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해외여행!
하얀 오토마톤이 손을 든 채로 사이퍼즈 말을 시작했는데, 두 사람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역시 통역을 데려올 걸 그랬나.”
“우-! 몰라, 네가 뭐라고 하는지 몰라.”
크랭크와 찡그린 얼굴로 혀를 길게 빼문 캐롯이 두 팔로 엑스자 표시를 했다.
그러자 맞은편의 오토마톤도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손짓으로 그들을 부르며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따라오라는 듯?”
“오토마톤이 독자적인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 베테랑스의 발현이라고 봐도 좋은 것인가? 흥미롭다. 따라가 보자.”
“응. 내가 앞장설게.”
던전에서 만난 호의적인 적병 오토마톤을 따라간 두 사람은, 중앙통로 주변으로 나 있는 자연 동굴 깊숙한 곳에서 기력이 다한 인간 남자 2명을 발견했다.
“오오! 오오오! 주인님을 구하려고 했구나. 너, 참 기특한 녀석이구나!”
캐롯이 하얀 오토마톤을 칭찬했다. 크랭크가 그들을 살피고 있는데 캐롯이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일단 우리랑 적대 세력인데.”
힐끔 근처에 서 있는 하얀 오토마톤을 쳐다본 크랭크는 결국 배낭을 풀었다.
“일단 돕자.”
물에 체력 포션을 타서 마시게 한 다음 크랭크가 1명, 하얀 오토마톤이 1명을 부축해서 중앙통로로 돌아왔다. 덤벼드는 몬스터는 캐롯이 상대했다.
수첩을 들여다보며 갈림길의 표식을 따라 2시간을 더 걸어 들어간 그들은 기어코 무너뜨린 동굴 출구에 도착했다.
그걸 보고 크랭크와 캐롯이 놀라워했다.
“와, 깨끗하게 치워놨네?”
이윽고 동굴을 나서자마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두 번은 보고 싶지 않았던 황량한 사막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초원의 나라에서 살아온 크랭크와 캐롯에겐 상당히 이질적인 세계의 모습이었다.
“끔찍하군.”
크랭크가 짧은 감상평을 내놓았다.
“어? 어디가?”
함께 동굴에서 탈출한 하얀 오토마톤이 등에 사람을 업은 채 산 아래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곧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보며 손짓한다.
“호오, 계속 따라오라는 듯?”
“따라가 보자. 어쩌면 그 아드미르 부족을 만날 수 있겠다.”
“어떻게 할 건데?”
지면의 모래를 내려다보던 크랭크가 투구를 슬쩍 들어 올렸다. 투구 안에서 도전적인 시선이 드러났다.
“문명인이라면 먼저 대화를 시작해야지.”
“그래, 말이 통하면 좋겠다.”
푹푹 빠지는 사막의 모래를 신기하게 여기며 걷던 그들은 완만한 비탈에 검은 바위와 돌이 잔뜩 굴러다니는 지형에 도달했다.
기절한 남자의 주머니를 뒤적인 하얀 오토마톤이 작은 호루라기 같은 것을 꺼내더니 마스크의 입이 있음직한 부분에 가져다 대었다가 크랭크에게 내밀었다.
“불으라는 듯?”
“오토마톤의 폐활량은 인간보다 적거든, 그런데 이것은 일방적인 도움이라기보다는 협동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던전을 탈출해서도 이 협력 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이 흥미롭다. 사실 베테랑스는 무수한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처럼 협동을 추구하기 위해서 발현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끝끝내 도달하는 것은……!”
“진정하고 빨리 불기나 해.”
캐롯의 재촉에 투구를 슬쩍 들어 올린 크랭크가 입에 호루라기를 대더니 힘껏 불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음? 고장 났나?”
“모르겠는데.”
호루라기를 살펴보는데 갑자기 바위 더미 근처에서 뭔가가 움직이며 다가온다. 사막 전갈이었다. 깜짝 놀란 캐롯이 도끼를 뽑아 던지려고 하자 하얀 오토마톤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사삭! 사삭!
여러 개의 다리를 기민하게 움직이며 다가와 얌전히 몸을 숙이는 사막 전갈에는 말처럼 안장이 올려져 있었다.
캐롯과 크랭크가 사람에게 길들여진 사막전갈을 올려다보며 놀라워했다.
“오와! 세상에, 이런 걸 타고 다닌다는 거야?”
“놀랍군. 대체 어떤 미친 사람이 킹 스콜피온을 길들일 생각을 했을까?”
