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무지개!
치이익……!
갑자기 수송선의 문이 열리더니 멋진 제복에 망토를 걸친 엘프 여자가 걸어 나왔다.
6년 전과 하나도 바뀌지 않은 로나였다.
드워프와 함께 서 있는 거인을 알아본 로나는 가볍게 뛰어서 달려오더니 좀 떨어진 곳에 섰다.
“크랭크? 크랭크가 맞나요?”
살아있는 그녀를 보고 감격한 크랭크는 투구를 잡았다가 아쉬움에 그만 손을 내렸다.
“맞습니다. 6년 전 스테인에서 당신들의 서포터로 일했던 그 크랭크입니다. 미안합니다. 얼굴을 보여드릴 수는 없군요. 저에겐 저주가 걸려있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로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손! 맞군요! 그 크랭크로군요! 다행이에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저야말로, 다행입니다. 아, 그렇지. 당신이 만나보셔야 할 사람이 또 있습니다.”
크랭크는 고개를 돌리고 캐롯의 이름을 불렀다. 데려온 사람들을 인솔하던 조그만 인형이 달려왔다.
“왜? 나 지금 바빠.”
크랭크가 손가락으로 곁에 선 엘프를 가리켰다. 엘프 여자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던 캐롯의 얼굴이 확 하고 밝아지더니 그녀의 앞으로 뛰어들어 외쳤다.
“우왁! 로나?! 로나야?!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던 로나가 기겁했다.
“설마? 루루? 루루예요?! 케인의 서포터 인형?!”
무릎을 꿇은 로나가 떨리는 눈으로 기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캐롯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로 놀라움과 충격이 동시에 번졌다.
“대체 어떻게?”
그녀가 바라본 것은 양동이를 뒤집어쓴 크랭크였다.
“6년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수송선으로 자리를 옮긴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로 6년 전의 이야기들이었다.
“겨우 그 괴물을 쓰러뜨렸는데 케인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저도 나오면서 봤어요. 고마워요. 시신을 바로 잡아주셔서.”
로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유품에 문장이 있어서 다행히 가문에 돌려줄 수 있었지요.”
“역시, 전주인님을 대신해 감사드려요. 아, 그럼 나 이제 웰메인에 찾아가도 상관없겠네.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니까.”
의자에 앉은 캐롯은 현대식 함선의 내부를 구경하고 있던 크랭크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웰메인 백작가에서 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 어쩌지?”
“너는 웰메인 가문의 구성원이었던 케인의 사망으로 관리원의 입회하에 정식으로 양도받은 내 소유다. 절대로 돌려줄 수 없어.”
“으히히!”
캐롯이 좋아라 웃는다. 그걸 보고 있던 로나가 방긋 웃었다.
“놀랍군요. 정말 놀라워요. 겨우 6년 지났을 뿐인데. 정말 사람처럼 되어버렸어요. 루루, 아니, 캐롯.”
“뭘요. 다 주인님을 잘 만난 덕이죠.”
크랭크를 바라보던 로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6년 전,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던 건데. 당신을 한번 안아보고 싶군요.”
“프리 허그 타임!”
자리에서 깡총 뛰어내린 캐롯이 로나에게 다가가 두 팔을 벌리고 덥석 안겼다. 눈을 감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옛 기억을 회상하던 로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느낌이군요. 왜 그때 안아보지 못했을까.”
“지금이라도 안아봤으니 됐지요. 우왕! 엘프는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습하습하-!”
로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캐롯의 말에 그녀가 크게 웃어버렸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비슷한 추억에 잠겨 있던 크랭크가 구스타프를 슬쩍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희 이야기를 듣고 확인 차 오셨다고요.”
“예, 구스타프 씨가 협조를 요청하는데 당신 이름이 나오더군요. 혹시 싶어서 와봤지요.”
“이제 모험은 그만두신 겁니까?”
로나는 쓰게 웃었다. 정말 쓴 것을 삼킨 얼굴이었다.
“나이를 잊어버릴 정도로 오랜 시간 살아왔지만, 그래도 친구들의 죽음은 벅차더군요.”
“잘하셨습니다.”
끈기 있게 기다리던 구스타프가 끼어들었다.
“그거 말고도 할 이야기가 많잖아?”
여전히 캐롯을 끌어안은 로나가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리즈넷에 공식적인 항의가 들어갔어요. 한동안 시끄러울 거예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여러분들은 이곳에 잠시 머무르며 개척민 마을을 돌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분이 오실 때까지.”
“그분?”
“쥬세페 공주가 산맥의 동굴 조사차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육로로 오고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지만요.”
“왜 그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공주가 여기 개척민 마을 사람들을 리즈넷 국민으로 선포할 예정이거든요? 당신이 보낸 보고서가 큰 힘을 발휘했어요. 그리고 저쪽의 내란이 진정된다면 여기는 장차 교역 도시로 가꿔질 가능성이 깊어요. 예의 그 관통굴도 있으니까.”
크랭크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국가 간 이권에 얽힌 것도 그랬고, 자신이 올려 보낸 보고서를 어째서 엘프 로나가 알고 있는지도 신경 쓰였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공주님이 오실 때까지 개척민 마을 돌보기, 이렇게 알아들으면 되겠습니까?”
“맞아요. 더 궁금한 것은 없나요?”
크랭크는 투구를 흔들었다.
