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악취미!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간 크랭크는 스크롤을 찢으며 저편의 입구를 가리켰다.
“파이어 볼.”
쾅-! 와르르륵!
폭발에 돌무더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리 거리를 재어놓고 무너진 길이를 측정해 수첩에 적어놓은 크랭크는 동료들을 이끌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나갔다.
그 와중에 갈림길에 캐롯이 그려놓은 그림도 지워버리고 다른 방법으로 표식을 남겨두었다.
크랭크의 작업을 구경하던 캐롯이 별안간 입을 열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어.”
“왜?”
“어제 같은 일은 사양하고 싶거든? 나는 불쌍한 사람들이 헤매지 말라고 해놓은 건데 말이야.”
작업을 마무리한 크랭크가 배낭을 짊어지고 몸을 일으켰다.
“남의 밭에서 농작물을 훔치면서도 물에 떠내려가는 아이를 살리려고 뛰어드는 게 사람이다. 복잡해. 그런 걸 구분하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뜬 아리에테가 저 멀리 무너진 동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바깥의 저 사람도 복잡한가?”
“가자.”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말고 가르쳐 줘라!”
크랭크가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가슴에 붙이고 있던 라이트 구슬을 떼어 투구 밑에 들이댔다. 빛이 위로 솟아오르며 괴기스러운 양철 가면이 완성되었다.
“아리에테,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이지 않나? 세상은, 신은, 어느 쪽을 구할 것인지 말이야.”
난데없는 이야기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리에테의 얼굴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으흐억……!”
노예상 대모의 일이 우연이 아님을 떠올린 아리에테는 눈앞의 양철 거인이 너무 끔찍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은인,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등을 돌리는 대신 화를 내기로 했다.
“그래서, 그래서 놓아준 거였나? 죽음의 문턱에서 악당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너는 정말…… 악취미로군!”
라이트 구슬을 다시 가슴에 붙인 크랭크가 몸을 돌렸다. 분명 저 투구 안에서는 히죽 웃고 있을 것이다.
그때 캐롯이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나는 저 투구 때문인 것 같아. 맨얼굴을 드러내고 다닐 때는 안 그랬어.”
“뭐? 정말로?”
“가만 보니까 말이야. 사람은 자기 얼굴이 드러나지 않으면 생각보다 대담해지더라고?”
아리에테는 생각에 잠겼다.
“음, 일리가 있다.”
앞장서서 걷고 있던 크랭크가 그들에게 손짓했다.
“근손실 나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서두르자. 늦으면 밤에 도착할 것 같다. 오가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는군.”
“그래, 나는 꼭 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따져보고 싶다. 일단 여길 나가서 보자.”
아리에테가 롱소드를 뽑아 들고 크랭크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캐롯이 선두로 뛰어나가며 외쳤다.
“아하하! 갈 때는 좀 빠르게 가자!”
“알았다!”
“훅훅!”
던전에서 달리기를 시작한 그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마을로 돌아간 그들은 기다리고 있던 구스타프를 만나 내부 구조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돌아 나오는 길에 조금 둘러봤는데, 중앙의 큰 동굴이 대로라고 보면 주변으로 골목길이 퍼져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익숙해지면 그다지 어렵지 않겠던데요.”
“나는 잠깐 이 금화의 정체를 알아보고 와야겠어. 그 공주가 오거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좀 기다려 달라고 하게.”
캐롯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 마니마니는 어떻게 됐어요? 풀어주셨어요?”
타고 온 자동 마차로 걸어가던 구스타프가 고개를 돌렸다.
“그 친구는 요즘 참고인으로 불려 다니느라 바빠.”
“엥?”
그 말대로 그란은 인신매매 사건의 중요참고인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드워프 연합, 엘프 장로회를 거쳐 지금은 수도 리즈넷의 경비대장을 포함한 높으신 분들의 앞에서 알고 있는 사건의 개요와 증언을 하는 중이었다.
“심문으로 얻어낸 정보와 자의적으로 하는 말은 신뢰성의 차이가 있거든? 그걸 대조하는 중이지. 걱정 말거라. 일 끝나면 약속대로 풀어줄 거니까.”
“속죄의 시간이네요.”
“그렇지, 말 잘했다. 하여튼 갔다 오마.”
구스타프의 자동 마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배웅하던 캐롯이 고개를 돌렸다. 크랭크가 손을 흔들고 있다가 시선을 마주했다.
