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손님맞이! 224 >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준비 작업을 하는 통에 크랭크는 기절할 지경이 되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체력 포션을 벌컥벌컥 들이킨 크랭크가 짧은 한숨을 내쉰다.
“후웁-! 죽으면 얼마든지 쉴 수 있다. 지금은 움직여야 해.”
평소라면 듣기 싫은 소리였지만 지금의 캐롯은 이전 몸 주인의 잔류 기억 때문에 성격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새로 만든 전투복을 입어보고 있던 캐롯이 고개를 돌리고 크랭크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그래도 앞을 잘 보고 움직여야 편하게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잊으면 안돼. 미련을 남기면 고스트가 된다고.”
“음, 듣기 좋은 소리다.”
응원쯤으로 생각한 크랭크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캐롯은 말을 하고 나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어? 방금 누가 말한 거야?”
“네가.”
“내가?”
접이식 무기고를 펼치고 장비를 손질하던 아리에테가 고개를 끄덕이자 멀거니 서 있던 캐롯의 얼굴이 확 일그러진다.
그는 커다란 기계손을 움직거려 보더니 이내 혀를 찼다.
쯧!
“크랭크, 이번 일이 끝나면 이 몸은 그 마녀에게 돌려줘야겠어. 의식이 뒤섞이는 기분이야.”
“오오! 잘 생각했다.”
캐롯의 무기를 손질하고 있던 아리에테의 말이었다.
재료 가공을 돕던 투나도 고개를 내민다.
“으, 응. 지금 모습도 좋지만, 난 옛날 그 몸이 더 조, 좋았던 것 같아. 그런데, 네 몸은 어떻게 했어?”
캐롯의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악! 거기 두고 왔다!”
“그래, 가져오는 걸 깜빡했군.”
몸을 휙 돌린 캐롯이 저물어져 가는 하늘에 대고 불끈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분명 묘한 짓을 해대고 있을 거야! 이 마녀!”
같은 시각, 고르곤은 연구실에서 캐롯의 몸을 분해해 내부를 살피고 있다가 귀를 후비적거렸다.
방주도시 아르곤의 모든 기술과 인력이 총동원된 준비 작업이 한참 진행되는 동안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 * *
영주의 집무실.
자리를 지키고 앉아 도시 방어 관련 안건의 최종 승인을 해대던 영주가 깍지 낀 손에 턱을 올리고 후후 웃음 지었다.
그의 좌우로는 다소곳한 메이드 하나와 고지식한 인상의 집사장이 서서 손님을 맞이했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좋군요. 하지만 저희도 그 부분에 대해서 약간의 참관을 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신기하잖습니까? 오토마톤이 마법을 쓰다니, 대처 어떤 마법일까요?”
집무실 중앙에는 사람 대신 우아한 의자와 방석, 그 위에 커다란 수정구가 올려져 있었다.
일전에 하늘 사다리를 쏘아 올려 부유섬을 끌어내리는 대형 사고를 친 어느 모험가에게 감시를 붙이면서 협상차 다녀갔던 엘프 장로회 사람이 두고 간 것이다.
수정구에는 중년 엘프 하나가 비춰져 있었다.
바로 엘프들의 마법사 길드라고 할 수 있는 검은 소나무 탑의 총책임자 필림 장로, 그는 얼굴을 좀 굳히더니 제안했다.
-그 건에 대해서는 포획 후에 협상합시다. 그런데 당신들만으로 괜찮겠습니까? 우리 쪽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아르곤 데오 영주는 기분이 좋으면 집무실 의자에 앉은 채 그걸 빙글빙글 돌리는 버릇이 있다.
후후후 웃음 지으며 의자를 한 바퀴 돌리던 그가 다시 수정구를 보더니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많은 시민께서 힘써 주신 반석 위에 지금의 아르곤은 튼튼하게 세워졌습니다.”
방주 도시 아르곤에 대한 이력 보고를 받은 필림도 영주가 왜 이리 자신만만한지 대략 짐작했다.
요즘 잘나간다는 거로군.
자신 있다는 거겠지.
-알겠습니다. 되도록 멀쩡하게라는 말은 하지 않겠소. 파편이라도 좋으니 가능한 수거해 주시오. 그거면 됩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칭-!
