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파티! 202 >
캐롯을 허리에 끼고 방으로 올라가는 공주에게 인사를 한 다음 경호 대장에게 내일 일정을 전해 듣던 아리에테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파티 말입니까?”
근엄한 얼굴의 경호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왕족의 여름휴가는 정말 휴가의 의미도 있지만 국왕의 영향력이 큰 수도에서는 함부로 모일 수 없는 자기 파벌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경호 대장은 그런 것까지 거론하진 않았다.
“마침 청동문이 있으니 그분의 측근들께서 인사차 방문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걸 희망하는 자들과 시기하는 자들도.
비타가 손을 들더니 두 팔을 살짝 벌렸다.
“우리도 거기 참가해요?”
“그렇습니다. 신관님.”
“에에?!”
귀족들의 파티에 참석한다는 말에 모두가 기겁했다.
아리에테도 찡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끔찍하군.”
뒷조사로 그녀가 명맥만 겨우 유지한 귀족의 영애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경호 대장은 꿋꿋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오셔야 합니다. 당신들은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투구 쓴 친구도 함께 부르면 좋겠군요.”
“크랭크를요?”
대답은 방에서 잠깐 내려온 보좌진 총책임자 리리안느가 했다.
“그가 도움이 될 일이 없길 바라지만요.”
그 저주가 정말로 이야기대로 발동한다면 훌륭한 전술적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닮아 생각하는 것이 군인에 가까운 아리에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캐롯에 대한 것은 왕족이라도 물러섬 없이 얼굴을 굳혔다.
“우리 꼬마는 데리고 돌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그게 없으면 잠을 못 자서.”
무슨 애착 베개쯤 되는 거야?
듣고 있던 사람들의 얼빠진 생각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공주의 허물을 책임지는 리리안느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친한 영애들께 들려주려고 그러시는 거니 식사 시간 전에는 돌려보내겠습니다. 그전에 신관 비타, 아까 그 마법 상점의 꽃잎 차를 수배해야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어, 예. 근데 물건 사지 않으면 그냥은 안 주시는데······.”
리리안느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고위력 스크롤이라고요. 그러면 사면 되지요. 송그, 아엔. 활동비를 지급할 테니 같이 가서 준비해 주세요.”
이후, 캐롯이 풀려난 것은 정말로 저녁 식사 시간 전이었다.
여름이라서 해는 아직 많이 남았다.
조금 선선해진 저녁 바람을 맞으며 모두와 함께 퇴근 길을 걷던 캐롯이 크랭크가 피곤하면 가끔 하는 짓을 따라 한다.
어깨가 뻐근하다는 듯이 휙휙 돌리던 캐롯이 중얼거린다.
“어휴! 혼났네. 내일 또 오래. 바쁜데 말야.”
“밤에는 허락할 수 없다.”
“그래, 우리 딸. 엄마 걱정해 주는 거야?”
그러다 파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캐롯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억?! 파티이? 나 드레스 없는데?”
“맞죠! 어떻게 해요! 리슈 언니!? 옷부터 사러 갈까요?”
내내 조용히 있어서 있는지도 몰랐던 파티의 마법사 리슐리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거야. 우리는 모험가로서 초대된 거지? 그러면 평소 복장으로 있으면 돼. 거기 주인공은 우리가 아냐. 공주님이지.”
아리에테도 거들었다.
“맞다. 파티 주인공은 공주님이지 우리가 아니다.”
그래서 이튿날은 마을 투어 없이 파티를 위해 먼 길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안내하는 임무를 받았다.
경비대에서도 인력이 차출되어 말끔한 정장을 입고 청동문을 통해 속속 도착하는 각지의 유력 인사들과 귀족들을 맞이했다.
문을 나선 여행복 차림의 귀족들은 얼빠진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놀랍군, 이것이 청동문 게이트인가?”
한가로운 이 세계의 들판을 지나 언덕 위의 문을 통과했을 뿐인데, 평소라면 수일이 소비되는 거리가 단 몇 분으로 단축되어 버린다.
“방주 도시 아르곤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첫 손님맞이는 캐롯이 맡았다.
