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취미!
그렇게 불려온 베누스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과 사람들을 지킨다. 알겠습니다.”
“베누스를 남겨 둘 거라고?”
크랭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동안만, 그리고 나는 절대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계약은 유효하다.”
베누스는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마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겠어? 오늘부터 극동 개척민 마을 베누스로 하자. 원래 여신님의 이름이니까.”
“베누스, 괜찮군. 어떠냐?”
캐롯의 제안은 크랭크도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한때 해적선의 경호 오토마톤이었던 베누스의 유리구슬 눈동자가 반짝인다.
“아주 좋습니다. 개척민 마을 베누스, 제 이름과 같은 마을이군요.”
* * *
연회가 끝나고 이튿날, 체류하고 있던 모험가들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조사한 내용을 공주에게 찾아가 보고했다.
난민들의 유입과 더불어 그걸 노린 인신매매, 구출 작전, 생활 기반의 구축에 이어서 동굴을 통해서 넘어온 사이퍼즈 병사들과 뒤이어 하드 스킨 오토마톤을 격퇴한 이야기를 들으며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은 그녀였지만 산을 무너뜨린 이야기에서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산을? 산을 무너뜨려?”
자리에서 일어서서 발표 중이던 에이플은 긴장한 채 앉아있는 크랭크와 캐롯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예, 창밖으로 보시면 산봉우리 하나가 없어진 것을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쥬세페 공주가 창문으로 다가갔다. 곧바로 호위들이 커튼을 걷고 망원경을 준비했다.
정말로 톱날 같은 봉우리 하나가 아래로 푹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망원경을 내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산을 무너뜨리다니, 무슨 수를 쓴 거지? 그럼 동굴은 어찌 된 것인가?”
공주가 고개를 돌리고 질문하자 에이플은 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 무너졌습니다. 여기 저희가 자체적으로 조사한 주변 동굴의 분포도와 내부 상태입니다.”
지도를 살펴본 쥬세페 공주는 허탈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로 와서 풀썩 주저앉았다.
동굴 투어가 취소된 것이 안타까웠지만 장래 적으로는 막아버렸어야 할 물건이니 상관없었다.
“아니, 잠깐. 봉우리가 내려앉을 정도면 내부가 비어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설마 저 동굴은…….”
자리에 동석하여 잔뜩 찡그린 얼굴로 손톱을 깨물고 있던 구스타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쥬세페 공주와 얼굴을 마주했다.
탁-!
테이블을 살짝 두드린 그가 공주에게 삿대질을 했다.
“딱히 발뺌할 생각은 없지만 자연 동굴이라는 가능성 이전에 다짜고짜 드워프부터 의심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구만!”
“그야, 바로 곁에 계시니까요.”
쥬세페 공주가 싱긋 웃었다. 거창한 한숨을 내쉰 구스타프는 대답하기 전에 비밀 유지를 위해 크랭크와 캐롯을 제외한 다른 모험가들을 모두 내보냈다.
“양철 거인, 시작해.”
“그게 그러니까요.”
막상 입을 연 것은 캐롯이었다.
캐롯은 동굴 안쪽에서 길 잃은 오토마톤을 만나 사막의 아드미르 부족들과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쥬세페 공주를 포함해 다들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오토마톤을 가진, 현 사이퍼즈 왕국과 대립하는 부족이라니, 거기에 화약 병기… 관통굴… 호의적인 아드미르 부족…….”
정보를 취합하던 그녀가 또 코를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돈 냄새가 나만 나는 것인가?”
“……무슨 냄새가 난다고?”
구스타프의 어이없는 물음에 쥬세페 공주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앞서 모험가들의 조사에는 굴이 하나가 아니던데 선대가 남기신 자세한 자료는 없나요? 여기까지 들으니 하나 정도는 남아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쓸데없이 꼼꼼하군. 자네는 내가 봤던 공주들하고 좀 다른데.”
구시렁거린 구스타프였지만 속으로 기뻐하며 가져온 낡은 지도를 꺼냈다.