통신이 종료되었다.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후후 웃음 지은 데오 영주는 다시 한 번 빙글빙글 의자를 돌리더니 한밤중에도 바쁘게 움직이는 성내를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출세했군요. 세상에 엘프족 장로님과 독대라니.”
“흠, 아직 더 욕심부리셔도 좋지 않을까 봅니다만?”
집사장의 듣기 좋은 소리에 영주가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고개를 돌린 그가 이번엔 안경 낀 메이드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고르곤, 들으셨습니까?”
스르륵 뜨는 눈동자는 케이스의 것이 아니었다.
음후후 웃음 지은 그녀가 허리에 손을 대더니 말했다.
“우리 관계를 엘프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요?”
“협력이라면 나는 엘프보다 당신을 선택할 것입니다. 당신은 생명력의 유지, 우리는 현자의 지식. 이보다 더 좋은 거래는 없을 겁니다.”
고르곤이 배를 잡고 웃는다.
“도시 젊은이들의 정기를 팔아 치운 악덕 영주가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난 데오 영주가 어깨를 으쓱이며 인상을 찌푸리고 웃는다.
선한 인상은 사라지고 어쩐지 흑막의 악당 같다.
“후후! 놔둬 봤자 쓸데없는 수음으로 낭비될 텐데 나는 아버님의 혜안에 동의합니다.”
듣고 있던 집사장이 헛기침을 했다.
“으흠! 영주님, 말씀을 가려 주십시오.”
“어차차, 레이디를 앞에 두고 못할 소리를 했군요.”
겉치레나마 마녀를 여자 취급해 주는 영주의 행동은 고르곤을 다시 웃게 했다.
그녀 역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버지나 자식이나 속이 시커멓기는 똑같구나. 자기 욕심은 물론 도시 시민들까지 챙기고 있지. 약았어, 하지만 적당히 약았어. 그래서 마음에 들어.”
마녀에게 칭찬을 들은 데오 영주는 가슴에 손을 대고 허리를 숙이더니 말했다.
“그 인형을 보고 싶으시다고요?”
“그렇죠. 엘프들이 수거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좋아요.”
“알겠습니다.”
자리에 앉아 다시 결재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한 영주는 손가락을 튕기더니 말했다.
“메이드 케이스, 오늘 밤은 철야가 될 것 같으니 진한 커피를 부탁합니다.”
메이드 케이스가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 * *
어둠 속, 경비대 정찰견 도입 사업에서 자문으로 활동 중인 여성 모험가 니퍼가 곁에 앉아 있던 늑대개의 으르렁거림에 고개를 돌렸다.
자박자박!
숲길에서 느긋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챙이 넓은 마녀의 삐죽 모자를 눌러쓴 오토마톤이었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경비대원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길을 모르고 찾아가는 것 같지 않냐?”
그들이 이런 인상을 받은 이유는 가끔 멈춰 서서 뭔가 주변을 살피고 냄새를 맡는 것 같은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다.
“뭘 찾지? 모험가들에게 따로 추적 마법이라도 심어뒀나?”
“쯧, 가능성 높네.”
그들의 뒤로 얼굴에 위장을 한 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수, 작전 시작한다.”
사사삭!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가 싶더니 사레나를 감시하던 경비병들이 모두 철수했다.
각종 은폐 마법에 냄새를 죽이는 방향제까지 써서 기척을 숨긴 탓에 엘프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마도사 인형 퇴치 작전은 그 가공할 햇빛 공격을 막기 위해 한밤에 결행되었다.
다만, 시간을 맞추기 위해 도시 부근까지 그 접근을 허용해야 했으나, 대신 남는 시간 동안 가능한 준비를 갖춰 두기로 했다.
그것도 모르고 사레나는 대기 중에 흐르는 마나의 향기를 되짚어 추적을 이어 나갔다.
동력원이 떨어지는 바람에 충전을 위해서 3일이나 소비하다니.
점점 진해지는 마나의 향기를 맡으며 사레나가 중얼거렸다.
몸은 하나인데 나오는 목소리는 두 가지라는 것이 기괴하다.
“아십니까? 검은 백합의 꽃말은 사랑과 저주라고 합니다.”
“그러냐? 지금의 우리와 잘 어울리는구나.”
따각-!
사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뭔가를 밟은 탓이다.
