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성능 개량! (4) 223 >
피곤한 기색으로 자리에 앉아 있던 크랭크가 투구를 절절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빈 몸체에 머릿속 내용물을 통째로 옮겼을 뿐.”
“이 몸, 100년 전에 만들어진 특주품이래. 그래서 그런지 팔다리가 정말 매끄럽게 잘 돌아. 봐봐,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체조를 하듯이 긴 다리를 쭉 내밀고 두 팔을 우아하게 올린 캐롯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백덤블링을 넘기 시작한다.
유연하게 꺾이는 허리는 물론 그걸 버텨내는 팔다리를 보고 투나가 급흥분해 버렸다.
“부, 부드러워!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지?”
굳이 따지자면 일반인이 단숨에 체조선수 정도의 기량을 선보이게 된 것인데, 크랭크의 공방에 기거하며 오토마톤들을 많이 접한 사람들은 그 움직임의 차이를 금세 알아보았다.
다시 돌아온 캐롯을 살펴보던 트리스타가 손짓했다.
“투나, 여길 보세요. 관절이 전부 2단 구조로 되어 있어요.”
“끼요오옵!”
하얀 천을 가운처럼 걸친 캐롯은 으헤헤 웃음 지으며 양손으로 V를 그렸다.
“오오오! 배, 백 년 전 기술이 나, 나를 흥분시키고 있어! 어, 응어?”
언젠가의 크랭크처럼 놀라운 기술적 발견에 괴성을 질러대던 투나는 곧 캐롯의 품에 폭 안겨졌다.
키 차이 때문에 고개를 드니 어른 캐롯이 히히 웃으며 서 있다.
여성형인데도 불구, 투나의 얼굴이 확 달아올라 버린다.
캐롯은 이어서 아리에테, 트리스타를 끌어안았다.
“으악! 이 녀석은 뭐야?!”
밖의 소란에 낮잠을 방해받은 쿠르프가 항의하러 나왔다가 커다란 오토마톤에게 갑작스레 붙들리자 깜짝 놀라서 버둥거렸다.
그는 상대가 캐롯을 닮을 것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으응? 너 캐롯이냐? 왜 이렇게 커진 게냐?”
커다래진 캐롯은 대답 대신 흐뭇하게 웃어만 보였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파티 멤버들도 어른 캐롯을 만나자마자 프리 허그를 당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왁!? 캐롯? 캐롯이에요?”
다들 한번씩 안아준 캐롯은 이제야 만족한 듯 팔을 허리에 올리고 씩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머리를 조금 긁적이며 말했다.
“어, 잘 모르겠네. 나 왜 이러는 거지. 이 몸의 전 주인 버릇인 듯?”
“알았으니 옷을 입자.”
크랭크가 가져다준 여분의 전투복을 입은 캐롯은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춰 보더니 히죽 웃는다.
“이거 멋진걸? 내 팔다리 엄청 길다. 게다가 이 얼굴! 멋져! 최고야! 나는 자라면 이런 얼굴이 되는구나!”
확실히 100년 전 물건이라서 그런지 골격 자체가 현재의 통일된 규격이 아니었다.
노멀 오토마톤인 샤를과 로테의 키가 170 평균에 맞춰져 있는데, 지금 캐롯은 180㎝에 달했다.
장난기는 옅어지고 어른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인상이 강해진 캐롯이 그 얼굴로 히히 웃는다.
파격적인 변신에 놀란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놓았다.
“근데 적응이 안되네. 저 얼굴에 성격은 그대로라서.”
“어, 근데 미인이다. 살짝 타입.”
부끄러워 얼굴이 좀 달아오른 코비의 폭풍 발언에 사람들이 좀 킥킥 웃거나 보리스의 경우엔 인상을 찌푸렸다.
“맞아. 키가 크고 엉덩이가 큰 여자가 취향이랬지.”
“야! 보리스!”
빨개진 얼굴의 코비가 소리치자 보리스는 재빠르게 피신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웃기 바쁘다.
코비에게 와하하 웃어주던 캐롯은 이제 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크랭크에게 몸을 돌리더니 자기 전투복을 쓰다듬었다.
“크랭크, 칼날 치마는? 이 몸으로 오르골 인형을 돌리면 그건 정말 굉장한 위력일 거야.”
“임시로 입혀 놓은 거다. 알몸으로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으니까.”
