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이웃! 183 >
망연자실한 얼굴의 에이브가 마틸다를 와락 껴안았다. 고개를 기울인 마틸다는 그저 손을 들어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나이를 먹어도 당신은 어릴 때와 같군요.”
“나, 나를 기억하는 거야? 너 기억을 지운다고 했는데.”
크랭크가 끼어들었다. 그는 트리스타가 들으라고 말했다.
“구조상 기억이 저장되는 구역이 정해져 있습니다. 마틸다의 경우엔 오류가 생긴 직후에 엔진을 파괴해서 비상 정지를 시도했기 때문에 3일 치 정도의 기억만 없어졌을 겁니다.”
숨을 조금 돌린 크랭크가 마저 이야기를 마쳤다.
“그 3일의 기억을 이제 당신이 되돌려 주면 됩니다.”
망나니 에이브는 결국 울먹이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온 마틸다가 고개를 숙였다.
“왜 울고 있습니까?”
“아니, 그냥. 네가 돌아온 게 기뻐서.”
“마틸다!”
뒤늦게 신관 릴리도 도착했다.
“반갑습니다. 신관 릴리. 그런데 여기는 어디입니까? 다음 일정에 차질이 발생합니다.”
자신을 기억하는 모습에 릴리는 몹시 기뻐했다.
눈치 없는 크랭크가 영수증을 내밀었다.
“수리는 완료되었습니다. 이것 수리비, 공임을 받으면 영업이 되지만 부품비용은 상관없습니다.”
내용을 확인한 에이브는 안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냈다.
“다시 살려줘서 고마워요. 도와주신 것도.”
돈주머니를 받아든 크랭크는 그것을 테이블에 올린 다음 수건을 가져다 그에게 내밀었다.
“지금 당신의 얼굴에서 비가 오는군요.”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에이브는 이제 웃기 시작했다. 마틸다가 그를 눈여겨보다가 손가락을 들었다.
“평소와 상반되는 반응입니다. 의사에게 보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와와, 괜찮아. 기, 기뻐서 그러는 거니까.”
할 일을 마친 크랭크는 공방의 자기 침대에 쓰러져 기절했고, 트리스타는 가까운 제임스의 모험가 기숙사에 방을 빌려 쓰러졌다.
아리에테가 다가와 팔짱을 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목에 수건을 걸고 있던 에이브가 말했다.
“집에 돌아가려고요. 잠깐이었지만 돌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어쩐지 조금 어른스러워진 그의 행동에 아리에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브는 수리를 마친 마틸다와 릴리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갔다.
우산 하나에 의지해 걸어가는 세 사람을 바라보던 아리에테는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잘됐구나.”
* * *
이튿날에도 비가 내렸다.
빗속에서 우산을 쓴 겨울 기사단 파티 멤버들이 에이브의 배웅을 나왔다. 청동문 앞에 모인 그들은 짧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캐롯은요?”
“지금 충전 중입니다. 당신이 돌아갔다는 걸 알면 가슴 아파하겠지요.”
크랭크의 말에 에이브가 씩 웃는다.
“그럼 가볼게요.”
“어, 그래. 잘 가고.”
“릴리 신관님, 아르곤에 오면 연락주세요.”
“예. 비타 신관님, 건강하세요.”
경비병들이 통행이 없을 때는 닫아두는 청동문을 열었다. 회색빛으로 물든 도시에 직사각형의 하늘과 초원의 조각이 나타났다.
모두가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의 문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네. 저 안에는 비가 안 와?”
가만히 있던 투나가 대답했다.
“여, 여기와 날씨가 달라서 그렇지 가끔 오는 편이야. 오, 오늘은 맑지만.”
“엑? 투나, 들어가 봤어요?”
“응! 과, 관광하러, 으히히.”
대인공포증 환자 주제에 동네 관광은 착실히 다녀놓은 투나가 히히 웃고 있다.
모두가 신기하게 여기는 가운데 우산을 접은 릴리와 마틸다, 그리고 마구를 짊어진 에이브가 들어섰다. 그들이 손을 흔드는 것을 마지막으로 문은 닫혔다.
“장마철이라서 손님이 별로 없군.”
“오히려 내부 관광이 많을 정도야. 이 안은 그리 덥지 않거든?”
경비병들의 중얼거림에 비타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내부가 시원하다고요!?”
키 크고 잘생긴 경비병들이 비타의 말에 조금 웃더니 말했다.
“시청에 문의하면 견학을 수 있습니다.”
요즘 비가 와서 한가한 비타가 투나를 보았다.
“투나, 안내해주세요!”
“어, 그, 그럴까?”
의기투합한 비타와 투나가 시청으로 달려갔다. 의외로 심심했는지 다른 사람들도 함께 따랐다.
