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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인형 오토마톤-205화 (205/329)

<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패자 부활전! 205 >

보름 넘게 들이붓던 장마가 끝났다. 그리고 공주의 여름휴가도 끝났고, 그녀의 현지 안내 겸 호위도 끝났다.

하지만 공주는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

“이런 화창한 여름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이 몸은 국민과 국토의 타는 목을 적셔주는 장맛비도 좋아하지만, 들판의 곡식과 과실을 익히는 이런 한낮의 햇살을 특히 사랑하는 편이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노래라도 부르는 듯, 눈을 감고 가슴을 짚으며 팔을 들고 거창한 소리를 하는 그녀의 앞에서 크랭크가 투구를 끄덕인다.

그리고 입에 발린 소리를 좀 해드렸다.

“그것참 낭만적인 말씀이십니다.”

지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제복을 벗고 소박한 여름 원피스를 차려입은 공주는 사실 아리에테와 자매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소탈하게 변한다.

킥킥 웃은 공주가 손사래를 쳤다.

“사실은 철수 작업 중에 살짝 빠져나왔다. 내가 그동안 정오까지 늦잠을 부린 것은 이런 걸 위함이었지.”

“이제 와서 그런 말씀하셔도 아무도 안 믿을 거거든요?”

“클레어 백작 영애, 누가 뭐래도 그대만은 내 편을 들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공범이다.”

클레어가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손을 짚었다.

“아차, 그랬드랬죠. 하는 수 없군요.”

마치 나이 차이가 좀 나는 동네 언니와 옆집의 소녀가 놀러 나온 모습 같다.

앞서 말한 대로 왕녀는 그새 친해진 아르곤 영주의 둘째 영애와 함께 마을 쏘다니고 있었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그녀를 맞이한 크랭크가 투구를 긁적였다.

“호위는 어쩌시고, 의전 담당관이 허락하셨습니까?”

그녀의 이런 단독 행동을 리리안느가 허가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일반 시민 코스프레 중인 원피스 차림의 왕녀는 그저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한 번쯤 경의 거처를 방문하고 싶었다. 나의 이야기보따리 캐롯과 이 몸의 여기사 아리에테는 어디로 갔는가?”

거침없이 공방 안으로 들어와 잡동사니 가득한 내부를 구경하던 쥬세페 공주가 넉살 좋게 자리에 앉자, 그녀의 앞으로 얼음 커피를 갈아와서 내려놓은 메이드 차림의 오토마톤 샤를이 대답했다.

“근처 모험가 기숙사에 회의차 나가셨습니다.”

“오!”

말끔한 메이드 오토마톤을 쳐다보는 공주의 눈빛이 이채롭다.

곁에 앉은 영주의 영애 클레어가 크랭크를 쳐다보았다.

“크랭크, 저 옷 어디서 났어? 저택 사용인의 것 같은데.”

“저희 조수가 시장에서 샀다고 합니다만, 아마 낡아서 처분한 것이 어디서 흘러들어 온 것이겠지요. 가져와서 몇 군데 수선했습니다.”

찢어지고 닳은 곳을 수선하려고 건드린 것이 각색이 되어 기존 규격품과 디자인의 차별화를 선보였다. 더구나 그걸 보는 클레어도 백작 부인을 닮아서인지 이런 쪽으로는 꽤나 보는 눈이 있었다.

“의외로 좋아. 참신해. 이참에 사용인 유니폼을 좀 바꿔볼까?”

팔짱을 낀 쥬세페 공주가 빙그레 웃는다.

“그전에 집사장, 메이드장과 더불어 그걸 입는 사용인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 그저 네가 그러고 싶다고 억지를 부렸다간 언젠가 뒤통수를 맞는단다. 역대 폭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윽, 그건 싫은걸요.”

아르곤 데오 영주에겐 아들 하나와 딸이 셋 있다. 막내는 너무 어리고, 장남과 장녀는 공주를 어려워했지만, 유독 클레어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쳐서 제3 왕녀인 쥬세페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가끔 그녀의 폭정에 항의도 하면서.

“아악! 왜 자꾸 남의 케익의 딸기를 드시는 거예요! 공주님 것은요?!”

“맛있는 건 나중에 먹어야지 않겠느냐?”

“세상에!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에잇!”

차와 함께 급하게 딸기 케이크를 사다 대접했더니 둘이서 막 싸우기 시작한다.

무사히 케이크의 딸기를 사수한 공주가 포크를 입에 물고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린다.

“음, 맛있구나. 이것도 그 로엔그린 부인의 작품인가?

“아닙니다. 이것은 근처 빵집에서 사 왔습니다.”

케익 한 조각을 접시에 올린 샤를이 대답을 마치고 몸을 돌리더니 공방 저 안쪽의 누군가에게 가져갔다.