“오오! 그런데 이것도 이 몸 전 주인의 인상인가? 별로 부끄러움이 없어졌어.”
임무와는 별개로 오토마톤 공학에 관심이 생긴 트리스타가 끼어들었다.
“잔류 기억인가요? 신기하군요. 관련 서적에서 보긴 했는데 실제로 그럴 줄이야.”
“기술의 실증은 중요합니다. 앞으로도 정진합시다.”
그렇게 말한 크랭크였지만 마녀에게 기력이 빨린 상태라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좀 쉬었으면 좋겠군.”
순식간에 우거지상이 된 캐롯이 공방의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봤지? 따라갔으면 너희들도 이렇게 됐을 거야. 그 마녀는 방문자의 생명력을 통행료로 삼는다고. 엘프를 특히 좋아했던 것 같아. 상큼한 샐러드 맛이 난댔나?”
트리스타의 고운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다.
항상 화사하게 웃으며 그녀들을 맞이하는 마녀 공방의 그 케이스를 떠올린 아리에테도 찡그린 얼굴을 했다.
“으으음, 그건 싫군.”
“나, 나도 마, 마녀 공방에서 만나는 걸로 만족할래.”
마녀 공방, 몇 번 들은 곳이다.
트리스타가 손을 든다.
“기회가 된다면 나도 그곳을 방문하고 싶군요. 그곳이라면 괜찮죠?”
듣고 있던 비타가 손바닥을 마주 댔다.
“그럼 지금부터 같이 가실래요? 저 조금 있다가 성 바깥 포로수용소에 치료하러 가야 하거든요. 가기 전 티 타임!”
토닥토닥, 주물주물, 크랭크의 어깨를 주무르던 캐롯이 말했다.
“그러도록 해. 지금 크랭크가 지쳐서 좀 쉬어야 하니까.”
“그보다 비타, 요즘 군것질에 너무 돈 많이 쓰는 거 아니야?”
보리스가 거기에 한마디 더하자 비타가 히히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 대신관님이 그러셨는데, 맛있는 것만 먹고 살아도 짧은 인생이래요. 걱정 마세요. 시집갈 돈은 착실히 모아두고 있으니까.”
그리하여 비타, 투나, 트리스타가 골목길로 사라졌다.
호위로는 샤를이 따라갔다.
팔짱을 끼고 그걸 보고 있던 보리스가 지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좋겠네. 혼수금 모으고 있대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지오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보리스와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벼르고 있던 코비까지 난입해서 셋이서 투닥이는 모습을 쳐다보던 쿠르프가 크랭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릴 비운 사이에 이런저런 이야기는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비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쿠르프 씨와도 상의하고 싶은 것이······.”
캐롯과 아리에테가 소리를 빽 질렀다.
“상의고 뭐고! 넌 일단 쉬어야 해!”
“그래! 맞다!”
그녀들의 성화에 별수 없이 공방 안의 침대에 드러누웠지만 얼마 못 가 다시 일어났다.
경비대에서 급한 전령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급보입니다! 강도단 토벌전에 참여했던 모험가 크랭크와 그 파티 멤버는 속히 경비대로 오시라는 명령입니다!”
“뭐지? 그 녀석이 다시 나타났나?”
크랭크가 끙 소리를 내며 힘겹게 커다란 몸을 일으켰으나 캐롯이 그의 어깨를 잡아 힘으로 다시 내리눌렀다.
쿵-!
“으윽!”
“오오, 이거 좋네. 주인님을 힘으로 내리누를 날이 올 줄이야.”
크랭크도 좀 놀란 눈치다.
그의 투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캐롯이 허리를 펴더니 말했다.
“어쨌든 그 녀석이랑 관련된 일이겠지. 아리에테랑 같이 다녀올게. 쉬고 있어. 로테! 호위 부탁해.”
둘은 서둘러 경비대로 향했다.
* * *
경비대 사무실 하나에는 얼마 전 토벌전에서 활약했던 사람들이 거의 전부 모여 있었다.
대리 참석한 아리에테와 그녀가 데려온 오토마톤을 보고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지?”
캐롯이 눈가에 손가락 V를 가로로 들이대며 윙크했다.
“데헷-! 캐롯이에욤.”
“어엉?!”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그중에는 로마니도 있었다.
“놀랍군. 벌써 수리가 끝났나?”
“아니, 저걸 수리라고 불러야 합니까? 개량에도 정도가 있지. 어딜 얼마나 건드린 거야?”
