고 몸서리친 후회를 하란 말이다!”
친절한 거인과 무모한 여기사의 툭탁거림을 재미난 듯이 지켜보던 보이드 자작이 자리에 앉은 채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클클클! 재미있군, 한편의 희극이라도 보는 것 같아. 심심하지 않아서 좋군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