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옛날에는! 189 >
문제 되는 관절도 갈아 끼우고, 장갑판을 모두 조립하는 데까지 성공한 크랭크는 알 수 없는 성취감을 느끼며 캐롯을 기동시켰다.
“일어나, 캐롯.”
칭-!
눈을 뜨고 발딱 상체를 일으킨 캐롯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생각 외로 쉬운데?
“주인님.”
“왼팔은 어때? 움직여 봐라.”
뚜둑! 팔을 위로 번쩍 올리는데 그 속도가 마력석 교환 전의 2배였다. 그리고 이상한 소리와 함께 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어?”
덜덜 떨리는 팔을 쳐다보던 캐롯이 고개를 들었다.
“관절 이상 발생, 작동 불가.”
“응?”
다시 팔을 뜯어본 크랭크는 망가진 관절을 보고 설명서와 대조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게 설치 방향이 있었구나.”
한순간의 실수로 30만 리즈짜리 부품을 날려 먹었다. 씁쓸함에 머리를 좀 긁적이던 크랭크는 침대 아래 마룻바닥의 비밀 공간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세면서 중얼거렸다.
“이건 이번 달 집세, 이건 식비···.”
아무리 계산해도 부품을 살 여윳돈이 부족하다.
모험은 한 번에 큰돈이 되지만 목숨을 거는 일이 다반사기 때문에 되도록 준비가 완벽해야 한다. 그런 일에 한쪽 팔을 못 쓰는 오토마톤을 데리고 나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캐롯은 조그만 소녀형이라서 아무리 좋게 봐줘도 본체 스펙이 전투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지금이야 어찌어찌 해나가고 있지만 무리할수록 내부가 빨리 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크랭크가 곧 조립을 시작했다.
깨어난 캐롯은 왼팔이 수건에 쌓여 목에 매달린 채였다.
“미안하다. 관절을 망가뜨렸어. 나는 내일부터 농장에 나가서 네 부품비를 벌어오마, 넌 당분간 여관에서 심부름을 해라.”
“알겠습니다.”
이튿날 새벽, 크랭크는 여관을 나서서 목장에 일하러 가버렸다. 미리 마리아에게 이야기를 해뒀기 때문에 캐롯은 남은 한쪽 팔로 여관의 잔심부름을 하면서 그를 기다렸다.
“캐롯! 감자!”
“예, 여기 있습니다.”
“캐롯! 설거지를 해줘!”
“알겠습니다.”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오고 설거지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등의 일을 하나 남은 팔로 척척 해내는 것을 보고 마리아와 여관 종업원들이 좋아했다.
“와, 이 꼬마 인형 일 되게 잘하네요?”
“또 뭘 할 수 있어?”
주방에 모여 앉아 감자를 깎던 사람들이 양동이를 옮기고 있는 캐롯에게 물었다.
꼬마 인형은 주방의 냄비와 접시를 슬쩍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간단한 요리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팔이 하나뿐이라 지금은 못 합니다.”
“와아! 대단해.”
감이 좋은 주방 처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살짝 말을 좀 길게 하네요? 얼마 전에 바쁠 때 거들어 줬을 때는 짧게 말했는데.”
“그랬나?”
“응, 분명히 그랬어. 네, 아니요. 알겠습니다. 이렇게 단답형으로 말했다고.”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는 처녀들을 향해 가만히 서 있던 캐롯이 마주 고개를 갸웃해주었다.
그러자 처녀들은 그게 귀엽다고 난리를 피웠다. 덕분에 마리아에게 한 소리를 듣긴 했지만,
“에구! 놀지 말고 어서 감자나 깎아!”
“네~!”
해가 저물어가며 저녁이 찾아왔다. 바쁘게 일하며 지친 사람들도 이 시간만큼은 즐거웠다.
“퇴근이다! 칼퇴근!”
“수고들 했어!”
“일당 나눠 줄 테니 모여!”
우유와 퇴비를 얻기 위해 젖소를 사육하는 목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일당을 받는다.
“여! 인간 기중기 크랭크!”
“하하하! 요즘 자네 덕을 좀 보고 있다고!”
“고생이야 다 같이 하는 것 아닙니까.”
“같이 한잔하러 가지 않겠어? 소젖 짜는 여자애들 불러놓았는데.”
