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추억! 228 >
쿠오오오오오!
120m짜리 빛의 검이 덤벼드는 흑색 파도로 떨어져 내렸다.
쾅-! 쿠오와아아아!
엄청난 폭풍이 불어닥치는 와중에 성벽 위에서 무릎을 꿇은 경비병이 스크롤 원통을 품에 안은 채 힘겹게 외쳤다.
“방어벽 칠까요?!”
대답은 빛의 검 손잡이를 쥔 캐롯이 했다.
“아직! 아직 안돼! 으라차! 이대로 지져주마!”
쿠오와아아아!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든 울파가 상황을 살폈다.
휘둘러진 용사의 빛의 검은 에너지 병기가 되어 황금빛 칼날을 쏘아대고 있었다.
“모든 에너지를 한곳에 집중.”
폭풍에 휩쓸려 성벽 위에서 볼품없이 데굴데굴 굴러 버린 입이 험한 엘프 여자가 외쳤다.
“옘병! 칼이 아니라 소형화시킨 공중 전함의 마력포잖아!”
검은 기류 중앙에서 황금빛 에너지 소드를 집중적으로 맞은 사레나는 결국 남아 있던 에너지마저 고갈, 방어벽이 사라지고 그대로 폭발을 일으켰다.
펑-! 빠지직!
푸른 스파크와 불꽃이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검은 기류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더불어 하드 스킨 오토마톤이 붙잡고 있던 고렘 군단도 술자의 사망으로 다시 원래의 돌 무더기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돌아오지 못한 것은 엉망이 된 농지와 캐롯의 에너지 소드뿐.
“됐어! 해치웠어! 근데 이거 어떻게 끄는 거야?! 빨리 꺼! 꺼줘!”
상대가 무너진 것을 확인한 캐롯은 주변 지형지물의 파괴를 우려해 그것을 다시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혼자서만 황금빛으로 물든 캐롯을 보고 성벽 위에 굴러다니던 모두가 두 팔을 들고 환호를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쓰러뜨렸어!”
“으하하!”
“바보들아! 웃고 있지만 말고 빨리 이걸 끄라고!”
명령을 내릴 제3경비대장이 기절한 상태라서 캐롯은 한동안 그걸 들고 있어야 했다.
도시를 지켜낸 초대형 빛의 검, 그 웅장한 모습은 시민들에게도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한밤중이건만 대부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조마조마하다가 커다란 함성과 더불어 어두워진 하늘로 솟아오른 빛의 기둥을 우러러보고 덩달아 안도하며 기뻐했다.
저 힘이 우리를 지켜준다.
“살았어!”
“이제 끝났어!”
검의 손잡이를 잡아 빛의 깃대를 세운 모양으로 성벽의 요철에 고고히 올라서 있던 캐롯만이 도끼눈을 뜬 채 고개를 돌리고 외쳐 댔다.
“이거 끄라고!”
위협은 사라졌지만 아직 사태 파악이 덜 된 상태라 다들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드 스킨 오토마톤들도 고렘이 있는 돌 무더기 주변에서 경비를 섰고, 다만 현장의 부상자들은 서둘러 구조되어 옮겨졌다.
하룻밤을 꼬박 새운 방주 도시 아르곤에 드디어 아침이 찾아왔다.
“아아, 이게 무슨 일이냐, 이제 몇 달 뒤면 수확인데!”
파헤쳐진 밀밭과 폭풍에 쓸려 나간 보리밭 앞에 주저앉아 있던 작업복 차림의 사람들은 영농조합 길드원들, 복구 작업을 위해 나와 있던 사람들이 안타까운 듯이 그들을 위로했다.
사내 하나가 보리밭에 잔뜩 흩뿌려진 검은 가루를 쓸어 담았다.
“이게 뭐야?”
조사와 파편 수거를 위해 따라 나왔던 드워프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검은 가루를 움켜쥐고 기겁했다.
“사철!”
“이, 이렇게나 많이!”
호위로 따라온 캐롯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철이 뭐임?”
“철 가루다. 흙 속에 조금씩 들어 있지.”
투구를 든 크랭크는 작은 언덕 수준으로 쌓여 있는 검은 가루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마법이라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데.”
마법사들의 의견은 이랬다.
“이 부근은 애초에 금 광산이 있던 지역입니다. 다른 광물자원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요.”
