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쇼핑! 157 >
“가진 것 다 내놔라!”
“우리는 초원의 강도단! 목숨 빼고 다 가져가겠다!”
먹는 게 느려서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은 리슐리에는 갑자기 모닥불가로 쳐들어온 사람들을 보고 멍청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앞서 식사를 마치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숲으로 들어간 지오가 코비가 머리에 종이봉투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것이다.
스르릉-!
이번엔 칼 뽑는 소리,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한 리슐리에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로테는 옆으로 돌아가 쳐! 협공이다!”
옆에서 팔짱을 하고 지켜보던 캐롯이 빽 소리를 질렀다.
“대놓고 협공이라고 소리치지 마! 강도들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훈련 상황극을 하던 보리스가 칼을 어깨에 척 걸치더니 캐롯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대뜸 시켜보지 말고 시범을 보여 보라고, 그래야 보고 배우지.”
“음, 상황에 따라 다르겠네. 먼저, 강도단이다! 라고 외친 시점에서 놈들의 상태를 살펴야 해. 비루하고 못 먹은 티가 보이면 식량으로 협상을 하는 거지. 내가 시범을 보여줄게. 강도단은 등장부터 다시 하자.”
지오와 코비가 두 손을 들고 다시 외쳤다.
“왁! 우리는 초원의 강도단이다!”
“가진 것을 내놔라!”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은 캐롯이 말했다.
“와, 아저씨들 괜찮아요? 식사는 하셨어요? 먹을 거 좀 드릴 테니 그냥 가주시면 안 돼요? 싸우면 우리 서로 다쳐요.”
“응?”
말은 친절하게 하면서 캐롯의 손에는 어느새 큼직한 식칼이 들려 있다. 코비와 지오가 주춤했다.
캐롯이 방긋 웃으면서 칼을 들고 말했다.
“네? 그렇게 해요? 예?”
“어, 음.”
“상황 끝, 잘 봤지? 협상을 끌어내려면 이쪽도 만만찮다는 걸 보여줘야 해. 절대로 겁먹은 표정 하지 말고. 보리스, 해보자. 강도단 다시 등장.”
좀 한심한 표정을 하긴 했지만 리슐리에는 밥을 먹으면서 그들의 상황극을 눈여겨보았다. 반면 근처에 앉은 아리에테와 비타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들의 연극을 구경했다.
이 와중에 캐롯은 돌아가면서 모두를 상황극에 출연시켰다.
“나도 해야 해?”
캐롯은 여전히 히히 웃으면서 손짓했고, 마법사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차가운 인상에 안경을 써서 도시적 외모가 드러난 미녀 마법사의 앞으로 시골 강도단이 나타났다.
오늘 몇 번이나 외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초원 강도······!”
파지지직!
말끔하게 빗질한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휘날리며 주변으로 푸른 번개가 번쩍인다. 지오와 코비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협상 이전에 압도적인 힘으로 강도단을 굴복시킨 리슐리에가 뒤를 돌아보았다.
“난 일찍 자고 싶은데.”
팔짱을 끼고 킥킥 웃고 있던 캐롯이 수송차량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 안에 샤워 시설이 있어. 씻고 자.”
“정말?”
내내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던 리슐리에의 눈이 커다래졌다. 비타가 일어섰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이 차량, 우리가 만들었거든요? 내부에 화장실도 있어요.”
차량 내부 시설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없었던 리슐리에의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녀들이 사라지고 자리에 털썩 앉은 지오와 코비가 한숨을 내쉰다.
“와, 굉장했어. 협상이고 뭐고 다 튀겨 버릴 기세던데?”
“처음엔 다들 뻣뻣하지. 나도 그랬다.”
모닥불가에서 롱소드의 날을 비춰보던 아리에테의 말이었다.
“지금도 뻣뻣하지 않아요?”
보리스가 물었지만 아리에테는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기만 했다.
캐롯이 말했다.
“아냐. 정말로 뻣뻣했어. 온종일 말도 없고, 내내 울기만 하고.”
“우, 울기는!”
헛기침을 좀 하면서 칼을 집어넣은 아리에테는 곁에서 나침반과 지도를 꺼내놓고 거리를 계산하고 있던 크랭크를 보았다.
“일정은 어떠냐?”
“4일 정도 더 가면 도착 할 것 같다. 그런데 지도상으로 목적지에서 이틀거리에 개척민 마을 베누스가 있군.”
“엇? 정말? 오는 길에 들려보는 것도 좋을 듯?”
“여유가 되면 그러자.”