“아뇨, 바쁩니다. 가서 할 일이 있습니다.”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술자리 초대를 거절한 크랭크는 짤랑거리는 동전을 손에 쥐고 몸을 돌렸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복잡한 계산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틈에 여자들과 술자리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삶의 우선순위가 뒤틀려버린 청년이 잔뜩 굳은 얼굴로 빠르게 중얼거린다.
“식대까지 생각하면 최소 열흘은 더 해야 할 것 같아. 아니면 좀 줄일까? 하지만 제대로 먹지 않으면 힘을 쓸 수 없는데 곤란하군.”
몸이 크다 보니 먹는 양도 만만치 않았다. 밖이라면 뭐든 잡아서 구워 먹을 텐데 도시 내에서는 그게 힘들다. 아쉬운 대로 사냥이라도 잠깐 나갔다 올까 생각하고 있는데 길가를 걷던 그의 눈에 한 소녀가 들어왔다.
캐롯 정도의 크기의 조그만 아이였다.
“빠, 빵 사세요.”
커다란 바구니를 든 예닐곱 살 정도의 작은 소녀가 애처롭게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빵을 팔고 있었다.
그걸 가엽게 여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곰팡이가 핀 빵을 살 사람은 없었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꼬마의 앞으로 커다란 거인이 나타났다. 본능적으로 질겁한 소녀가 몸을 웅크리자 크랭크가 손가락을 들었다.
“얼마지?”
“하, 한 개 오백 리즈인데요.”
빵 바구니를 뒤적여보던 크랭크가 낮게 말했다.
“썩은 빵을 그 가격에는 못산다. 하지만 전부 1만 리즈에 내가 다 사지. 어떠냐?”
크랭크가 은화를 내밀면서 말하자 소녀는 환하게 웃더니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곰팡이 빵을 모두 팔아버린 소녀 에밀리아는 서둘러 근처 집으로 뛰어들었다.
“아빠! 빵 다 팔았었어요!”
얼마 전 아내를 잃는 바람에 실의에 빠져 있던 롤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든다. 부스스 일어난 그는 딸아이가 내미는 동전을 손에 쥐고 밖으로 나가더니 곧 술병으로 바꿔왔다.
“아빠-! 술 그만 마셔요!”
어린 딸 에밀리아가 소리를 빽 지르며 등을 때렸지만 롤은 듣는 둥 마는 둥 술만 마셔댔다.
하지만 이튿날, 그다음 날, 그리고 사흘째가 돼도 빵이 팔려나갔다.
마침내 가게의 남은 빵을 전부 팔아버린 에밀리아는 이제 직접 밀가루를 반죽해서 빵을 만들기 위해 낑낑대기 시작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멍청하게 자리에 앉아서 퀭한 눈으로 쳐다보던 롤이 갑자기 그 몸을 일으켰다.
“···반죽이 너무 묽잖냐. 비켜봐라.”
“아빠?”
두 팔을 걷어붙인 롤이 얼마 남지 않은 밀가루를 전부 가져다 반죽을 만들고 힘껏 쳐대기 시작했다.
울컥한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딸애는 살려고 하는데 나는 죽으려고 했구나. 부끄럽구나!
“으흐흑···!”
빵에 따로 소금 간은 필요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줄줄 흐르는 눈물이 그것을 대신했다.
땔감이 없어서 의자와 식탁을 때려 부숴서 오븐에 불을 일깨운 롤이 빵을 굽기 시작한다.
빵이 익는 동안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듣지 못했던 아빠의 목소리에 에밀리아가 기뻐했다.
“곰팡이가 피었던 걸 누가 사주더냐?”
“어어엄청 큰! 키다리 아저씨가요.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지나가요. 아저씨는 몸이 커서 많이 먹어야 한대요.”
재잘거리는 에밀리아의 웃음을 보면서 롤은 다시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거, 참 고마운 사람이구나.”
이튿날, 연 일주일간 농장에서 일한 크랭크는 꽤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게다가 운이 좋은 건지 곰팡이 핀 빵을 싼값에 파는 소녀가 있어서 그걸 가져다 손질해서 저녁을 때운 덕분에 식대도 굳혔다.
“소금 간을 하고 적당히 끓이면 어떻게든 먹을 수는 있다.”
오늘도 퇴근길을 걷고 있는데 항상 만나던 소녀가 보인다.
“에밀리아.”
