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작은 용사! 177 >
끼익-! 철커덕.
가까이 다가온 차량의 문이 열리고 내린 것은 오토마톤이었다. 신관 릴리가 그 모습을 보고 살짝 긴장했다.
로테가 먼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 저기! 근처 마을까지 좀 태워 주실 수 없을까요? 저희들 용사의 길을 순례하는 여행자인데 말과 장비를 잃어서, 지금 비도 오고······! 에, 엣풍-!”
소녀 신관이 재채기를 하자 차량 안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쓰게 웃었다.
와사사삭! 사삭!
“으꺅!”
“크읏!”
빗속의 수풀이 흔들리자 신관과 바닥에 앉아있던 소년이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비에 젖은 금발 갑옷 여기사와 빨간 머리의 조그만 소녀였다.
몰래 뒷문으로 내려 주변을 살펴보고 온 아리에테가 외쳤다.
“어푸푸! 찬물 목욕이 따로 없네! 이상 없어!”
“이쪽도 매복은 없었다. 보리스!”
지붕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포니테일 미청년이 고개를 내민다.
“이런 빗속에서 매복이 있을 리 없잖아요?”
“그런 식으로 허를 찔리는 거다. 그래서, 용사의 길 순례자? 그게 뭐지?”
멋진 갑옷을 입은 여기사와 오토마톤 전투복을 입은 조그만 소녀가 좌우에서 나타나자 신관 릴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캐롯이 주저앉아있는 소년, 에이브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요즘 이런 애들 많이 보이네. 너 왜 그렇게 세상 다 산 얼굴이야? 말은 어쩌고 안장만 챙겨 들고 있어?”
“아! 좀 신경 쓰지 마! 그냥 내버려 두라고! 이러다 죽게!”
거친 고함 소리.
빗속에 선 아리에테와 캐롯의 시선이 에이브에게 향했다. 릴리가 대신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저희 동료가 지금 좀 힘들어서 그래요.”
캐롯이 고개를 들고 아리에테를 보았다.
“역시 미끼는 아닌 거 같지?”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서 듣도록 하자. 일단 타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빗속에서 벌어진 만남과 호의에 신관 릴리가 허리를 마구 숙였지만, 에이브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였다. 꼼짝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캐롯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했다.
“이거 꼭 옛날 아리에테 같네.”
담요 한 장에 의지해 세상을 부정했었던 사지 절단녀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쿨하게 인정했다.
“그랬지. 그땐 세상이 너무 미웠거든?”
그를 설득하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릴리를 본 아리에테는 팔을 내밀어 소년의 멱살을 잡아 올리더니 냅다 주먹을 휘둘렀다.
퍽!
배를 얻어맞은 소년은 당장 신음을 흘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놀란 캐롯과 릴리가 눈과 입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아리에테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이런 놈들을 보면 뭔가 짜증이 나버려.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세상에! 우리 아리에테가 사람을 팬다!”
캐롯의 호들갑도 곧 거센 빗소리에 묻혀버렸다.
“무슨 일이야?”
크랭크가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소년 하나를 어깨에 짊어지고 차 안으로 들어선 아리에테는 그것을 바닥에 팽개쳤다. 배를 맞은 소년은 바닥에 쓰러져 씩씩거렸다.
“내, 내 안장······!”
“그건 걱정 마. 저기 챙겨왔으니까.”
캐롯이 마구를 챙겨와 바닥에 내리는 로테를 가리켰다.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릴리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저기 부탁이 또 있는데요······.”
여기 파티는 사람도 많고, 장비와 설비가 상당했기에 염치 불고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동료가 또 있어?”
“오, 오토마톤이지만요.”
“어디에 있는데?”
바닥에 쓰러진 에이브를 슬쩍 바라본 릴리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따라 차량을 멈추고 수색에 나선 그들은 길가 숲속으로 한참 들어간 곳에서 무릎을 꿇고 가슴에 롱소드를 박아넣은 오토마톤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산적인지 모를 인간들의 시체도 잔뜩 널려있었다.
쏴아아아-!
“와, 그 녀석이 가져온 마구는 이 녀석 건가 본데?”
캐롯이 가리킨 곳에는 목과 가슴에 창이 박혀 쓰러진 백마가 있었다. 빗속을 거닐던 아리에테가 그 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멋진 말이구나. 그러고 보니 말 타본 지 오래됐어.”
빗속에도 불구하고 주섬주섬 무기와 장비를 수거하던 캐롯이 말했다.
“오! 아리에테 말 잘 타?”