두 팔을 들어 올린 활기찬 조그만 소녀를 보고 드센 귀족들이 시선을 내리고 깔보기도 했지만 몇몇은 그를 알아보고 몹시 기뻐했다.
“어머나! 그 이야기 속의 소녀 아닌가요? 캐롯이라고 전신 소프트 스킨의.”
대기 중인 마차에 오르던 딱딱한 표정의 중년 귀족이 부인의 말에 다시 내리더니 청동문 앞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보거라, 네가 그 오토마톤 캐롯이냐?”
“예!”
지팡이를 든 중년 귀족은 곧 근엄한 표정으로 옷깃을 치켜세웠는데, 심상찮은 별 모양 배지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든 캐롯 역시 씩 웃더니 항상 전투복에 매달고 다니는 클럽 배지를 선보였다.
“음.”
“흠!”
외관만큼은 손녀뻘인 소녀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흠흠거리고 돌아온 그를 보고 귀부인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음으로는 쥬세페 공주의 지인과 영애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은 신기한 청동문 게이트 앞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꼬마 소녀를 보고 단번에 누구인지 알아맞혔다.
“어서 오오-!?”
인사도 마저 끝내지 못했는데 사방에서 꺅꺅거린다.
“꺄악! 캐롯이야! 귀여워! 그림하고 똑같아!”
“여러분! 반겨주셔서 감사하지만, 오늘은 제 팬 미팅이 아니거든요?”
뻔뻔한 캐롯의 입담에 뒤따라 청동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이 하하호호 웃음 지었다.
한참 손님들을 맞이하고 이제 거의 해가 떨어질 때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이 있었으니 르클레르와 보이드 자작이었다.
그는 손자 올코트도 함께 데려왔다.
“우와! 회장님! 어서 오세요! 올코트도! 에, 그리고 르클레르도.”
“으응? 이 꼬마 녀석이 어째 나만 좀 견제하는데?”
장신의 르클레르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캐롯을 내려다본다.
올코트를 뒤로 숨긴 캐롯이 다급하게 말했다.
“앗! 조심해, 올코트! 뽀뽀 귀신이야. 막 혀를 휘젓는다?”
“응? 혀를 어떻게 한다고?”
정체가 탄로 난 르클레르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혀를 쭉 내미는데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더 긴 것 같다.
“힉!”
징그러움을 느낀 꼬마들이 호다닥 물러서자, 그녀는 이제 커다란 손아귀까지 펼치고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후후흐흐히히-! 자, 이리 오렴, 이 기회에 도장을 찍어 놓아야겠구나. 낼름낼름!”
“보시오. 망나니 영애, 손자에게 손을 대면 가만 있지 않겠소.”
“그러지 마시고 이 기회에 정략결혼을 추진하시죠. 제가 잘 키워서 남편으로 삼겠습니다.”
“뭐요?”
칭-!
공작 영애의 입에서 나오는 헛소리에 보이드 자작의 붉은 선글라스가 한층 짙은 섬뜩함과 기괴함을 선보였다.
찔끔한 르클레르는 장난을 그만두고 서둘러 올코트의 손을 잡고 마차로 향했다.
“자, 자자! 어서 갑시다. 늦겠군요.”
“예! 다들 와 계세요. 여러분이 마지막!”
그때 마부석의 사내가 다가왔다.
“파티가 시작됩니다. 오토마톤 캐롯도 회장으로 이동하라는 지시입니다.”
“나도요?”
“잘됐군, 같이 가자꾸나.”
함께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이동하면서 캐롯은 그간의 일을 떠들어 댔다.
올코트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캐롯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요즘 어떠세요? 고민이 있으면 말해보세요. 들어는 드릴게요.”
지팡이에 손을 올리고 창밖의 마을 경치를 구경하던 보이드 자작이 피식 웃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느긋하게 장기나 둬야 할 나이인데, 주변에 놀기 좋아하는 분들 덕분에 아직 현역이구나. 요즘 나라 밖도 소란스럽고. 신경 쓸 곳이 꽤 많아.”
