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해적단! 219 >
로마니가 모자를 벗더니 그걸 캐롯에게 씌워 주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절박한 상황이건만 이 반백의 중년 사내는 그저 밝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글쎄다. 악당에게 원망받을 짓을 너무 많이 해서 누군지 잘 모르겠구나. 어쨌든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모자를 푹 눌러쓴 캐롯이 그걸 슬쩍 들어 시선을 드러냈다.
“지금 그런 거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거든요? 아직 무사한 것도 아니고!”
로마니는 언제나처럼 하하 웃으며 몸을 돌렸다.
“잡아야지, 걸린 돈이 얼만데. 은퇴 전까지는 바짝 벌어놔야 노후가 편하단다.”
“아니아니,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닌데 말이에요.”
저만치 가 버린 그의 등을 바라보며 캐롯이 중얼거렸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팔다리가 없어서 지금으로선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캐롯은 지붕에 의자를 펴고 느긋하게 누워 주변 경계를 맡았다.
행여 그 녀석이 또 오면 협박질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캐롯은 자기 행동을 조금 후회했다.
“감히 애들을 인질로 잡아 협박이라니. 미친 짓이었어. 나도 참 못되어 먹었네. 어쩌려고 그랬을까? 인형 주제에.”
지붕에 자리 잡은 캐롯의 아래, 차량 하부에서 크랭크의 투구가 쑥 내밀어졌다.
캐롯이 힐끔 고개와 시선을 돌리자 바닥에 누운 크랭크는 엄지손가락을 들고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둘은 시선이 마주쳤다.
“원한다면 그 녀석 말대로 오늘치 기억을 지워 줄 수도 있다만.”
캐롯이 갑자기 으하하 웃더니 남은 손바닥을 들어 정오를 향해 달리는 태양을 가리며 말했다.
“에? 그건 됐어. 이것도 경험! 이것이 베테랑스! 온갖 사건과 사고를 쳐가며 나는 너희를 닮아가는 거야.”
저녁 무렵, 완벽하진 않지만 대부분 차량의 수리가 완료되어 이동을 시작했다.
차량의 행렬에는 노획한 강도단의 이동 가옥 몇 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질이지.”
“결국 데려가는구나. 씁쓸하네.”
캐롯의 중얼거림에 파티 차량의 운전대를 잡은 크랭크가 대답했다.
“어쩔 수 없다. 무력의 차이가 너무 커. 게다가 강도단에게도 가족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
그렇다고 해서 전부 데려가지는 않았다. 오크나 코볼트 같은 이 종족을 포함한 십 수명의 강도 단원은 풀어주었다.
인원 파악을 마친 경비대원들이 명단을 넘기며 말했다.
“우리가 데려가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할 건지는 너희가 결정해라. 우리는 협상의 여지가 있다.”
강도단에게 협상을 제시한 것도 우스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들의 규모와 보유한 마법사 오토마톤이 보여준 인상 깊은 무력에 아르곤 토벌대는 일개 강도단을 무력 단체로 규정하고 협상을 제시하기로 했다.
동시에 이 협상안이 뒤쫓아 올지도 모르는 그 미친 오토마톤 마법사를 저지할 연막으로써 작용하기를 바랐다.
황량한 벌판에 남겨진 사내들은 우거지상으로 떠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자기들끼리 모여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노획한 움직이는 이동 가옥에 감시로 올라탄 토벌대원들이 창가에 얼굴을 내밀고 중얼거렸다.
“미행이 붙은 줄도 모르고 돌아가겠지?”
“이봐, 듣겠어.”
몰리 마법사단에서 차출된 리모가 고개를 돌렸다.
“저것들이 가족을 찾아올까요?”
사람들을 감시하던 딱딱한 얼굴의 경비대원이 피식 웃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내기라도 하시렵니까? 어제 그 사람들처럼.”
“오호, 합시다. 어디에 걸래요? 나는 말이지······.”
히히덕거리는 리모를 보고 겁에 질려 앉아 있던 강도단의 가족 하나가 벌떡 일어나서 항의했다.
금발에 사나운 인상의 처녀였다.
“이봐요! 그게 사람이 할 소리예요!”
무심한 얼굴의 리모가 고개를 돌렸다.
기대어 놓은 롱소드를 붙잡은 리모가 말했다.
군 시절 상관 폭행도 저지른 적이 있는 리모는 그 눈빛이 제정신인 사람 같지 않았다.
칭.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에게로 향한다.
“강도단 주제에 꽤 선을 지켜가며 영업한 것 같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으며 목숨을 부지해 온 것들에게 사람이 어쩌고 하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부들부들 떨던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더니 곧 거창한 소리로 통곡을 시작했다.
왜냐하면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으아아앙-!”