주변의 보좌진도 몰려들어 지도를 살폈다. 표시된 산맥의 구멍은 모두 70여개, 그중 산맥을 완전히 가로지르는 것은 13개나 있었다.
“엄청나군요. 이 거대한 산맥을 가로로 뚫어버리시다니.”
“이렇게 크고 긴 산맥이니 뭐가 있나 궁금했나 보지.”
호기심이 동한 쥬세페 공주가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뭐가 있었습니까?”
드워프답지 않게 날카로운 표정을 지은 구스타프가 다시 굵은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것보다 다른 할 이야기가 더 많지 않은가? 내가 왜 이런 옛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나?”
쥬세페를 비롯해 그녀의 좌우에 도열한 보좌진들이 긴장했다. 구스타프와 쥬세페 공주는 이어서 마을의 효용가치와 향후 선점, 사용권을 두고 협상을 벌였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수박꽃을 놓고 미래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 캐롯의 눈에는 참 낯설고 의미 없어 보였지만 소위 침 발라두기는 어른들의 세계에선 흔한 일이었다.
빙긋 웃은 리리안느가 따로 캐롯에게 질문했다.
“개인적으로 궁금하군요. 산은? 저건 어떻게 무너뜨린 거죠?”
“예, 습격해온 오토마톤의 마력 엔진을 폭탄으로 만들어서 터트렸데요, 우리 주인님이.”
모두가 크랭크를 쳐다보았다.
“뭐?! 마력 폭주를 일으킨 것인가?!”
“어, 음, 예.”
“꼴에 굉장한 짓을 하는군.”
산을 무너뜨린 방법에 대해서까지는 듣지 못했던 구스타프였기에 그는 크랭크를 위아래로 다시 한번 쳐다본 다음 공주를 보면서 말을 맺었다.
“말한 대로 하지. 어떤가?”
잠깐 보좌진과 의논하던 공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보고와 협상이 순조롭게 끝나고, 쥬세페 공주는 본연의 임무에 따라 탐색대를 급파하여 지도에 표기된 동굴 중에서 살아남은 것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랭크는 마을 대표단과 함께 사람들을 불러 모아 회의 내용을 발표했다.
“드워프가 바라는 것은 향후 생산되는 면직품의 선점입니다. 제1순위 고객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여러분이 직접 협의하시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공짜로 도와준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될 거다.”
팔짱을 낀 구스타프가 콧방귀를 킁 하고 뀌었다.
크랭크는 이제 마을 바깥에 자리 잡은 여러 대의 자동수송차량을 가리켰다.
“공주님께서는 향후 이곳을 면직가공단지로 만들어볼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이 역시 크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열심히 일하고 번 돈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면 그것이 그분께 도움이 됩니다.”
“걱정 마요들, 아무래도 공주님의 입김이 닿게 되니까. 오히려 잘 된 거야. 뭣하면 우리에게 연락해요! 돈 받을 거지만!”
불안한 얼굴로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캐롯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크랭크가 끙 하는 소리를 내면서 쳐다보자 캐롯은 오헤헤 웃으며 혀를 빼물었다.
“그리고 조만간 우리들은 모두 떠날 것입니다. 이제 정말 여러분들만 여기 남아서 살아가야 합니다.”
통역을 받은 마을 사람들은 정말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발판에 올라서서 빙그레 웃음 짓고 있던 캐롯이 물었다.
“홀로서기는 중요해. 다들 자신 있어?”
모두가 입을 다물고 정적을 유지했다. 크랭크는 이어서 베누스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니까. 제 오토마톤을 남겨 놓고 가겠습니다. 이름은 베누스, 당분간 임시 경비대장이 되어 여러분들과 마을을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을의 이름도 베누스라고 지어보았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중에 바꾸도록 하십시오.”
난데없이 개척민 마을의 이름과 그 마을의 임시 경비 대장으로 베누스를 소개하자 사람들이 좀 웅성거렸지만 대체로 한시름 덜어낸 얼굴을 했다.
베누스라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을의 경비와 호위를 도맡아주던 오토마톤으로 다들 그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씁, 어디서 본 듯한데?