익숙한 솜씨로 안장 위에 탈진한 남자를 올려놓은 하얀 오토마톤은 이제 크랭크가 부축하고 있던 남자의 주머니도 뒤적이더니 같은 호루라기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무슨 열쇠 같은 거야? 1마리당 하나야? 어서 불어봐! 어서!”
두근두근 기대하는 캐롯이 바라보는 가운데 크랭크가 다시 그것을 불자 정말로 사막 전갈이 하나 더 찾아왔다.
앞서 찾아온 전갈에 올라앉아 고삐를 잡은 하얀 오토마톤이 손짓했다.
“오! 타라는 듯?”
“가보자.”
크랭크는 캐롯을 덥석 안아 들더니 등자를 밟고 전갈의 안장에 올라탔다. 몸무게가 상당했을 테지만 사막 전갈은 가볍게 일어서서 앞서가는 전갈의 뒤를 따랐다.
“오오! 오오오! 대빵 신기해! 세상에 전갈을 타고 다닐 수 있다니! 와오와!”
크랭크의 앞에 자리 잡은 캐롯이 널찍한 전갈의 등을 내려다보며 즐거워했다.
“비스트 테이머라도 된 기분이군. 전갈에 타볼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진짜로! 와하하! 돌아가면 전갈 한번 잡아서 길들여보자!”
“음.”
말보다는 느리지만 낙타보다는 빠른 전갈을 타고 2시간 넘게 이동하자 지평선에서 검은 점 같은 것이 나타나더니 가까이 다가갈수록 전체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도시다. 아마 저기가 목적지인가 본데.”
망원경을 꺼내 보던 크랭크가 그걸 캐롯에게 내밀었다. 쏟아지는 햇살에 과열될 것 같아 머리를 풀고 수건을 쓰고 있던 캐롯이 망원경을 눈에 댔다.
“저거 바위야?”
온통 모래투성이인 사막에서 알아보기 좋은 랜드마크처럼 불쑥 솟아오른 바위산 아래에는 오아시스가 있고, 그 주변으로 야자수를 비롯해 얼마 안 되는 숲과 사람이 사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은 리즈넷처럼 나무나 벽돌로 만든 건물이 없고, 대부분 유목 민족들의 대형 천막 같은 것이 잔뜩 깔려 거리를 이루었다.
성문 통과도 없이 너무도 손쉽게 거리로 들어서자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전갈의 등에 앉은 채 그들을 내려다보던 캐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와, 여긴 방호벽이나 목책도 없네?”
“사이퍼즈는 몬스터가 별로 없다더군.”
“으응? 그럼 얘는?”
“지금은 몬스터가 아니잖아?”
“아, 그런가?”
잠깐 논란이 된 사막 전갈은 거리를 지나 바위산 아래에 펼쳐진 광장까지 들어가서 멈췄다. 하얀 오토마톤이 뛰어내리고, 크랭크와 캐롯도 전갈에서 내렸다.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뜬 캐롯은 모래의 나라에 우뚝 솟아오른 바위의 도시를 구경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와! 와아! 건물이고 하늘이고 사람이고 전부 달라! 냄새도 달라!”
캐롯이 크랭크를 돌아보았다.
“어엇! 이거 혹시 해외여행 아냐?”
“음, 관광이 목적은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맞겠지. 여긴 다른 나라의 도시니까.”
크랭크가 투구를 끄덕이자 캐롯은 두 손으로 뺨을 붙잡으며 호오오옥! 하는 소리를 질러댔다.
“호오옥! 해외여행이라니! 나는 지금 셀럽을 만끽하고 있어! 이름 하여 셀럽 캐롯! 투나랑 아리에테에게 자랑해야지! 그렇지! 갈 때 기념품 좀 사서 가자!”
“음. 기회가 된다면.”
첫 해외여행에 들뜬 캐롯과 무덤덤한 크랭크와는 반대로 갑작스레 찾아온 이방인들 때문에 사막의 도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우루루 달려와 창을 들이대며 수많은 질문 공세가 쏟아졌지만,
캐롯은 하품으로 대답했다.
“우아함~! 냠냠, 리즈넷 말할 줄 아는 사람은 없나봐?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장난삼아 인간처럼 하품을 해 본 캐롯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말하자 주변의 병사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호호, 오리가 꽥꽥대는 것 같은데? 리즈넷, 리즈넷 하는 것만 알아듣겠다.”
“못 알아듣는다고 그렇게 깔보듯이 말하는 건 좋지 않아.”
“응? 왜? 여긴 악의 소굴 아냐?”
뒤를 돌아본 캐롯이 크랭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얼굴 앞에 창날이 오락가락하는데도 크랭크는 대수롭지 않은 듯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다.