“크랭크 아저씨!”
둘은 이제 서로의 이름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에밀리아는 울상이었다.
“아저씨 주려고 빵을 새로 구웠는데 다 팔렸어요. 저기 우리 집인데 잠깐 기다려 주세요!”
도도도 달려간 에밀리아는 남은 빵을 다 가져왔다. 새로 구운 따끈따끈한 빵이었다.
곰팡이 빵이라서 1만 리즈에 후려치던 것인데 새 빵이 나오자 크랭크는 좀 머뭇댔다.
“얼마지?”
“아저씨한테는 이거 전부 1만 리즈요!”
크랭크가 슬쩍 웃는다.
에밀리아는 그가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새 빵을 가지고 돌아가는 그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에밀리아의 곁으로 숨어서 보고 있던 롤이 나타났다.
“저 친구냐?”
“예. 저거 다 먹는데요.”
“먹성이 좋은 손님이구나. 꼭 우리 가게 단골로 만들어야겠다!”
롤의 기운찬 말에 에밀리아가 밝은 얼굴을 돌렸다.
“응! 아빠!”
다시 정신을 차린 롤은 집안에 값나가는 물건을 팔아서 재료를 구하고 다시 빵집을 열었다.
그렇게 8번가의 롤 아저씨네 빵집이 부활했다.
숙소로 돌아온 크랭크를 보고 서빙 하던 여점원이 총총 다가왔다.
“크랭크! 오늘 저녁은?”
“아는 사람에게 빵을 좀 얻어와서요.”
“에? 맨날 혼자서 먹으면 맛있니?”
크랭크는 대답 대신 캐롯의 행방을 물었다.
“아, 캐롯은 세라가 학교에 데려갔어.”
“학교요?”
“응, 밤길 무섭다고 호위 대신 데려갔어.”
그때 부엌에서 마리아가 고개를 내민다.
“크랭크! 잘 됐구나. 좀 거들어 주지 않겠니? 화로가 무너져서 냄비를 걸지 못하겠어.”
허리를 숙여 부엌으로 들어간 크랭크는 작업 중인 주인장을 도와 부서진 화로를 시멘트 모르타르로 다시 성형했다.
답례로 식사를 대접받아 먹고 있는데 여전히 한쪽 팔을 목에 건 캐롯이 돌아왔다.
“주인님!”
“이제 오냐.”
뒤따라 들어온 여관 주인의 막내딸 세라가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와, 고마워. 얘 덕분에 요즘 집에 오기 편해.”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스튜를 더 가져온 마리아가 물었다.
“그런데 이 애 팔은 계속 이대로 두는 거야?”
“아뇨. 수리할 겁니다. 요즘 수리비를 벌고 있었습니다.”
“와아! 정말? 캐롯 잘됐네!”
“그렇습니다. 양팔이 있으면 제 요리 솜씨를 선보여 드릴 수 있겠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말을 길게 하는 캐롯을 크랭크가 신기한 듯이 바라본다.
식사를 마친 크랭크는 마리아와 다른 점원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방으로 올라갔다.
“내일도 출근입니다.”
“여러분 안녕히 주무십시오.”
캐롯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다음 도도도 계단을 올라갔다.
입을 헤 벌리고 있던 처녀들이 외쳤다.
“와! 귀엽다! 하나 갖고 싶어요!”
“엄청 비싸다고 하던데? 맞다! 헤리슨! 헤리슨의 오토마톤은 얼마예요?”
좀 떨어진 곳에서 식사 중이던 모험가 파티에서 한 여자가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곁에는 모든 장비를 차려입은 화려한 오토마톤이 금색 방열 가발을 늘어뜨린 채 앉아있었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헤리슨이 옆에 앉은 오토마톤의 어깨를 짚었다.
“전투용으로 개조했기 때문에 4천만 리즈 초반, 아까 그 커다란 사람의 작은 오토마톤은 신품 1500만 언저리쯤에 파는 걸 봤어. 설마 그걸 가지고 일하러 다니는 거야? 짐꾼으로도 못 써먹을 텐데.”
모두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처처처천 오백만! 저 작은 게요?!”
여종업원의 반응에 동석한 파티 모험가들이 하하 웃는다.
“좋은 장비는 비싼 편이야. 내 마법 장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순진한 점원들을 상대로 모험가들의 장비 자랑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