경비대원이 그를 흘겼다.
“이보쇼.”
“아, 울렸네. 아무렴 어때요? 저것들도 그랬을 텐데.”
표독스러운 얼굴의 여자가 고개를 들더니 눈물을 글썽인 채로 말했다.
“적어도 우리는 안 그랬거든요!”
“오호우, 아줌씨들이 그걸 어떻게 장담······.”
토스트와 성격이 비슷한 리모가 놀리기 시작하자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서글픈 얼굴을 한 빨간 머리 아가씨였는데 키가 그보다 커서 고개를 들어야 했다.
레나였다.
리모는 코를 조금 벌렁거리더니 말을 돌렸다.
“어, 음, 내가 좀 심한 것 같아. 미안해. 그만할게. 때리지 마.”
“안 때려요.”
볼을 부풀린 레나는 그를 지나쳐 금발 처녀의 곁으로 가서 앉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울지 마세요. 다들 아빠들이 찾으러 올 거예요.”
오면 잡힐 텐데.
리모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레나의 주먹질에 머리가 터지고 싶지는 않았기에 고개를 휙 돌렸다.
자동 석궁을 들고 창가에 기대어 선 애덤이 킥킥거리며 웃고 있다.
“아아앙! 아빠아!”
“으앙!”
겁에 질려 있던 사람들이 다들 레나의 주변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팅-!
어느새 금화를 꺼내 튕겨 올린 리모가 찡긋 윙크와 함께 경비대원에게 추파를 날렸다.
“가족을 찾으러 온다, 10만 리즈.”
“호오, 진심입니까?”
사람의 인생을 가지고 하는 악취미적인 내기가 토벌대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동 행렬의 중간쯤, 크랭크의 장갑차량,
보리스가 구멍 뚫린 천장에 대고 외쳤다.
“로테! 뭔가 보여?”
“아니.”
대답은 여전히 지붕 위를 지키고 앉은 캐롯이 했다.
위를 올려다본 아리에테가 운전석으로 다가가 크랭크에게 말했다.
“크랭크, 캐롯의 팔다리는 어쩌지?”
“물론 다시 붙일 거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무장이 더 필요할 것 같아.”
“오! 그럼 나 파워업 시켜주는 거야? 파워업?”
운전기사가 적어서 지오를 다른 차량으로 출장 내보낸 크랭크가 운전석을 차지하고 앉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겁게 중얼거렸다.
“오토마톤 마법사라니, 끔찍한 조합이었다. 더구나 이게 해결된 문제가 아니니 마음이 놓이질 않는군. 돌아갈 때까지만이라도 부디 공격은 없었으면 좋겠어.”
여전히 손에 쥔 크랭크의 전 재산, 기폭 스크롤을 팔랑거리며 캐롯이 중얼거렸다.
“나도 그래, 이건 협박이야. 협박은 실행되지 않았을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고.”
“음.”
그렇게 긴장의 시간이 사흘이 넘도록 계속되었으나 마법사 오토마톤 사레나는 어째서인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밤의 야영지, 모닥불 주변에 몰려 앉은 모험가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하루면 도착이야.”
“아직까진 조용하군. 그 협상안이 먹힌 건가?”
“글쎄.”
“사람 애태우고 말이야! 올 거면 빨리 와라!”
긴장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 모험가 하나가 밤하늘에 대고 버럭 외치자 도끼눈을 뜬 동료 모험가들이 합심해서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퍽퍽퍽!
“어서 이놈을 닥치게 해!”
“맞아! 재수 없는 소리 말라고!”
소란이 좀 있긴 했으나 여전히 밤하늘은 고요하다.
주변 경계 중이던 아스칸이 가만히 있다가 문득 투구 쓴 머리를 돌렸다.
“그 자동 인형은 하늘을 날더군. 앞으로를 위해서도 대공 방어 수단이 필요하다.”
게토 ///파티의 장갑차량을 수리하려 와있던 크랭크가 엔진실에서 투구를 끄집어냈다. 투구 속의 그의 눈은 무섭도록 반짝이고 있었다.
사나이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단어다.
“대공 방어 수단, 대공 포화인가!”
“누가 우리 주인님 좀 말려주셈. 또 무슨 이상한 생각 하고 있어.”
한쪽 다리에 목발을 대어 뒤뚱거리면서도 야영지를 한 바퀴 살펴보고 돌아온 캐롯의 말이었다.
캐롯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어떤 해적 선장처럼 잘려 나간 다리에 목발을, 팔에는 갈고리를 달고 있었다.
로마니에게 받은 모자의 챙을 세워서 접고, 멋진 검은 안대까지 끼고 나타난 꼬마 인형을 보고 음식 재료를 다듬던 리모가 물었다.
“뭐야, 너 눈도 다쳤었냐?”