슬쩍 트리스타를 살핀 크랭크가 말했다.
“같이 다녀오십시오. 오늘 작업은 오후부터 시작합니다. 다들 기다리는군요.”
“너는 안 가나?”
아리에테의 물음에 크랭크는 우산을 휙 던지고 빗속에서 포징을 잡았다.
“흡! 오늘은 운동을 할 거다. 요즘 못했어. 여름이니 땀을 많이 흘릴 수 있겠군.”
“음, 그래. 알았으니 우산을 써라. 비 맞는다.”
크랭크와 헤어진 일행들은 빗속을 걸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혹시 빗속을 달리거나 하진 않겠죠?”
“설마? 그럴 리야 있겠어?”
시청에서 간단하게 서류를 받아서 오는데 골목길에서 알몸에 속옷만 걸친 거인이 빗속을 달리는 모습을 목격한 비타가 기겁했다.
“흐익! 크랭크? 저거 크랭크예요?!”
“못 본 척하자.”
지오가 비타의 손을 잡아끌었다. 입을 딱 벌린 트리스타를 보고 아리에테가 말했다.
“당신도 곧 익숙해질 거다.”
“으히히! 어, 어서 가자.”
* * *
공방 사람들이 관광과 운동을 즐기는 사이, 캐롯이 눈을 떴다.
스르륵 눈을 뜬 인형 소녀가 두 팔을 번쩍 들고 괴성을 빽 질렀다.
“으럅! 캐롯 부활-! 마력 충전 100퍼센트!”
“으앗! 깜짝이야!”
점검 중이던 관리원이 화들짝 놀라서 다가왔다.
“넌 왜 항상 소릴 질러대!”
좀 웃어준 캐롯이 이틀 전 우산 자매가 남겨둔 우산을 펼치고 빗속을 깡충깡충 뛰어서 공방으로 돌아갔다.
“이리오너라-!”
문을 벌컥 열었지만 아무도 없다. 로테 만이 앉아서 공방을 지키고 있었다.
“다녀왔습니까.”
“에? 다른 사람들은?”
여기서 캐롯은 에이브가 집으로 돌아갔고, 그들을 배웅하러 간 사람들은 청동문 내부 관광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그걸 알려준 크랭크는?”
로테는 대답 없이 손가락을 들어서 속옷 바람으로 마당을 뛰어다니는 알몸 투구를 가리켰다.
“이걸로 13바퀴째입니다.”
“음, 오늘은 유산소운동인가 보네. 마력석은 다 찾아왔지?”
“제가 복귀할 때 챙겨왔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캐롯이 비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 충전도 했고, 사람도 돌려보냈고, 다음은 뭘 하지?”
텅-!
크랭크 공방은 창고 지대의 6번 창고, 그 이웃에 있는 7번 창고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이틀간 보이지 않던 쿠르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억! 아저씨! 거기 있었어요?!”
“뭐냐? 언제부터 비 오는 거였어?”
“그저께부터요.”
비를 피해 머리에 손을 올리고 도도도 달려가자 입구에 서서 파이프를 꺼내 문 쿠르프가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이틀이나 지났나?”
“안에서 뭐 했어요? 우와-!”
창고 건물 자체는 크랭크의 공방과 같았지만, 내부를 채우고 있는 기자재는 최첨단 드워프 제 물건들이었다.
“오오오! 공방 꾸미셨어요? 이야기했으면 도와드렸을 텐데.”
“이놈아, 내가 왜 공방을 꾸미는 즐거움을 네게 양보해야 하느냐.”
히히 웃음 지은 캐롯이 물었다.
“구경 좀 해도 되요?”
“물론이다. 쿠르프의 별장 2호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음? 저 친구는 또 왜 저러는 거냐? 빗속을 팬티만 입고 뛰어다니는데?”
“운동 중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억! 알몸에 앞치마!”
바위 요새에서 보았던 오토마톤의 등장에 캐롯이 뒤를 돌아보았다.
“애들 옷 좀 어떻게 안 돼요?”
“오토마톤에게 옷이 무슨 소용이냐?”
“문화라는 게 있거든요! 여기서는 오토마톤도 옷 정도는 입힌다구요!”
“그러냐? 모르겠군.”
공방에 남는 전투복과 방열 가발을 가져온 캐롯의 성화에 쿠르프는 어쩔 수 없이 가사용으로 가져온 오토마톤을 손질했다.
“음! 훨씬 보기 좋아.”
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오토마톤은 그저 가만히 그들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마스크도 손보고 싶지만 뭐, 상관없나?”
“후욱-! 훅! 여기 계셨군요.”
