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옛날에는! 196 >
해님을 볼 수 없어서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는 시간,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두 사람을 위해 캐롯은 정원의 과실수를 살피고 로비에 잔뜩 쌓여있는 모험가들의 짐을 뒤져 쓸 만한 물건을 수거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철야 중인 사람들의 앞에 내밀어졌다.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머그컵을 보고 고르곤이 비명을 질렀다.
“엄머머! 커피! 이거 커피니?”
“딱히 널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지만 마셔둬라. 독은 타지 않았다.”
타박타박 걸어간 캐롯은 크랭크에게도 컵을 내밀었다. 포션 덕분에 팔팔한 지경이지만 피로감이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눈이 충혈된 크랭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받아마셨다.
잔은 들 고르곤이 몹시 기뻐했다.
“음~! 좋네! 이게 얼마 만이니. 향도 좋아, 커피는 어디서 났어?”
캐롯이 기가 찬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정원에 커피콩 나무가 있기에 따서 볶아보았다.”
이야기를 들은 고르곤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짚으며 골똘히 생각이 빠진 얼굴을 했다.
“커피나무? 그런 게 있었어? 내 정원에?”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리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학교 선생님이 그랬다. 네 스톡에 뭐가 있는지는 잘 기억해둬라.”
오토마톤의 충고에 아하하 웃던 고르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는 소릴 하는 사람이 많구나. 갑자기 너희 도시에 한번 가보고 싶어졌어.”
크랭크가 손에 쥔 양철 머그컵을 슬쩍 들어 올리며 말한다.
“붙잡혀서 십자가에 매달려도 좋으시다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에~! 그건 싫은걸, 너희들이 먼저 건들지만 않으면 우린 항상 친절한 불사자로 남고 싶다고.”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친절한 불사자. 불사자?
“그보다 이거 정말 할 줄 아는 게 많은 녀석이구나. 언니가 칭찬해줄게.”
“허락 없이 만지지 마라. 이 마녀야.”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고르곤과 그것을 귀찮아하는 캐롯의 장난질을 구경하던 크랭크는 이내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며 커피를 전부 비워버렸다.
그리고 컵 바닥을 확인했다.
안에는 날카로운 물건으로 긁은 낙서가 있었다.
숫자 5, 달리는 사람, Z 모양의 화살표와 물음표 하나.
인질은 5명, 탈출 경로는 확인 중, 지시한 대로의 보고였다. 그는 이제 캐롯과 악담을 주고받는 고르곤을 쳐다보았다.
과연 마녀는 약속을 지킬 것인가?
그로부터 다시 수 시간 후, 마침내 다시 깨어난 지스터는 두툼한 목걸이를 차고 작업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말이 목걸이지 사나운 짐승의 목에 채우는 금속 구속구 같은 모양이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아는 사람의 연구실이야. 팔다리는 어때? 한번 움직여 보렴?”
고개를 돌린 지스터가 고르곤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마스터 헤리슨, 여기 계셨군요.”
지스터의 발언에 고르곤의 입이 히죽 찢어졌고, 크랭크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되었다.
고르곤이 엄지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크랭크를 보았다.
“지금 애한테 나는 자기 마스터로 보이고 있지.”
“놀랍군요.”
“그렇지? 음후후~!”
고르곤의 음흉한 미소는 멈추지 않았다.
작업대에서 내려서는 지스터에게 캐롯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머리에 쓰고 있던 것을 벗어서 내밀었다.
“이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잘 사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것을 잡지 못해 유감이군요. 그것···? 우리는 무엇을 잡으러 나왔습니까? 기억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함께 온 사람도 있지 않았습니까?”
목에 매달린 묵직한 구속구는 지스터의 연산과 기억 영역에 간섭하여 지속적인 왜곡을 일으켰다.
바로 그 제작자가 실실 웃으면서 나섰다.
“아, 그건 마스터인 내가 설명해야겠네.”
캐롯과 크랭크의 불신이 잔뜩 담긴 시선을 등에 업은 고르곤이 아하하 웃으며 거짓말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여기는 아는 사람의 거처야. 다른 사람들은 지원을 부르러 갔어. 우린 당분간 여기서 그들을 기다려야 해.”