“왜?”
“우리 언제까지 여기 있어?”
좀 생각하던 크랭크가 대답했다.
“곧 투나가 올 거다. 약초와 상비약 제조 방법을 알려주고, 공주님께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그다음이 복귀야. 자세한 건 공주님이 도착해야 알 수 있겠군. 그래 봐야 한 달 이상 걸리지 않을 거야.”
캐롯이 빵긋 웃었다.
“응, 계획은 항상 중요하거든?”
“그건 맞아.”
* * *
개척민 마을로 변모한 난민촌의 사람들은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구출해준 은혜를 갚겠다며 잔류를 희망한 드워프들의 지휘 아래 벌목한 나무를 옮겨와 가공해서 목재를 만들고 다시 그걸로 집을 짓고 생필품도 만들었다.
저녁 시간, 마을 공동 조리장 앞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청년들은 다들 지쳐서 후줄근해졌지만 앞으로 살아갈 터전을 갈고 닦는다는 사실에 다들 표정만은 해맑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모여 앉은 일꾼들 사이로 드워프도 끼어있다.
“이놈들은 사막에서만 생활해서 그런지 목재 다루는 솜씨는 형편없군.”
“네놈들 그래 가지고 잘 살아가겠느냐?”
고디브가 통역하자 모두 알아듣기 힘든 말을 떠들어대며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캐롯 덕분에 최근 마을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손짓이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웃고 있는 얼굴과 저 손짓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슬쩍 끼어 앉은 크랭크가 말했다.
“도움 주신 자동 베틀이 아주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혼자서는 힘들었거든요.”
“이 친구들 밥벌이까지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군.”
핏 웃어버린 드워프는 쌓아놓은 야생 열매를 와구와구 씹다가 말했다.
“선의로 도와주는 건 지금 만들고 있는 것들뿐이야. 유지보수는 따로 돈 받을 거다.”
옆의 드워프도 끼어들었다.
“그리고 구스타프 어르신 말대로 여기서 면직물이 대량 생산 된다면 우리에게 구매 우선권을 줘야 해 알겠나?”
크랭크는 슬쩍 고개를 돌려 고디브를 보았다.
“……라고 말씀하시는군요.”
“물론입니다. 이렇게나 도움을 주셨는데요. 당연합니다. 우리는 여러분께 의리를 아는 사람들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의리.
좋아하는 말을 들은 드워프들이 씩 웃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생활 기반 정도를 돌봐주고 철수하려던 그들이었지만 우연히 크랭크가 만들고 있던 자동 베틀과 난민들 대부분이 대대로 면직을 짜는 일을 해왔다는 말을 듣고는 생각을 바꿨다.
우리 드워프도 이제 조금씩 동굴 밖을 나가야 해. 언제까지고 저 귀쟁이 놈들에게 휘둘릴 수는 없어.
구스타프의 말을 되새기며 마을에 체류 중인 일곱 난쟁이가 소리쳤다.
“어이! 밥은 아직이냐?!”
“늦으면 한 번 더 냄비를 훔쳐서 똥물을 내려 주겠……!”
퍽퍽퍽!
“네 놈은 곧 밥 먹는데 그게 할 소리냐?”
등짝을 얻어맞은 드워프가 삿대질을 했다.
“아니, 이놈이! 이놈들 똥으로 만든 화약으로 네놈들을 구한 것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만 찬양하고 엉덩이 사이에서 나오는 걸 무시할 셈이냐?!”
화약!?
크랭크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투구가 재빠르게 돌려졌다. 몇몇 모험가들의 눈도 무섭게 빛났다.
“화약은 똥으로 만듭니까?”
서로 멱살과 수염을 붙잡고 레슬링을 하던 드워프들이 크랭크의 물음에 찡그린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그만 입을 다물었다.
드워프 브래디가 말했다.
“이봐 양철 거인, 그건 궁금해 하지 마. 까딱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 거야. 귀쟁이 놈들은 귀가 커서 냄새를 잘 맡거든?”
드워프들은 진지했다. 그들의 성향을 알고 있던 크랭크는 못내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식사! 밥!”
사이퍼즈의 여자들은 대체로 조신함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강요받을 뿐, 사람의 성격은 천차만별, 자유를 찾아 고향을 버리고 이국의 땅으로 뛰쳐나올 정도의 선택을 한 여자들은 강인했다.