의자를 뒤로 기울인 공주가 메이드 오토마톤을 살피더니 말했다.

“안에 누가 또 있나?”

“조수가 있습니다. 낯을 가리는 친구라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크랭크의 부름에 딸기 케익 접시를 든 투나가 나타났다. 요 며칠 잠을 자지 못해서 퀭한 눈을 한 그녀의 등장에 두 사람의 코가 벌렁거린다.

굉장히 좋은 향기, 무슨 향수지?

“소, 손님이신가······.”

데면데면 인사를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간 투나는 결국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도로롱 코를 골기 시작한다.

보고 있던 샤를이 얇은 천을 가져다가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눈을 부릅뜬 쥬세페가 고개를 돌렸다.

“경은 식솔의 잠도 안 재우는 건가?”

크랭크가 손을 흔든다.

“저는 억울합니다. 저희 공방은 노동법을 준수합니다.”

“크랭크, 작업 끝났습니다. 철야를 했더니 피곤하군요.”

피곤에 찌든 엘프의 등장에 크랭크의 변명은 소용이 없어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거인의 뒤에서 나타난 트리스타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더니 샤를을 보았다.

“나도 그걸 좀 주겠어요? 배가 고픕니다.”

순간 크랭크를 보는 공주와 영애의 시선이 더욱 가늘어졌다.

“으응? 그대는 대체 엘프께 무슨 일을 시키고 있는 거지?”

“이쪽은 견습으로 와 있는 트리스타입니다. 저는 할당량을 제시했을 뿐, 휴식을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합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

냠냠 딸기 케익을 퍼먹는 트리스타의 뒤로 이제 드워프 쿠르프까지 나타났다. 그는 빈 맥주잔을 내밀었다.

“샤를, 얼음, 얼음 있으면 좀 나눠다오. 지금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절실하구나.”

정정한 드워프 늙은이였건만 지금 그의 얼굴도 철야로 잔뜩 부어 있었다.

결국 공주와 영애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안되겠군! 공방의 노동법이 준수되고 있는지 시찰이 필요하다!”

“맞아요! 이 수전노! 악덕 고용주!”

절망한 크랭크는 그녀들에게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잉? 뭐야? 뭔데 이렇게 복작복작거려?”

요즘 일이 없을 때는 전투복 대신 아동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캐롯이 등장했다.

공주와 클레어가 그걸 보고 반가워한다.

“음, 사복 차림도 괜찮구나.”

“어어? 공주님 휴가 끝나신 거 아니에요?”

“사람의 인생은 여름휴가와 같단다. 좀처럼 끝나길 바라지 않지. 아까 모험가 기숙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디지? 구경하고 싶구나.”

이상한 소리를 하는 공주에게 슬쩍 웃어준 캐롯이 크랭크에게도 손짓했다.

“크랭크도 잠깐 와줘, 아리에테가 불러.”

“왜?”

높으신 분들께 시달리느라 짧은 한숨을 쉬고 있던 크랭크가 투구를 돌리자 캐롯이 웃으며 대답했다.

“인간 불신에 빠진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서 말야.”

인간 불신, 다시 한 번 그를 보는 왕녀 쥬세페와 영애 클레어의 시선에 불순한 장난기가 가득하다.

“경은 오늘 어떻게 까도까도 악담뿐인가?”

“맞아요. 그리고 제가 새로운 위명을 선사하겠어요. 흑막의 철가면!”

이제 크랭크는 변명할 힘도 없어졌다.

대신 캐롯이 환호했다.

“오오! 흑막의 철가면! 음흉한 우리 주인님에게 딱 어울려!”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엘프와 드워프가 피식피식 웃어 버렸다.

요즘 모험가 기숙사의 운영에 신경 쓰느라 항상 건물에 상주하고 있던 제임스는 사복 차림의 공주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영주의 딸이자 백작 영애인 클레어는 익히 알고 있었다.

“어이쿠, 클레어 아가씨! 건물을 구경하고 싶으시다고요?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사람 좋은 털보 제임스가 두 사람을 데리고 사라지자 크랭크가 재빨리 말했다.

“경비대에 비상 연락, 공주 전하의 소재를 파악했다고 알려라. 긴급.”

대기 중이던 오토마톤 로테가 벌떡 일어나더니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캐롯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의 위명에 아르곤 최고의 고자질쟁이도 추가하자.”

“공주님의 기분을 이해는 하지만 나도 입장이라는 것이 있어. 그런데 무슨 일이지?”

홀 구석의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앉은 아리에테가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별것 아니다. 일단 앉아봐라.”

아리에테를 통해 사정을 전해 들은 크랭크가 투구를 끄덕였다.

얼마 전 파티에서 만난 에이브의 아버지 브람스가 제안한 이야기였다.

용사 수련장을 빙자한 말썽꾸러기 교정 훈련소였던가.