번쩍-!
다리 아래에서 엄청난 빛무리가 솟아오른다.
사레나는 오른손을 아래로 그리고 왼손으로는 모자를 붙잡았다.
꿍-! 쿠구구구구-!
빛의 폭발은 아르곤의 성벽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모두가 긴장된 표정으로 달빛이 쏟아지는 먼지구름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 속에서 일그러진 도끼눈이 깜빡이더니 멀쩡한 마법사 오토마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표 건재!”
산중의 벙커 속에서 망원경을 든 대원의 보고에 현장 지휘를 위해 나온 파본 제2경비대장이 외쳤다.
“자문에 따르면 저걸 막으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싸움도 돈이 있어야 하는 거다! 또 쏴라-! 폭격 후 오토마톤 돌입 준비!”
두 발째 마력수정폭탄은 오토마톤의 슬링으로 발사되었다.
날아오는 수정탄을 발견한 사레나가 손바닥을 펼치자 그것은 다시 원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더니 폭발했다.
콰쾅-! 쿠구구구구!
생각지도 못한 반격에 파본 경비대장은 작전을 변경, 바로 오토마톤을 투입했다.
“거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마력수정폭탄은 착탄 후 폭발까지 시간 차가 크다. 위력을 제외하면 사용하기에 난점이 많은 것은 사실.”
동네 마실이라도 나가는 양 느긋하게 모습을 드러낸 두 개의 그림자가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면서 숲속에서 걸어 나왔다.
퉁-! 휘리리릭! 팡!
때마침 밤하늘로 솟아오른 조명탄이 사방으로 빛을 뿌려대자 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폭발로 생겨 버린 널찍한 폭심지 중앙에 자리 잡은 마도사 오토마톤의 앞으로 두 대의 인형 병기가 다가왔다.
하나는 특주품 몸체로 돌아온 캐롯, 가죽 자켓과 롱스커트 전투복을 차려입고 파란 방열 가발에는 얼마 전 로마니에게 받은 그의 모자를 눌러쓰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최신 기술로 개량된 울파가 여전히 화려한 오렌지색 방열 가발을 산발하고 있었는데, 그 머리에도 로마니의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출발 직전 캐롯이 그의 모자를 쓰고 나타나자 울파도 마스터에게 억지를 부려서 얻어 온 것이다.
하나같이 머리에 뭔가를 쓴 3기의 오토마톤이 서로를 마주했다.
그걸 보고 사레나가 먼저 반갑게 손가락을 튕겼다.
“당신들 멋진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어, 그래. 네 것도 좋아 보여. 아는 마녀에게 들었는데, 마도사나 마녀에게 그 모자는 지위와 능력을 상징한다며?”
그걸 알아봐 주자 사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마도사의 긍지이자 자존심.”
뭔가 대화가 통할 것 같은 느낌, 얼굴이 환해진 캐롯이 한 발 내밀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싸움은 그만하지 않을래? 한바탕 날뛰었으면 됐잖아? 그 정도면 쌓인 것도 좀 풀리지 않았어?”
가만히 있던 사레나가 되물었다.
“데려간 사람들은, 아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설치된 폭발물은?”
“오! 그건 걱정 마! 따로 인근 미개척지로 보내서 마을을 조성할 참이니까.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활짝 웃은 캐롯이 두 팔을 벌리고 말했다.
생각을 정리할 모양인 듯, 사레나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러더니 다시 얼굴을 들었는데, 턱이 열리고 이빨이 드러나 있었다.
어느새 목소리도 마도사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잘됐군. 이제 방해 없이 날뛸 수 있겠구나. 클클클-!”
소프트 스킨이 올라간 캐롯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잠자코 보고 있던 울파가 지적했다.
“마도사가 원하는 것은 단지 복수.”
“에이! 조그만 구슬리면 되는 거였는데!”
짝-! 칭!
사레나가 두 손바닥을 마주 대자 팔과 가슴팍에 그려진 문자들이 밝은 빛을 냈다.
그걸 보고 캐롯이 단창을 휘둘렀다.
“뭔가 또 큰 기술을 쓰려는 거지!”
가슴을 노리고 들어오는 창날을 피해 뒤로 훌쩍 뛰어오른 사레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크리에이트 골렘 아미. 일어서라, 나의 기사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