파티 멤버 전원이 매달려 개조한 차량 덕분에 안전하고 쾌적한 여행길은 계속되었다. 다들 너무 심심한 나머지 쉬는 시간만 되면 주변 들판을 뛰어다니며 약초 같은 것들을 잔뜩 채취했다.
덕분에 차량의 하부 짐칸은 약초 자루로 꽉꽉 채워지고 있었다.
“투나가 좋아하겠는데?”
“그러게, 스톡 채우고 남는 건 팔아도 되겠다.”
6월의 화사한 들판을 뛰어다니며 약초를 뜯고 있던 비타가 잠시 허리를 폈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와-! 비행선! 비행선이에요! 엘프들의 공중 전함!”
“뭐랄까. 바다 가오리를 세로로 잡아 늘인 것 같은 녀석이네.”
맑은 하늘 아래에 다소 이질적인 물체가 지나간다. 삼각형의 커다란 동체에 비해 좌우의 날개는 빈약했지만 별 무리 없이 날아가고 있다.
엘프들의 비행선은 바다에서 쓰는 배처럼 생긴 것도 있지만 지금 지나가는 것처럼 전혀 색다르게 생긴 것들도 있었다.
비타가 발견한 것은 비행 고도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잘 보였다.
“빨리 손 흔들어요! 손!”
들고 있던 바구니와 자루를 내버려 둔 사람들이 와하하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다만 성격 밝은 사람들이나 그랬고, 크랭크나 보리스, 리슐리에는 시큰둥한 시선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 그 커다란 비행선이 반응했다. 아래 사람들의 손짓에 마주 인사라도 하는 듯 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어대면서 날아갔다.
비타가 호들갑을 떨었다.
“와! 봤어! 우리한테 인사해 주셨어요! 와! 와아! 진짜였어요!”
“오오! 그렇구나! 애들이 왜 마구 손 흔드나 싶었는데! 이거 때문이구나! 하하하!”
오랜 궁금증이 풀린 캐롯도 좋아했다. 차량을 점검하다가 멀어져 가는 비행선을 쳐다보던 크랭크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보면 엘프도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어.”
“그런 사람들이 왜 우리들의 발전과 미래를 가로막는 걸까요?”
근처에서 서 있던 리슐리에가 팔짱을 하고 비행선을 바라보고 있다.
몸을 돌린 크랭크는 엔진실을 열어 내부를 점검하면서 말했다.
“다음에 엘프를 만나면 물어봅시다. 분명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리슐리에가 피식 웃었다. 물론 아무도 듣지 못했다.
한가득 뽑아온 약초를 짊어지고 돌아온 일행들이 하하호호 떠들어댔다.
“꼭 커다란 삼각형이 날아가는 것 같았어.”
“크랭크 아저씨. 저건 대체 어떻게 날아다녀요?”
모두가 이런 쪽으로는 박식한 크랭크를 바라보았지만, 그도 신통찮았다.
“저도 잘 모르겠군요. 만약 저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말입니다.”
텅-!
크랭크는 차량 엔진실의 문을 닫으며 말했다. 일행들은 다들 그 기술을 크랭크가 알게 되면 이 차량부터 띄워 보려고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출발에서부터 총 5일간의 여행 끝에 일행은 리즈넷 동남부 웨일즈 본 산맥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 또 왔어! 하하하!”
난간을 설치한 지붕에 올라간 아리에테와 캐롯이 두 팔을 벌리고 소리를 꽥 지르고 있다.
“와! 이 난간은 참 잘 만들었어요. 안전해요.”
“하하하! 아리에테, 떨어져서 그런 거 아냐?”
난간에 기대어 바람을 맞고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킥킥거렸다. 상황을 모르는 리슐리에만이 무표정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주변을 살피고 있을 뿐이다.
“리슈 언니~! 저기 봐요! 드워프 도시예요!”
어느새 친해진 비타가 팔을 들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산 아래의 거대한 방주도시를 가리켰다.
감정과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는 리슐리에도 점점 가까워지는 드워프의 도시를 바라보며 안경 너머의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드워프 도시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경비병도 없고, 대신 성벽에 창문이 나 있어서 입성 심사를 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지 호출 벨을 부르고 한참 기다려 드워프 경비병을 만났다.
그동안 사람들은 나란히 서서 고개를 꺾어 웅장한 수직 성벽을 올려다보느라 웃긴 모습을 연출했다.
“와, 가까이에서 보니 더 엄청난데?”
“그러게. 키도 그렇게 안 큰 사람들이 성벽은 왜 이렇게 크게 쌓았대? 아르곤의 두 배는 되겠는데?”