“아이언 샌드 캐슬이라고 했잖아. 주변 땅속에서 철가루를 끌어올려서 만든 거야? 그런 마법이 있어요?”
모험가의 물음에 엘프들이 저마다 씩씩거렸다.
“네놈들은 정말 엘프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우리도 모른다!”
“맞아! 우리도 너희들과 같은 바보일 뿐이다!”
“아악! 그런 예쁜 얼굴로 엉뚱한 소리 좀 하지 마요! 내 환상을 깨부수지 말라고!”
드워프들은 진지했다.
철가루를 한 움큼 쥐고 손가락을 비벼보던 쿠르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녹여봐야 알겠지만 나쁘지 않은데? 네놈들 영주는 어디에 있냐?”
“영주님의 저택에 계시겠지요.”
“잠깐 다녀오마. 몇 명은 이거 함부로 퍼 담아 가지 못하도록 지켜라.”
당장 얼굴이 사나워진 드워프들이 도끼를 뽑아 들고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캐롯이 고개를 절절 흔드는 사이 경비병들은 마도사 오토마톤 사레나의 파편을 찾느라 분주했다.
“여기엔 없어!”
“녹아서 없어진 거 아냐?”
그들도 사철 언덕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혹시 이 안에 있는 거 아닐까?”
“치워 봐야 알 것 같긴 해. 일단 이 근방부터 살펴! 도망친 이동 가옥의 강도단 녀석들을 추적할 추적대도 파견해야 해!”
영농조합길드에서도 달려왔다.
“올해 농사는 그렇다치고! 이 빌어먹을 철 가루를 다 치우지 못하면 여긴 농사를 못 짓는 땅이 된다고!”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걸 정리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영주, 그는 철야로 지침 몸에 연거푸 커피를 들이켜며 최종 승인을 남발했다.
성 밖에 쌓인 사철 더미에 대한 처리도 마찬가지.
쿠르프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좋아! 네놈들 영주에게 이야기를 해놓았다. 일단 저걸 치우자!”
도시에서 일꾼들이 쏟아져 나왔다. 드워프들에게 고용된 마을 인부들이었다.
얼굴에 방어구를 착용한 그들은 철 가루를 전부 수거해서 자루며 나무통에 담아대기 시작했다.
도시의 오토마톤은 쓸 수 없었다. 관절에 철 가루가 들어가면 치명적이라서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치워야 했다.
사철의 처리, 수거 작업을 감독하던 쿠르프는 역시 인력만으로는 모자랐다고 생각했는지 연합에 도움을 요청했다.
몬스터의 습격을 견제하기 위해 사철 수거장 주변에 경계를 나와 있던 캐롯이 고개를 들고 갑자기 나타난 엘프들의 수송선을 올려다보았다.
“생긴 게 꼭 로나의 수송선 같은디?”
“왔구나!”
성 밖에 착륙한 수송선을 보고 작업 중이던 드워프들이 달려갔다. 수송선은 그대로 뒷문을 열고 가져온 화물을 내렸다.
덜컹!
착! 착! 착! 착!
조그만 키에 작업복을 두른 광산 작업용 소녀형 오토마톤 백여 대가 두 팔을 씩씩하게 흔들며 줄을 맞춰서 내렸다.
접합부에 철가루가 끼이면 고통스러울 거라는 크랭크의 경고에 되도록 떨어진 곳에서 경계 중이던 아리에테가 그 모습을 보고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뮈, 뭐지? 저 귀여운 것들은?”
“땅콩만한 것들이 엄청 많이 나오네.”
듣고 있던 드워프 모험가가 뿌듯하게 말했다.
“광산에서 쓰는 오토마톤이다. 요즘 많이 쓰는 편이지. 체구가 작은 건 갱도에서 잘 움직이기 위해서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온 조그만 오토마톤들은 곧장 작업에 투입되었다.
꼬꼬마 오토마톤이라지만 먼지가 많은 광산 작업에 대응하여 개조가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오토마톤이 기능 고장을 일으키는 철가루 속에서도 잘만 움직였다.
수송선 밖에 나와 있던 엘프 함장의 곁으로 어깨에 단창을 멘 오토마톤이 다가왔다.
“여어~!”
처음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로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캐롯? 세상에! 캐롯이에요?”
“엣헴!”
어느새 로나보다 키가 커진 캐롯이 코를 세우고 웃고 있다. 대략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로나는 그 놀란 표정을 쉽사리 거두지 못했다.