머리를 틀어 올리고 두 팔을 걷어붙인 사이퍼즈 처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새로 산 커다란 냄비를 내려놓았다. 더불어 빵과 숲에서 따온 야생 과일도 잔뜩 가져왔다.
리즈넷 방식의 스튜에 사이퍼즈 전통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것으로 이 나라 모험가나 드워프, 사이퍼즈 난민 양쪽 다 좋아했다.
“다행이야 잘 먹네.”
앞치마를 두르고 마을 공동 조리장에서 고개를 내민 캐롯이 와구와구 식사 중인 일꾼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임시 요리장을 자처한 캐롯은 새로 개발한 요리가 잘 팔리자 도움을 준 처녀와 아낙들에게 빵긋 웃어주었다.
“그런데 왜 다들 내 곁에 있는 거지?”
조리장에 마련된 식탁에는 여성 모험가들과 신관들이 앉아서 식사 중이었다.
스튜 그릇에 밀가루 반죽으로 구운 빵 비슷한 것을 찍어 먹던 아리에테가 유독 주변에 몰려 앉은 사이퍼즈 여자들을 둘러보았다.
주변 여성 모험가들은 흐뭇하게 웃으며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거나, 혹은 약간 위험한 표정을 지었다.
“우후후, 보기 좋네?”
“와, 아리에테, 인기 많네요? 살짝 부럽다는?”
“흑장미 속의 백장미! 이것은 그림이에요! 그림!”
“허억! 배, 백장미 여 기사라는?! 호옥! 혹!”
이제 안으로 들어온 캐롯이 손바닥을 부딪치며 말했다.
“맞아, 고디브가 그랬는데, 사이퍼즈 전설에 하얀 피부를 가진 여신들이 나오는데 하나는 자애와 치유의 신이고 하나는 투쟁과 전쟁의 신이래.”
옆자리에 바싹 붙어 앉은 소녀의 머리를 좀 쓰다듬어준 아리에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같이 듣고 있던 여성 모험가들이 재잘댔다.
“그러고 보니 아까 비타랑 쏘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걸 봤어요! 신기하더라는!”
“와, 그런 전설이 있었대요?”
“그런데 두 사람은 어디 갔지?”
“숙소에서 기절했어요. 요 며칠 신력 풀파워 사용 중이라서.”
“아아.”
아리에테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뭐냐? 비타와 소냐는 치유의 신이고 나는 전쟁의 신인가? 그 정도로 대단한 일을 해주진 못했는데.”
“자신을 낮추지 마. 넌, 그 사람들을 구해줬다고. 그래서 어때? 신성시되는 기분은?”
다들 입을 다물고 그녀를 보았다. 주위를 둘러본 아리에테는 우러러보는 검은 눈망울을 보고 헛기침을 좀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 뭐 나쁘진 않구나.”
“오오! 그밖에는?”
“뭔가 알 수 없는 책임감이……!”
갑자기 인상이 확 바뀐 아리에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캐롯의 고개도 휙 돌려졌다. 조리장 안팎으로 이상을 감지한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들려?”
“이게 무슨 소리야?”
“뭔가 온다. 크고 무거운 것이!”
철컥! 착!
식당을 뛰쳐나가는 아리에테의 머리로 투구와 마스크가 장착되었다. 서둘러 밖으로 달려 나가자 이미 마을 공터에 베누스가 롱소드를 뽑아 들고 굳게 닫힌 통나무 대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곁으로 모험가들이 속속 도착했다.
쿵…! 쿵……!
방호벽 때문에 밖이 보이지 않자 드워프들이 성을 냈다.
“감시탑도 하나 만들어야겠어!”
“그걸 지금 말해 무엇 하냐! 이놈아!”
땅바닥에 귀를 대고 있던 모험가가 말했다.
“뭔가 크고 무거운 것이 다가옵니다. 방향은 정문! 숫자는 하나? 어? 멈췄습니다!”
정말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뒤를 이어 나무를 부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쾅-! 콰직! 쾅! 콰작?!
충격을 받은 방호벽이 흔들린다. 굵은 통나무를 엮어 만든 대문이 들썩이며 칼날 같은 것이 언뜻 보인다. 그때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간 모험가가 기겁했다.
“몬스터가 아니야! 중장갑! 하드 스킨 오토마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