일행들이 뻐근한 목을 만지고 있는데 심사를 받으러 갔던 크랭크와 지오가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문 안 열어줘?”
“응, 상황이 좀 이상하게 됐다. 이 편지의 쿠르프 씨는 이곳에 없다고 하더군.”
“엉? 그게 무슨 말?”
투구를 돌린 크랭크가 손을 들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2시간 떨어진 곳에 움막을 짓고 홀로 살고 있다고 해.”
당황한 코비가 말했다.
“어어? 중간 보급 없이 오느라 식료품이 슬슬 떨어져 가는 참인데요.”
“그것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성 내부로는 들어올 수 없고, 대신 성벽 매점의 이용은 허가받았습니다.”
캐롯이 고개를 기울였다.
“성벽 매점은 뭐야?”
드르륵-!
바위의 마찰음 같은 것이 들리더니 방금까지 벽이었던 곳에 문이 생겼다. 호기심이 생긴 캐롯이 도도도 달려가자 잡화상 같은 곳에 오토마톤이 앉아서 그들을 맞이했다.
가발도 없고, 옷도 없는 목각인형 같은 알몸 그대로의 오토마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알몸의 오토마톤!”
“말씀하신 품목의 제품은 판매하지 않습니다.”
신기한 듯이 드워프 매점을 두리번거리던 캐롯이 소리쳤다.
“여기가 성벽 매점이야? 하하! 웃겨! 얼마나 폐쇄적인 사람들인 거야? 장사 정도는 직접 하라고!”
“해당 품목은 없습니다.”
기계적으로 대답하는 오토마톤을 보고 캐롯이 또 웃었다.
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두리번거린 크랭크는 점원 역할을 하고 있는 오토마톤을 신기한 듯이 쳐다보다가 식료품을 주문했다.
“돈은 리즈넷 화폐인데 쓸 수 있습니까?”
“물론 가능합니다.”
근처에서 진열장의 무기를 구경하던 아리에테가 가격표를 보고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가 되었다.
“생각보다 싸잖아?!”
“뭐요!”
보리스와 지오도 달려왔다.
그들은 드워프제 롱소드를 하나씩 구입했다. 이참에 코비도 새 롱보우를 사려고 했지만 크랭크가 말렸다.
“코비에겐 돌아가서 자동 석궁을 준비할 테니 조금만 참읍시다.”
“자동 석궁요?!”
칼을 만져보던 보리스가 말했다.
“드워프제 무기가 더 좋은 거 아니에요?”
“성능은 확실하지만 고장이 나면 인간 기술자가 손댈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유지보수를 위해서라도 국산 기성품을 사용합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랭크가 하는 말이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매점에는 그것뿐만 아니라 마법 물품도 많았다.
“와! 이거 봐요! 마법 지팡이에요! 마력을 늘려 준대요.”
하지만 가격표를 보고 포기했다.
“3천 500만-!?”
“엄청나네. 칼이나 활은 엄청 싼데 말이야.”
“어이 친구, 롱소드 하나에 150만이 넘는데 그게 싼 거야?”
캐롯의 말에 칼잡이들이 버럭 했다.
“드워프제라고!? 이 가격이면 거저야!”
“이걸 아르곤으로 가져가면 3배로 뛴다고!”
“이, 이참에 몇 개 더 사갈까? 지오, 너 돈 좀 있어?”
그때 가만히 있던 오토마톤이 끼어들었다.
“무기류의 경우 1인당 한 자루씩입니다. 대량 구매는 상담하셔야 합니다.”
보리스가 실망했다. 캐롯이 히히 웃었다.
“빈틈없는 드워프 아저씨들이네.”
남자들이 식료품을 옮기고 있는 동안 리슐리에는 고개를 숙여 진열장의 마법 반지를 구경하고 있었다.
비타가 다가왔다.
“리슈 언니는 뭘 봐요? 반지 보고 있어요? 와, 예뻐라. 근데 가격이 장난이 아니네요. 2200만이라는데요. 하하.”
대답 없이 한참 진열장 앞에 서 있던 그녀가 곧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이거, 주세요.”
철커덕!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던 오토마톤이 벌떡 일어서더니 리슐리에의 앞으로 다가와 그녀가 가리킨 반지를 꺼냈다.
“이것이 맞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리슐리에가 허리의 두꺼운 벨트를 풀었다. 놀랍게도 안쪽 주머니에 금괴가 들어있었다.
입을 딱 벌린 비타가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리리리리슈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