“몸까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니, 놀랍군요.”
“여차하면 몸도 바꾸는 이 놀라운 범용성! 철가루 속에서도 움직이는 강인한 적응력! 그것이 자동 인형! 파격 세일 중! 고객 여러분 놓치지 마세요!”
엉뚱한 소리를 좀 늘어놓은 캐롯은 머리에 쓴 로마니의 카우보이 모자를 이제 로나의 머리에 씌워 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인형보다 더 놀라운 범용성과 적응력을 가진 녀석들을 알고 있어. 바로 너희들이지.”
말을 마친 캐롯은 여기에 좀 더 덧붙여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위협을 이겨내고 보상으로 얻은 철가루를 수거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인부들도 다채로웠다. 인간, 드워프, 엘프, 자동 인형이 뒤섞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 내 말은 어떤 종에 국한되지 않은, 서로서로 손잡으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 거야. 음, 사람.”
카우보이 모자가 상당히 잘 어울리는 엘프 로나가 후후 웃는다.
“예, 물론이죠.”
엘프와 인형 아가씨가 이제 서로를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그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이! 캐롯! 잠깐 와봐! 그 녀석을 찾았어!”
“엇! 정말요? 로나! 가봐야 할 것 같아! 그 모자는 선물!”
단창을 들고 후다닥 달려간 캐롯을 바라보며 수송선 함장 로나는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윽한 생각에 빠졌다.
“서로서로 손잡으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 사람이라. 안 잡으면 사람이 아닌 걸까? 어떻게 생각해?”
근처에서 화물의 수량을 파악하고 있던 엘프 하나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귀가 크기 때문에 어지간한 말은 전할 필요 없이 다 들렸다.
“확실히 포악한 오크나 고블린을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잖습니까?”
고개를 돌린 로나는 뛰어가는 캐롯의 뒷모습을 살폈다. 모자는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쓴 채였다.
“나도 갖고 싶다. 저런 인형.”
“감정의 교류는 사람끼리 해야죠. 인형에게 이입해서야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조건 반사 같은 거잖아요.”
“이거 참 느긋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인걸? 어디까지가 사람이지? 진짜를 능가하는 가짜를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로나의 중얼거림에 듣고 있던 엘프가 고개를 들고 인상을 찌푸렸다.
“저기, 지금 수량 파악 중이니 이상한 말씀 좀 그만하세요. 헷갈리잖아요.”
“후후하하!”
카우보이 모자를 선물받은 로나는 함께할 새로운 신인류의 등장에 솔직히 기뻐하며 어쩐지 즐겁게 웃어 버렸다.
긴 다리로 와다다 달려온 캐롯이 사철 더미 근처에 도착하자 모험가들과 드워프들이 사레나의 잔해를 바닥에 꺼내 놓았다.
“역시 안쪽에 있더구나.”
마력 엔진이 폭발했는지 흉부가 갈기갈기 찢어진 사레나였지만 머리는 물론 몸체 대부분은 일단 다 붙어 있었다.
다들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마력수정폭탄을 단독으로 버텨낸 괴물이다. 대체 어떤 기술이 압축되어 있을까?
“일단 안으로 옮기죠.”
“무슨 소리! 너희들이 이걸 해석할 수 있겠냐? 바로 저 수송선에 태워 보내자!”
“뭐요?”
“어허! 싸우지들 마!”
옥신각신하던 사이 연락을 받고 도착한 경비대에서 그것을 수거해서 성내로 반입했다.
커다란 주머니에 담긴 채 들것에 실려 가는 사레나를 쳐다보던 캐롯의 곁으로 조그만 오토마톤이 뽀작뽀작 다가왔다.
그 손에는 넝마 조각이 된 마도사의 모자가 들려 있었다.
“어차차, 아이구, 고마워.”
허리를 숙여 모자를 받아 든 캐롯이 안전모를 쓴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고개를 꾸벅 숙인 작업용 오토마톤은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웃으며 쳐다보던 캐롯은 손에 든 마도사의 모자를 팡팡 털어서 펼치더니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냥 모자였다. 아무런 특이점 없는.
이제 캐롯은 그것을 머리에 올려 써보았다.
“음, 어때?”
커다란 키에 마도사의 모자를 눌러쓴 파란 머리 인형 아가씨가 고개를 돌리니 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폭언을 쏟아냈다.
“으악! 당장 그거 벗어!”
“아이코, 무섭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