그리고 그가 불려온 것은 교정 훈련의 방향성을 결정하기에 앞서 참고를 위해 가장 어두운 경험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도 한번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아리에테가 먼저 말했다.

“솔직히 내가 봐도 에이브의 경우는 아주 특이한 것이다. 많은 것을 잃은 덕분에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자각한 것이지. 하지만 그 경우가 다른 녀석들에게도 먹힐지는 알 수 없어. 게다가 가성비 또한 최악이다.”

주변에 모여 앉아 있던 파티 멤버 중에 보리스가 턱을 받친 채 코를 후볐다.

“냅다 두들겨 패면 되지 않겠어요? 성격 나쁜 것들은 대체로 자기 아픈 건 못 참던데.”

“좋은 방법이지만 그래도 귀족인데 뒷감당 괜찮아?”

캐롯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가만히 듣고 있던 크랭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일의 특성상 그간 적지 않은 괴물과 악당을 보아왔다. 그러면서 느낀 점은 퍽 단순했다.

같은 고통을 겪어보지 않으면 사람은 무지의 포악을 일삼는다.

“그렇군, 패자 부활전인가.”

“응?”

모두가 그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갸웃한다.

캐롯만이 킥킥 웃어댄다.

캐롯의 사상은 대부분 마스터 크랭크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크랭크에게 있어서 인간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사람, 나머지는 그런 모양을 한 몬스터.

“나는 교화니 교정이니 그런 건 모르겠다. 애초에 사람이 바뀌는 걸 자주 보지 못했어.”

“그래도 보긴 봤잖아?”

캐롯이 옆에서 슬쩍 끼어들자 그의 투구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바뀌는 건 가능성을 가진 사람에 한해서다. 괴물은 사람이 될 수 없어. 이게 인간 불신이라면 나는 그래도 상관없다.

크랭크는 만약 내가 이 일을 맡는다면? 이라는 전제에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보리스의 의견에 동의한다. 지금까지 만나본 악당은 제 몸의 고통을 끔찍이 두려워하는 편이었다. 또한 허용 용량을 넘어서는 강력한 공포와 고통을 겪으면 사람도 그 사고 회로가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다만, 이 방법은 위험하니 주의가 필요해. 더불어 가족력도 인성에 많은 영향을 끼치니 뒷조사는 필수, 필터링으로 죽어도 상관없다는 동의서와 그만한 비용을 청구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비타가 크랭크의 말을 슥삭슥삭 받아 적었다.

크랭크는 지금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모처럼 길게 말을 했는데 그게 뭔가 감동적인 연설이긴커녕 그저 비참한 인간 교정 방법이라니, 입맛이 쓰다.

“우리는 항상 낭떠러지를 걷고 있다. 몇 걸음 길을 벗어나면 지옥이 펼쳐지지. 밖으로 떨어진 녀석을 끌어올리는 건 힘들지만 그 가장자리에 있는 녀석들을 중간으로 끌어당기는 건 다소 쉬울지도 모르겠군. 가능한 지원하겠다.”

“음! 큰 도움이 되었다. 맡겨둬라!”

고개를 든 아리에테가 엄지손가락을 세우자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크랭크도 엄지손가락을 들더니 그녀의 엄지에 마주 갖다 댔다.

기인 크랭크의 색다른 기행에 아리에테의 얼굴이 좀 달아올랐다.

캐롯이 하하 웃으며 물었다.

“그건 뭐 하는 거야?”

“미래를 걸으려는 아리에테의 악운을 내가 전부 빨아들였다. 앞으로는 좋은 일만 가득하도록.”

“응? 그럼 너는?”

자리에서 일어선 거인이 투구를 두드리며 말한다.

“독개구리는 스스로 독을 만들지 못하고 독이 있는 벌레를 먹어서 그걸 쌓는다고 하더군. 비슷하지 않겠냐. 네 악운은 내 저주의 연료로서 희생되는 거다. 나는 걸어 다니는 불행의 소각로지.”

“오-! 말 되네? 쁘하하!”

말을 마친 그는 다시 공방으로 몸을 돌렸다.

캐롯이 배웅하러 나간 사이 비타가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와, 로멘티스트. 진짜 낭만이 넘치는 말이었어요.”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안 부끄럽나?”

조용히 앉아서 후르릅 차를 마시던 리슐리에가 지나가듯이 중얼거렸다.

“아리에테 얼굴이 빨게요.”

“어! 음! 아니! 그냥! 좀 덥군!”

아리에테가 조금 호들갑을 떠는 와중에 캐롯이 돌아왔다.

“몬스터 조련 방법은 이 정도면 됐으니 다른 것도 생각해 두자. 후보자 선별이라든가 접수라든가. 그런 건 이참에 아리에테네 저택에 맡기는 편이 좋지 않겠어?”

“그럴 참이다. 편지를 써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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