팔짱을 끼고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던 구스타프가 문득 기억을 떠올리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어이! 그 녀석, 설마! 남부 해적선의?!”
이윽고 초록색 방열가발을 늘어뜨린 베누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태 알아보지 못하는 구스타프가 신기해서 내내 입 다물고 있던 캐롯은, 소프트 스킨으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면 지금 베누스는 무슨 얼굴을 했을까 궁금했다.
“반갑습니다. 구스타프 님. 이제야 알아봐 주시는군요.”
그에게 두들겨 맞은 적이 있던 구스타프는 대단히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도 광산에서 오토마톤들을 많이 대해보았기 때문에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가슴은 수긍할 수 없었다.
“이봐, 꼭 저걸 써야겠나? 다른 놈은 안 돼?”
“아무렴 어떻습니까? 오토마톤은 도구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명령받은 대로 행동합니다. 그리고 도리어 속죄의 기회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베누스는 사람에게 감사와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었데요.”
캐롯이 거들었지만, 구스타프는 여전히 우거지상이었다. 크랭크는 이 틈에 그란에 대한 것도 일러두었다.
“그놈도?”
구스타프가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은 괜찮으냐?
미리 언질을 받은 고디브와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잡혀갔었던 사람들의 말로는 그 사람은 유일하게 잘 대해줬다고 하더군요. 이곳 실정에 밝은 사람이 하나라도 많으면 저희야 좋습니다.”
“쯧, 어쩐지 비슷한 놈들끼리 여길 도맡게 되었군. 알았다. 일 끝나는 대로 이리로 데려오마.”
이야기가 얼추 마무리되자 크랭크는 이제 사람들의 틈 속에서 고가의 카타 잎을 내놓은 노인에게 다가갔다.
다른 늙은이들과 같이 우물가 평상에 앉아 지팡이에 두 손을 올리고 있던 그의 얼굴로 크랭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의뢰인, 어떻습니까? 서비스는 마음에 드십니까?”
늙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1년, 1년 맡겨두겠습니다. 당신들의 의지를 실험해 봅시다. 이 마을은 이제 당신들의 것입니다.”
통역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은 감격에 겨운 얼굴로 크랭크의 손을 잡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뭐라고 말을 했는데, 고디브가 웃으면서 통역했다.
“손녀딸의 사위로 받아들이고 싶다는데요?”
“우와?! 정말? 누구야? 누구!”
주변에 있던 젊은이들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묘리나!”
곧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조그만 소녀가 낑낑거리며 모습을 드러내자 캐롯이 뿌하하! 웃어버렸다.
반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소녀를 내려다보던 크랭크는 투구를 좀 매만지더니 결국 두 손을 내밀고 극구 사양했다.
그 와중에 투나와 아리에테가 대단히 불편한 기색을 표현했다. 덕분에 저 두 사람이 이 남자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거나 했다.
광인 크랭크가 그들에게 남긴 인상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번쩍!?
“아읏!”
“우왁?!”
“오오옥?!”
갑작스러운 섬광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 눈을 감고 버둥거렸다.
눈을 질끈 감은 캐롯이 외쳤다.
“와! 나 이거 전에도 당해 본 것 같아!”
사사사사삭!
마스크 대신 커다란 렌즈로 이루어진 얼굴을 가진 오토마톤이 화판을 앞에 놓고 그림을 그려 옆의 사람에게 내밀었다.
흐뭇한 표정을 한 쥬세페 공주가 그림을 들여다보며 웃음 지었다.
“보기 좋구나. 내 취미는 사실 여러분들의 추억을 못 박는 것이지. 이렇게,”
수행원으로 따라 나온 리리안느가 왕녀의 그럴듯한 헛소리를 들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괜찮은 걸 뽑았다는 말과 함께 넘겨주는 그림을 받아들고 그걸 슬쩍 들여다보았다.
종이 속에는 조그만 아이를 앞에 놓고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사양하는 몸짓의 덩치 큰 남자, 그런 그를 보고 웃고 있는 사람들,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의 약사와 여 기사, 그리고 아플 리가 없는 배를 붙잡고 웃고 있는 작은 인형 소녀가 그들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