“잘 타지. 내 말도 이런 백마였다. 멋진 녀석이었지.”
나이프를 꺼낸 아리에테는 말의 꼬리 끝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독백을 들으며 캐롯은 상의 주머니 속에서 신호탄을 꺼내서 쐈다.
퉁!
초록색 빛 구슬이 떠오르고 잠시 후 로테와 보리스가 달려왔다.
수거한 장비와 함께 오토마톤도 들것에 실어서 가져왔다.
“이 빗속에 이런 것도 수거해야 해?”
“그 이런 것도 하나하나 다 돈이거든? 잔말 말고 어서 옮겨.”
인원과 장비의 수용이 끝나자 지오는 다시 차량을 출발시켰다. 이야기는 이동 중에 듣기로 했다.
릴리의 설명을 들은 캐롯이 고개를 갸웃했다.
“용사 뭐라고?”
“용사 순례요.”
“누구 들어본 사람? 나는 처음 들어보는디?”
의외로 리슐리에가 손을 들었다.
“과거 용사의 행적을 좇는 여행길이라더군요. 수도에서 아르곤으로 오는 이동 차편에서 그런 여행객을 만난 적이 있어요.”
릴리가 말을 이었다.
“예, 예. 저희는 용사 순례자로 과거 마왕에게 대적한 용사가 지나온 길을 밟으며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미래의 방향을 정하는······.”
“용사가 지나온 길을 밟는다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옛날 유적지 같은 데를 찾아간단 말이야?”
“다 찾아보면 말 그대로 나라를 한 바퀴 도는 건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보리스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나 먼저 씻어도 됩니까? 다 젖어서 지금 되게 찝찝한데.”
아리에테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뜨거운 물에도 위아래가 있다. 신관님 먼저 씻으시오.”
“아, 아뇨. 저, 저보다는 에이브 먼저······.”
캐롯이 신관을 손을 잡아끌었다.
“너희들 관계는 모르겠지만 순서상 네가 감기에 걸리면 치유를 걸 수 없어. 자자, 이리 와! 비타는 마른 옷을 준비!”
“예!”
설명하던 사람이 사라지자 차량 안에 적막이 감돈다. 바닥에 퍼질러 앉은 에이브는 잔뜩 골이 난 얼굴이었다.
릴리를 비타에게 떠넘긴 캐롯이 다가왔다.
“이름이 에이브라며? 이봐 에이브, 어때?”
에이브의 얼굴 앞에 얼굴을 들이민 캐롯이 히히 웃는다.
“차가운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것보다 따뜻한 차 안에서 우는 게 더 좋지?”
놀리는 것처럼 들리는 말에 입술을 깨문 소년 에이브의 무릎 위로 무언가가 툭 던져졌다.
아리에테가 잘라 온 백마의 말총이었다.
그걸 주워 든 에이브의 얼굴이 엉망이 되더니 결국 그걸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으어어엉! 엉엉!”
보리스가 구시렁댔다.
“어휴. 시끄러워, 농장 소가 우는 것 같네.”
다들 인상을 찌푸리는데 그의 오토마톤을 살피던 크랭크가 뒤를 돌아보고 배려심 부족한 파티 멤버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캐롯, 보리스.”
“아니! 울린 건 아리에테잖아요!”
“맞아, 맞아!”
에이브가 눈물을 그칠 때쯤 릴리가 온수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울음소리를 들어서인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여벌 옷이 없어서 내걸 줬어요. 줬는데.”
비타의 얼굴이 시무룩하다.
릴리가 특정 부분의 발육이 좋아서 비타의 옷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그래서 자켓을 하나 더 빌려 입어야 했다.
돌아가면서 온수 샤워를 하고 마저 이야기를 들었다.
에이브는 귀족은 아니지만 수도 유명 상회를 이끄는 수장의 장남으로 정신 수양을 위해서 용사의 길 순례를 나섰다가 강도를 만나는 변을 당했다고 한다.
이렇게 릴리가 최대한 이야기를 온화하게 풀어놓았지만 다들 숨겨진 이야기를 짚어냈다.
목에 수건을 걸고 따뜻한 스튜를 떠먹던 보리스가 말했다.
“정신 수양? 사고치고 쫓겨난 게 아니라?”
“아니 그게······.”
국자를 든 캐롯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이거지, 장남이니 언젠가는 가업을 잇게 해야겠는데 말이 안 통하는 꼴통이다 보니 바깥으로 내보내서 고생을 좀 시켜서 사람을 만들어 보려는 속셈이야. 맞지? 응? 이 울보야.”