모여든 구경꾼들의 얼굴과 표정, 입고 있는 옷차림새, 위생 상태, 가지고 있는 물건, 그것들로 이룩해낸 문명과 생활…….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던 크랭크가 고개를 돌리고 앞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지옥에도 아침은 온다지.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아직은.”
“이히히히! 그래, 아직은!”
사나운 얼굴의 병사들은 두 사람의 반응에 어이없어했다. 보통은 창이나 칼을 들이대면 두려워하기 마련인데, 갑작스레 찾아온 이방인들은 전혀 위축되어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말이 통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가?
외지인 주제에 너무 당당해서 살짝 화가 난 병사들이 누군가를 재촉했다. 잠시 후 그들은 전통 의상을 입은 피부가 하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인지 병사들의 대우가 정중했다.
크랭크는 너무 커서 올려다봐야 했기 때문에 눈을 내리깔고 고압적인 표정을 한 그녀가 바라본 것은 캐롯이었다.
“리즈넷 사람인가?”
“끼이이이요오오오오오오옵! 언니! 리즈넷 말할 줄 알아!? 해외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다니! 이 압도적 반가움에 나는 몹시 흥분!”
흥분한 캐롯이 소리를 꽥꽥 질러대자 주변 사람들이 귀를 막고 얼굴을 찌푸렸다.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크랭크가 되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리즈넷 사람인가?”
자신만만한 표정의 여자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랬지만 지금은 아냐. 나는 사이퍼즈 대귀족 아드미르 가문을 모시는 자다. 보아하니 방탕한 모험가 같은데, 예의를 갖추어라!”
여자가 목소리를 높이자 눈을 크게 뜬 캐롯이 입을 다물었다. 크랭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도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놀랍군.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모험가 크랭크, 이쪽은 내 조수 캐롯, 당신은?”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조그만 아이가 조수라고? 리즈넷의 모험가는 예나 지금이나 악마들뿐이구나! 리넨 케이티브 제이칸!”
사이퍼즈 말로 외치자 병사들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무장을 빼 들었다.
그때였다.
캐롯이 휙 하고 뛰어오르더니 여자의 등에 달라붙어 팔과 다리로 그 몸을 옭아맸다. 가녀린 그녀의 목에는 날카로운 나이프가 들이대어졌다.
“걱정해줘서 고마운데 나는 오토마톤이야. 앙!”
캐롯이 여자의 귀를 살짝 깨물자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이 틈에 크랭크도 배낭에서 개조된 4연장 마력 엔진을 꺼내 들었다.
“이건 당신들이 산 너머로 보낸 하드 스킨 오토마톤의 마력 엔진이다. 이게 폭발하면 마력수정폭탄 수준의 화력을 내지.”
듣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질려 버렸다.
“대귀족 아드미르 가문의 책임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투구를 돌린 크랭크가 낮게 말했다.
“통역.”
* * *
인질로 잡은 여자의 이름은 호미르, 사이퍼즈에 온 지는 5년 쯤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알고 오토마톤을 보냈어? 아니, 오토마톤은 어디서 났어?”
“흐, 흥! 가르쳐 줄 것 같으으으응으으……!”
혀로 날름날름 귀를 핥아버리자 호미르가 거북이처럼 목을 집어넣으며 듣기 힘든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캐롯.”
“대답 안 하니까. 와, 그런데 신기하다. 귀가 그렇게 간지러워?”
앞서서 걷고 있는 호미르의 등에는 여전히 캐롯이 달라붙어 있었다. 긴장한 병사들에게 경계를 받으며 그들은 돌산 안쪽으로 안내되었다.
놀랍게도 마을의 본체는 바위산으로, 수 세기에 걸쳐 돌벽을 깎아 내부에 마을을 만들어놓았다. 바깥의 오아시스 주변 마을은 상점이나 창고 같은 것들이었다.
마치 던전의 미로 같은 돌산 마을을 한참 걸어서 도착한 곳은 넓은 방이었다.
그 중앙에 카펫이 깔린 곳에 흔들의자가 놓여있고, 노파가 앉아서 한가롭게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소식이 전해졌을 만도 한데 주변에는 아무런 경호도 없었다.
애초에 무장한 이방인을 선선히 마을 안으로 들이는 것도 크랭크는 신기하게 여겼다.
그릇이 큰 것인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가?
힐끔 방 안을 살핀 크랭크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넓은 방의 벽에는 예의 그 하얀 오토마톤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오토마톤 보관 창고인가? 놀랍군! 이렇게 많이……!”
“어디서 났는지 빨리 말해! 츄릅츄릅! 날름날름!”
“꺄으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