알 수 없는 방해로 기억에 혼란이 생긴 지스터에게 있어서 마스터의 말은 믿음직한 이정표로 작용했다.
단숨에 수긍한 지스터가 방열 가발을 머리에 쓰더니 초록빛 눈매를 드러냈다.
“알겠습니다. 이제 무엇을 할까요?”
고르곤이 아하하 웃으며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렸다.
“대청소!”
손이 하나 늘자 청소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오랜만에 사람을 봐서 즐거운 것인지 마녀는 여전히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그들의 작업을 구경하며 수다를 떨어댔다.
그녀는 근처에서 경계 중인 커다란 인형 기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애들도 일은 잘하지만 말이야. 너무 커다래서 이런 섬세한 작업까지는 무리거든?”
푹 자고 일어나 다시 청소 일을 돕던 크랭크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당신은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군요. 메이드라도 고용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런 적도 없었던 건 아닌데, 몇 번 배신당하니까 꺼려지더라.”
크랭크가 허리를 폈다.
“오토마톤 메이드는?”
갑자기 그윽한 얼굴이 된 고르곤이 잡동사니를 정리하고 있는 캐롯과 지스터를 바라보았다.
“음, 뭐랄까. 예전 아이랑 꽤 잘 지내는 바람에 한동안 보기 싫어졌달까? 그 왜, 집에 개나 고양이 오래 키운 사람들은 그 애들이 죽고 나면 한동안 다른 애들 못 키우잖아? 그런 거지.”
캐롯에게 부품을 제공한 4층 연구실의 구형 오토마톤을 떠올린 크랭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고르곤이 두 팔을 펼치면서 말했다.
“여기만 하면 끝이네? 다 끝나면 파티하자! 파티!”
“1층 로비도 남았습니다. 그리고 지하도.”
“아, 지하는 그냥 둬. 내려가면 네 기분이 안 좋아질 거야.”
크랭크의 얼굴이 굳어진다. 하지만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좀 킥킥거린 고르곤은 총총 캐롯에게 다가가 물었다.
“캐롯 엄마! 오늘 점심은 뭐야?”
“이 마녀야. 나는 네 엄마가 아니다. 그리고 오늘 점심은 버터 감자에 건육을 우려낸 고기 스프다.”
실험 기구를 닦고 정리하던 지스터가 고개를 들고 캐롯의 언사를 지적했다.
“캐롯, 마스터 헤리슨은 그것이 아닙니다.”
억울하다는 시선(?)으로 돌아보는 캐롯과 있지도 않은 마스터를 감싸는 지스터를 앞에 두고 고르곤이 배를 잡고 대폭소를 터트렸다.
“으하하! 아하하!”
울컥한 캐롯이 작은 손가락으로 고르곤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스터, 당신의 마스터를 한 대 치고 싶습니다.”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 전에 우리는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농담입니다.”
나름 고성능이지만 병기로서의 활용성 때문에 의도적으로 사고능력을 딱딱하게 설정한 지스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게 있어서 눈앞의 이 작은 인형은 얼마 전까지 보았던 그 햄스터 캐롯 같지 않았다.
“캐롯, 당신은 지금 마치 인간처럼 말했습니다.”
돌려받은 빵모자를 쓰고 있던 캐롯이 지스터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 붉은 유리 눈동자가 닿는 곳에 둘의 만담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크랭크와 고르곤이 있었다.
엄청난 사고 영역의 확장은 이해의 폭도 넓혀버렸다.
이 상황을 이해시키기엔 제약이 너무 많다.
캐롯은 결국 둘러대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그저 함께하는 동료 모험가들의 말을 따라 해보았을 뿐입니다.”
히히 웃음 지은 고르곤이 크랭크에게 손짓하자 그가 허리를 숙인다.
고르곤이 크랭크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네 인형은 지금 거짓말을 했어.”
“···당신은 캐롯에게 뭘 한 겁니까?”
혀를 빼문 고르곤이 요염하게 엉덩이를 뒤로 쭉 빼면서 주먹으로 머리에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한다.
“영혼을 불어넣어 봤지.”