퍽!
날아온 스튜 그릇이 캐롯의 얼굴에 맞았다. 다들 깜짝 놀랐다. 동시에 보리스와 코비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고 운전석에 앉아있던 지오도 뒤를 돌아보았다.
그릇을 집어던진 에이브는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얼굴을 흘러내리는 스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캐롯이 히죽 웃는다.
“오, 정곡? 정곡이야? 이히히히! 하하하!”
“하와와! 뜨겁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제가 치료를-!”
깜짝 놀란 릴리가 손을 내밀었지만 비타가 막았다.
“캐롯에게 힐은 통하지 않아요.”
“예?”
쾅-!
정수리에 일격을 맞은 에이브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거품을 물고 기절한 그를 보고 릴리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무시무시한 얼굴로 주먹을 든 아리에테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까운 식사를 내팽개치다니 어디서 배운 버릇이냐.”
수건으로 얼굴의 스튜를 닦던 캐롯이 빽 외쳤다.
“아니! 내 걱정 먼저 해줘야지!”
힐끔 캐롯을 쳐다본 아리에테는 그제야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 귀염둥이에게 무슨 짓이냐.”
캐롯이 깔깔 웃는다. 그리고는 쓰러진 에이브의 다리를 잡아끌고 샤워실로 향했다.
“이 틈에 좀 씻기자. 코비, 거들어줘.”
“옙.”
옷을 다 벗기고 알몸으로 만든 에이브를 샤워실에서 벅벅 씻긴 캐롯과 코비는 커다란 수건으로 대충 닦은 다음 해먹에 싸서 천장에 매달아버렸다.
“됐다!”
“무슨 건조식량이야?”
“이 틈에 나도 좀 씻을게, 몸은 오토마톤이지만 생체 스킨이라서 주기적인 세척이 필요해.”
릴리가 눈을 크게 떴다.
“오, 오토마톤?”
“브이!”
윙크를 찡긋하고 샤워실로 들어간 캐롯을 뒤로하고 크랭크가 가슴에 롱소드를 박아 넣은 오토마톤을 가리켰다.
“저건 어떻게 된 겁니까?”
“아, 함께 데려온 오토마톤이에요. 이름은 마틸다고요. 가, 강도들을 만나서 싸우다가 실수로 사람을······.”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 강제 종료를 선택한 오토마톤을 오랜만에 본 크랭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씻느라 의수에 가벼운 운동복을 착용한 아리에테가 다가왔다.
“네 실력이면 고칠 수 있지 않나?”
릴리의 눈이 커졌다.
“고칠 수 있어요?”
“다시 움직이게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은 지워야 합니다. 나는 마도공학자가 아니라서 논리 충돌을 일으킨 오토마톤의 기억회로를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다들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리슐리에도 고개를 저었다.
“오토마톤은 전문 분야 밖이에요.”
시무룩한 얼굴이 된 릴리가 천장의 해먹에 매달려 있는 에이브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곧 애써서 밝은 표정을 지었다.
“어, 어쨌든,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시에 도착하면 소정의 답례를 할게요.”
“지오, 여기가 어디쯤입니까?”
투구를 돌린 크랭크의 물음에 빗길 운전 중이던 지오가 계기판 위에 고정된 지도와 나침반을 힐끗 살피며 말했다.
“어, 음, 지금 방주 도시 스테인이 가깝긴 한데, 그러려면 차를 다시 돌려야 하는데요.”
팔짱을 한 아리에테가 끼어든다.
“말도 잃고 마음도 꺾인 상태로 던져놔 봐야 다시 쓰러질 뿐이다. 아르곤으로 데려가자. 거기라면 청동문도 있으니 요양 후 바로 수도로 돌아갈 수 있어.”
팔짱을 하고 있던 2미터짜리 양철 거인이 투구를 끄덕이더니 다시 릴리를 내려다본다.
“아십니까? 눈물도 몸과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마음 놓고 흘릴 수 있습니다.”
릴리는 어어? 거리다가 곧 고개를 숙이고 치마를 움켜쥐었다. 눈가에 뜨거운 빗물이 무럭무럭 솟아오른다.
“흐으윽······!”
사기를 당하고 강도를 만나는 험한 일을 겪고 여행 동료들의 희생까지 눈앞에서 목격한 꿋꿋한 소녀는 그제야 울음을 터트릴 수 있었다.
비타가 다가와 그녀를 보듬어 주었고,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오는 차량을 조금 천천히 몰았다.
그렇게 종일 내리던 비는 이튿날이 되어서야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