“푸흡! 쿨럭쿨럭-! 야 이놈아! 기별 좀 내고 다녀라! 그 꼴로 다가오면 오우거도 놀라겠다!”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다가 고개를 돌린 쿠르프가 온몸이 젖은 2미터짜리 알몸 거인을 보고 사레가 들려버렸다.
얼마나 뛰어다닌 것인지 크랭크의 몸에서는 하얀 증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옆집으로 이사와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흐흐흐! 그래, 재미있는 게 있으면 같이 좀 하자꾸나. 망할 엘프 놈들이 자금 지원도 해준다니 역사에 이름은 관심 없고 나만 재미있으면 되는 거다.”
“그거 말입니다만.”
조금 가까이 다가온 크랭크가 쿠르프의 귀에 대고 뭐라고 쑥덕거린다. 귀를 크랭크에게 맡기고 캐롯을 바라보는 쿠르프의 얼굴이 점점 밝아진다.
“오호오! 오호! 그런 방법이! 재미있겠구나! 당장 해보자! 내게도 좀 나누어다오.”
“알겠습니다.”
“또 뭘 하려는 거지?”
캐롯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후쯤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은 쿠르프의 공방을 보고 반가워했다.
그리고 작업장에 잔뜩 쌓여있는 오토마톤을 보고 엘프 트리스타는 정신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차량에서 망가진 오토마톤을 옮겨온 캐롯이 말했다.
“이거 전부 저 드워프 아저씨가 실험으로 부숴버린 애들이야.”
“뭐, 뭘 하려는 거지?”
“글쎄, 고쳐서 팔아먹으려는 건가?”
투나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궁금해 했다. 크랭크가 고개를 돌린다.
“투나,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
“뭐, 뭔데?”
한참 투나를 붙잡고 있던 크랭크가 중간중간 캐롯을 가리켰다. 잠시 후 투나는 의욕을 불태웠다.
“오! 오오! 그, 그렇게 어려운 게 아냐! 할 수 있어!"
투나는 서둘러 자기 연구실로 달려가서 재료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아리에테가 중얼거린다.
“갑자기 뭘 하는 거지?”
캐롯이 낄낄거렸다.
“뭘 하긴! 재미있는 거겠지! 우린 우리대로 의뢰를 진행하자! 장마철이라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시간은 없으셈!”
“음!”
아리에테와 캐롯은 일거리를 찾으러 함께 길드로 달려갔다.
* * *
아르곤에서 모두가 자기 할 일을 찾아서 미래로 나아갈 준비를 할 무렵.
제1궁정 마법사인 보이드 자작은 아멕스 공작 저택에 초대받아 왔다가 홀에 세워진 커다란 갑옷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초대한 사람은 없고, 갑옷만 덩그러니.
“이걸 보여주려고 부르신 겁니까? 난봉꾼 영애.”
기둥 뒤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장신 미녀 르클레르가 히죽 웃는다.
“여행 중에 우연히 발견한 건데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요.”
커다란 갑옷을 올려다보는 붉은 선글라스 너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냥 단순한 갑옷을 보여주려고 부르신 게 아니길 바랍니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르클레르가 주머니에서 초커를 꺼내 목에 걸었다.
찰칵!
트드드득······!
2미터가 조금 넘는 대형 갑옷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보이드 자작이 조금 물러서는 가운데 성큼성큼 걸어온 르클레르가 손짓하자 자동 갑옷이 무릎을 꿇고 등을 돌렸다.
철컥! 끼릭!
팔과 다리를 집어넣고 내부로 들어가자 위치가 자동 조절 된다. 그 상태로 몸을 일으킨 자동 갑옷의 마스크가 열리더니 르클레르의 얼굴이 투구에서 나타났다.
“이 상태로 오토마톤 보다 조금 더 강한 출력을 자랑합니다.”
지팡이를 짚은 채 가만히 그걸 쳐다보던 보이드 자작이 고개를 든다.
“원격 기동이군요. 요즘 비슷한 기술을 쓰는 자동 의수라는 물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흥미롭군요.”
지팡이로 갑옷을 툭툭 두드려본 보이드 자작이 물었다.
“그래서 이걸 어디에 씁니까?”
“이젤리아에 수출 보내고 싶은데요. 안되면 군납이라도.”
“병기의 수출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만.”
“입김 정도는 불어주실 수 있잖아요? 지금 자작님 고향이 무슨 난리를 겪고 있는지 아실 텐데요. 그간의 빚을 되갚아야 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이젤리아에서 리즈넷에 기술 원조 차원에 파견되었다가 정착한 보이드 자작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님은 잘 지내십니까?”
철컥! 끼릭!
무릎을 꿇은 자동 갑옷의 등이 열리고, 고개를 든 르클레르가 활짝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