“오호이~! 우리는 캐롯 해적단! 나는 선장 후크 캐롯이다! 더불어 저것이 이몸의 해적선!”
어느덧 후회와 반성을 훌훌 털어낸 캐롯은 임시로 붙여놓은 갈고리 팔을 들어 강도단 가족의 임시 거처로 이용 중인 이동 가옥을 가리켰다.
만든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해적선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기괴하고 살벌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캐롯의 이 유쾌함과 활발함은 주변으로 번져나갔다. 모험가 중에는 인질들에게 무례하게 구는 자들도 더러 있었으나 밝게 웃어대는 사람들에게 손을 댈 정도로 인간의 길을 벗어난 자들은 없었다.
꼬마들을 죄다 끌고 괴상하게 생긴 이동 가옥으로 들어가 테라스에서 뛰쳐나온 캐롯이 밤하늘을 향해 갈고리 팔을 들었다.
“자! 가자! 부하들아! 별의 바다가 우리를 부른다!”
“와아아!”
“깃발을 올려라!”
어른들의 고함에도 캐롯과 아이들은 배를 잡고 웃어댈 뿐이었다.
“어이! 당신네 땅콩들 좀 말려! 시끄럽다고!”
“으악하하하!”
역시 덜덜거리는 장갑차량을 고치다가 고개를 든 사내들이 흐흐 웃어댔다.
“음, 질질 짜고 있는 것보다야 훨씬 보기 좋은데, 뭐.”
모험가들은 죽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야영 중이었는데, 인질로 데려온 강도단의 가족들은 크랭크와 게토의 파티를 잘 따랐다.
날 선 발언을 해 대는 요주의 인물이 하나 있긴 했지만 파티의 분위기 자체가 유쾌해서 보통 인질들이 보이는 의기소침함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한 남자가 거뭇거뭇한 수염이 잔뜩 솟아오른 턱은 매만지며 말했다.
“초원의 해적단! 꽤 멋지지 않아?”
“이 화상아!”
퍽퍽!
어찌나 적응이 뛰어난지 저지른 일에 대한 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가족을 따라나선 훌륭한 남편을 밀가루 반죽할 때 쓰는 밀대로 두들겨 패는 여편네의 모습이 보일 지경이었다.
그들의 인솔을 맡은 게토가 소리를 좀 질렀다.
“거, 사랑싸움은 나중에 하시오!”
“사랑싸움이라니! 이 화상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 중인데 그래요!”
“그, 그만 때려···!”
머리를 절절 흔든 게토는 차량의 엔진실에 기어들어 간 크랭크의 엉덩이를 살폈다. 그의 엉덩이가 말했다.
“그보다 의문이군요. 이 사람들의 말 대로라면 주변 도시에서 강도단의 활동을 묵인했다는 것이 됩니다.”
차량에 팔을 대고 거기에 번쩍이는 대머리 이마를 가져다 댄 게토가 나중에 보고서로 작성할 내용을 정리했다.
“실제로 피해를 입은 것은 교역 상단의 물건이 대부분, 암시장으로 유통된 장물은 주변 도시로 흘러 들어가 시세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겠지. 그래서 못 본 척한 거고.”
그때 해적 놀이를 마친 후크 캐롯이 나타났다.
“콩고물을 노린 것은 우리가 아니라 주변 도시들이었던 거네?”
“그렇지. 똑똑하구나.”
“엣헴!”
캐롯이 오랜만에 허리에 손을 올리고 배를 쑥 내민다. 따라온 아이들도 그걸 따라 했다. 엣헴!
어른들의 사정과 잘못은 모르겠고 아이들만은 참 해맑아서 주변의 살벌한 모험가들마저 피식 웃게 했다.
그때 나이 든 노파 하나가 슬쩍 다가왔다.
“저, 나리, 우리는 가면 어떻게 되나요?”
“글쎄올시다. 우리 영주님은 포악한 분이 아니시오. 다만 강도단 친구들은 노역을 각오해야 할거고, 그 가족들은 아마 개척민 마을로 보내지겠지. 뭐, 그리 큰 걱정은 마시오들.”
게토의 설명에 쭈뼛거리던 사람들은 그나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금발 여기사가 나타났다.
“크랭크! 내 로시난테의 상태가 이상하다!”
차량의 엔진실에서 고개를 내민 크랭크의 엉덩이가 대답했다.
“조금 기다려라. 나는 지금 바쁘다.”
울상을 짓는 그녀를 보고 포로 남자 하나가 밥을 먹다 말고 그릇을 손에 든 채 일어섰다.
“괜찮다면 내가 봐주겠소. 그 자동 2륜차의 최종 형태를 다듬은 게 우리거든.”
“오! 정말인가!”
아내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사내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