그러다 고개를 돌린 보이드 자작이 씩 웃으며 캐롯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엔 금발이냐? 잘 어울리는군.”
손가락을 양 볼에 댄 캐롯이 참 귀엽게 웃는다.
“에헤헤, 주인님은 너무 인형 같다고 싫어하지만요.”
“그 친구는 잘 있나?”
이제 캐롯은 윙크를 찡긋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그럼요! 무사태평!”
같은 시간, 크랭크는 맞춤 정장을 차려입고 술잔을 가득 올린 소반을 한 손에 든 채 회장에 서 있었다.
주변 귀족들이 막 수군거린다.
“어머나! 저 사람은 몸이 대단히 크네요. 그런데 왜 투구를 썼죠?”
“저주에 걸린 모험가, 크랭크라는군요. 공주님이 섭외하셨대요.”
“오오! 그 동화의!”
뭔가 파티 웨이터 같은데.
좀 한심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고액의 수당을 선불로 받았기 때문에 크랭크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해지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서 투구를 벗으면 대참사가 일어나니 주의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크랭크는 저쪽에서 손짓하는 사람들에게 잔을 들고 다가갔다.
우아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저택의 파티 홀에서는 화려한 차림새를 갖춘 많은 사람이 잔을 들고 서성이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소개하는 등의 사교의 장을 벌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단연 파티의 중심은 쥬세페 제3왕녀였다.
아쉽게도 드레스가 아니라 바지에 화려한 코트를 입고 있었으나 그 미모에는 전혀 손색이 없었다.
오히려 당당한 지배자의 풍모가 엿보일 지경이었다.
더불어 영주의 가족들도 한껏 차려입고 공주를 따라다니며 이참에 얼굴을 알리고 있다.
영주가 그녀의 여름휴가를 선선히 받아들인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또한 파티 회장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의 사람들도 배치되어 있었는데,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귀족들에게 야생의 현역 모험가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불러들인 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동화책으로 출판된 모험담 덕분에 이름이 조금 알려진 모험가들이라서 상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언젠가 캐롯을 직접 만난 사람들의 말처럼,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이 지금 바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은 정말 신비롭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리슐리에 말이 맞았어. 요컨대 우리는 장식이지.”
“음, 그래도 임무에 집중하자. 이것도 일이니까.”
스쳐 지나가는 보리스의 중얼거림에 지오가 대답했다. 파티의 취지가 흐려질 것을 의식해서 귀족과 모험가의 사적인 대화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향한 눈빛만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다 어떤 뜨거운 시선을 느낀 보리스가 잠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복작복작한 파티 홀, 평민 모험가와 어떤 귀족이 서로를 바라본다.
멋진 연미복의 귀족 청년은 조금은 부럽고, 약간은 시샘이 담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도 당신처럼 산과 들판을 뛰어다니며 모험을 하고 싶어! 나도 할 수 있어!
얼떨결에 부러움의 대상이 된 삐뚤어진 청년 모험가는 그저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놀고 있네, 현실은 항상 시궁창이라고!
기분이 상한 듯, 세차게 고개를 돌리자 올려 묶은 그의 포니테일이 차랑거린다.
그 모습에 되레 주변 귀족 아가씨들이 흥분해 버렸다.
이제 보리스의 시선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인사를 주고받는 공주와 그 곁을 지키고 선 여기사에게로 향했다.
보통 무표정하고 어쩌다 웃곤 하는 아리에테는, 오늘 오랜만에 억지로 웃고 있었다.
갑갑함이 싫어서 뛰쳐나왔다고 했었다. 팔다리의 갑옷처럼 보이는 전신 의족이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조명에 유난히도 빛난다.
“아무렴, 저런 게 진짜지.”
“네?”
근처에 서 있던 귀족 영애가 보리스의 혼잣말을 듣고 당황했다.
귀족들과의 사담은 금지,
오늘의 주인공은 당신이 아니다.
경호 대장의 말을 떠올린 보리스는 대답 대신 슬쩍 웃어주고는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워낙 선이 고운 미남인지라 영애의 얼굴이 달아오른 것은 애써서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