종잡을 수 없는 마녀의 발언을 그저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하면서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애초에 캐롯을 고쳐서 살려낸 것도 그녀이고, 들어간 부품의 출처도 명확하지 않으니까.
물론 결과만 놓고 보면 잘 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이 당시의 크랭크는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짧은 한숨과 빗자루질 뿐이라는 것을 조금 한심하게 여겼다.
마녀의 지하 정원은 내내 환해서 낮과 밤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12시간 작업 후에는 8시간 정도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것도 크랭크 한정으로,
이상하게 고르곤은 내내 떠들어 댈 뿐 자지 않았다.
“나는 당신과 달라서 쉬어야 합니다. 캐롯, 나를 지켜라. 설사 지스터가 공격하더라도 막아내라.”
“알겠습니다.”
양손에 도끼와 망치를 든 캐롯이 크랭크가 들어간 방문 앞을 지키고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앞에 두고 손가락을 물고 있던 고르곤은 의외로 손쉽게 물러섰다.
“재미있겠지만 그런 장난은 다음에 할게, 잠깐 쉬자. 지스터도 여기에 있어.”
“알겠습니다.”
고르곤이 어딘가로 사라지고 한참 후,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던 중에 캐롯이 대뜸 지스터에게 말했다.
“할 일이 없다면 정원의 유실수에서 과일을 따다 주지 않겠습니까? 식사 때 내놓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인간들은 항상 뭔가를 먹고 싼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던 지스터는 캐롯의 의견을 받아들여 말끔하게 정리가 끝난 물건 중에서 바구니를 꺼내더니 지하 정원으로 나갔다.
창문에 턱을 올리고 그의 뒷모습을 살피던 캐롯이 서둘러 몸을 돌리더니 와다다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왔을 때는 크랭크와 함께였다.
“이쪽입니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서 석상처럼 서 있는 인형 기사들을 여럿 지나쳤으나 그들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동안 일부러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았지만 아무런 제지도, 제약도 없었다. 그래서 아예 강행 돌파를 시도해 본 것이다.
저들의 눈으로 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상관없다. 잡히면 동료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었다고 둘러대면 되고, 가능하다면 이 기세로 탈출까지 시도해보자.
크랭크는 앞서 잠입하여 생존자를 확인한 캐롯을 따라 서둘러 지하로 향했다.
그곳은 몬스터를 가두기 위한 쇠창살 우리가 많은 곳으로, 다른 층과는 다르게 이곳만은 자주 사용하는 중인지 시설들의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더구나 이미 그곳을 사용 중인 이용객들도 있었다.
“캬오오오!”
커다란 이빨을 드러낸 샤벨 타이거 같은 맹수가 고개를 쳐들고 위협하는 곳의 주변으로 인간 모험가들이 갇혀 있다가 고개를 든다.
그들은 짜증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왜 이래! 오늘 할당량 다 채웠는데! 올 때 한 번에 오라고!”
“또냐? 또야! 이 빌어먹을 잡것들아!”
“제길! 그만 좀 재워줘!”
“약속이 틀리잖아! 하루에 10번 이상은 안 짠다며!”
하지만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들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바닥에 주저앉거나 반대로 창살에 바싹 달라붙었다.
“캐롯?”
“꼬마!”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찌 된 것인지 다들 알몸이다.
캐롯이 낯이 익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동료들의 아침잠을 깨우기 위해 커피콩을 제공한 젊은 모험가 프린트였다.
그는 캐롯이 며칠 전 이곳에 처음 찾아왔을 때보다 상태가 더 나빠졌다. 눈 밑에는 그림자가 잔뜩 끼었고, 잘생긴 얼굴은 야위어 엉망이었다.
“다시 왔습니다.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십니까?”
프린트가 짜증스럽게 웃는다.
“살면서 이렇게 잘나게 낳아주신 부모님을 욕한 적은 처음이다. 그보다! 어떻게 됐냐? 네 주인은?”
“엇! 크랭크?”
어둠 속의 희미한 조명 사이로 커다란 인간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가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울먹이기 시작한다.
고요한 지하 감옥으로 난데없는 남자들의 대성통곡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