팔짱을 하고 흐흐 웃던 캐롯이 머리 부분을 가리키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요, 언저리?”
“맞네, 땅콩이네.”
“키가 나만 해. 자이언트 땅콩이야.”
“품종 개량이냐?”
모험가들의 농담에 캐롯이 후하하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와! 품종 개량! 그거 마음에 드네.”
짝짝!
요란한 박수 소리에 모험가들이 고개를 돌린다.
책상 뒤에는 붉은 단발머리를 산발한 제1경비대장과 곁에는 제2경비대장이 서 있었다.
자리에 앉은 셀린 제1경비대장이 말했다.
“장거리 정찰을 나가 있는 제3경비대장으로부터의 연락입니다. 이게 여러분이 말했던 그 녀석이라는 오토마톤입니까?”
마법사 오토마톤을 모험가들은 얼버무려 그 녀석이라고 불렀다.
셀린 경비대장의 손에는 급하게 그린 종이가 한 장 그려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숲길을 걷고 있는 삐죽 모자를 눌러쓴 오토마톤이 그려져 있었다.
시장 거리에서 보았다면 재미있는 그림이구나 싶었겠지만 한바탕 일전을 치른 사람들에겐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으윽, 맞습니다. 그 녀석입니다.”
짧은 한숨을 내쉰 셀린 대신, 파본 제2경비대장이 빠르게 말했다.
“경비 레벨을 최대로, 길드에도 모험가의 동원령을 선포하겠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녀석과 접근전을 치른 오토마톤이 있다고 하던데 협조 부탁합니다.”
한자리에 모인 모험가들은 다들 커다랗게 변한 캐롯과 로마니를 쳐다보며 두런두런 중얼거렸다.
“제대로 붙어서 싸운 녀석이라고 해봐야 울파와 캐롯 정도지. 나머지는 이동 가옥 제압하느라 바빴으니까.”
“그나저나 크랭크 이 친구는 미리 준비했었네.”
“로마니 씨, 울파는요?”
로마니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수리 중입니다. 내일쯤 끝날 거요.”
고개를 끄덕인 셀린 제1경비대장이 말했다.
“어찌 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이 녀석은 지금 아르곤에서 하루 정도 떨어진 거리를 혼자서, 그것도 걸어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미리 맞이할 준비를 해둡시다.”
그날 바로 방주 도시 아르곤에서 비상준비태세가 발령되었다.
3년 전 오크 군단과의 대규모 전투 이후로 처음.
놀라운 것은 이것이 단 1기의 오토마톤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영주는 전 병력 동원령을 허가, 전권을 파본 제2경비대장이 맡았다.
각종 병기로 무장한 병력이 넓은 성벽 위에서 대기하고 모험가 길드 소속의 마법사들과 신관들도 배치되었다.
그 외에 장갑차량 여러 대도 도시 밖으로 빠져나가 아르곤 주변 길목을 지키고 서서 드나드는 상단의 출입을 막고 접근하는 마법사 오토마톤의 위치를 파악했다.
더불어 오토마톤 정비 길드에서는 급행으로 울파의 수리를 끝냈고, 캐롯의 새 전투복도 8번가 부인회를 총동원해서 급하게 제작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는 통에 공방 인원만으로는 손이 부족하게 되자 드워프 어르신 쿠르프가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도시에 체류 중인 드워프 친구들을 다 모아왔다.
“어르신과 친구라니! 당치도 않다. 나이 차가 얼마나 나는데!”
하지만 눈썹을 꿈틀거리는 아리에테의 눈에는 다들 동년배로 보였다.
“어르신! 뭘 하면 되겠습니까?”
“공방에서 지대공 요격 장비를 만들고 있다! 내 한턱 쓸 테니 좀 거들어라!”
드워프들이 7번 공방 안으로 우루루 들어가니 앞서 도착한 동료들이 각자 장비 한 대씩 잡고 뭔가를 자르고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협조 요청을 받은 경비대에서도 재료를 계속해서 반입하고 완성된 물건을 옮기느라 분주했다.
지금 여기 공방촌은 도시의 비상 상황에 따라 임시 공장화가 되어 물건을 찍어내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근면 성실한 노동을 숭고하게 여기는 드워프의 눈이 빛난다.
“지대공 요격 장비? 지상에서 하늘을 공격한다는 말인가? 재미있겠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