“관심 없습니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로나는 빙그레 웃었다. 마주 씩 웃던 구스타프도 거들었다.
“이런 인간들만 있으면 훨씬 재미있지 않았을까?”
로나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 * *
이튿날 마을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과 앞으로의 방침이 정해졌다.
팔짱을 낀 구스타프가 말했다.
“자네들 나라 국왕이 똥줄을 타고 있어. 인신매매에 관련된 자들의 조사와 처벌이 이어지고 있지.”
고개를 돌린 구스타프는 난민 대표로 나와 있는 고디브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네들은 아마 여기 국민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커.”
그들은 환호했다.
이 와중에 현장 조사차 왕립 조사단이 오고 있다는 말을 들은 모험가들은 단장이 제3왕녀 쥬세페 공주라는 말을 듣고 체류를 결정했다.
“공주님이라니! 한번 뵙고 가야지!”
“그래!”
“잘하면 출셋길 열리는 거 아니에요?! 크랭크!”
크랭크는 투구를 흔들었다.
“저는 입신양명이니, 출세니,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 꿈을 좇는 모험가는 돈만 받으면 됩니다.”
“음,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게, 내가 압력을 넣어서 특별 사례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놓지. 우리 동족들은 물론 여기 있는 사람들을 구해준 게 다름 아닌 자네들이잖아?”
문득, 모험가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드워프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쑥스러워하는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구스타프가 외쳤다.
“복잡한 이야기는 이걸로 됐어! 궁금한 게 있으면 따로 내게 찾아와. 자, 오늘 할 일은 뭔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수첩을 펴든 크랭크가 말했다.
“엘프들의 수송선이 돌아오면 방호벽을 새로 지어야 합니다. 다음은 차후 식량으로 쓸 작물의 추천과…….”
비타를 포함한 신관들이 외쳤다.
“약! 상비약이 시급해요! 원래 살던 곳과 달라서 이 사람들이 아는 약초가 여기에는 없어요.”
“음, 그거라면 전문가가 있으니 초빙하지요.”
가만히 듣고 있던 캐롯이 고디브를 올려다보았다.
“봐봐, 우리가 이마만큼 해주는데, 당신들은 뭘 해줄 수 있어?”
사이퍼즈에는 미남미녀가 많은 편이었다. 고디브도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웃는 얼굴이 대단히 멋졌다. 어느 정도냐 하면 비타를 포함한 여성 모험가들이 매번 얼굴을 붉힐 정도로.
“우리는 고향에서 대대로 방직을 해왔습니다. 여기서도 그걸 해보려고 합니다. 질 좋은 카펫과 옷감을 만들 수 있습니다.”
모여 있던 드워프들이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양철 거인의 부탁으로 자동식 베틀을 만들어봤다. 맨손으로 하는 것보다 10배는 빠르지.”
“오오우! 뭔가 밑천이 잡혀가는 것 같지 않은데? 다들 잘됐네!”
고디브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의 수송선이 도착하자 토목공사가 시작되었다. 먼저 자재를 조립해서 방호벽을 만들면 그걸 수송선이 들어서 지면에 안착시키는 것이었다.
상의를 벗어 던지고 불끈불끈한 근육을 드러내고 일을 돕던 모험가 에이플이 크레인 역할을 하는 수송선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저건 대체 어떻게 떠 있는 거지?”
“저도 물어봤는데 기밀이라고 하더군요. 그보다 당신, 꽤 좋은 몸을 하고 있군요.”
역시 웃통을 벗어 던진 크랭크가 그를 바라보자 씩 웃은 에이플이 포즈를 취했다. 그러자 크랭크도 지지 않고 자세를 잡으며 난데없는 근육 자랑이 시작되었다.
수송선에 지시를 내리던 구스타프가 꽥 소리를 질렀다.
“일이나 해! 이놈들아!”
방호벽이 거의 제 모습을 갖춰질 때쯤, 크랭크는 보리스와 코비, 제임스를 불렀다.
“투나를 데려오라고요?”
크랭크는 편지를 하나 내밀며 말했다.
“약초에 통달한 약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임스 씨는 가족도 있는데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걱정하실 테니 복귀하시는 것이…….”
“그런 건 걱정하지 말게, 보시게, 지금 마을 하나를 만들고 있어. 내 평생의 술 안줏거리를 빼앗지 마시게. 잠깐 얼굴만 보여주고 다시 오면 될 일이야.”
“그래 주시면 저희야 좋습니다만.”
제임스는 기쁘게 웃었다.
“사실 나도 공주님을 뵙고 싶거든? 그때 청동문 조사단장으로 오신 그 공주님이지?”
“그렇다더군요. 수도에서 여기까지 꽤 오래 걸리니 어쩌면 오는 길에 함께 도착할 수도 있겠습니다.”
“서두르세!”
짐을 챙긴 제임스는 출발을 서둘렀다. 크랭크는 그들의 호위로 로테를 붙여주었다. 떠나가는 자동 마차의 모습을 바라보던 아리에테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내 대무 상대는 누가 해주지?”
“내가 해주마.”
“오! 정말인가?”
“그 전에 공사부터 마무리하자. 너는 베누스와 함께 주변 순찰을 다녀와라.”
“음! 알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점점 제대로 된 마을의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방주 도시의 그것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개척민 마을 치고는 준수한 방호벽이 완성되자 사람들이 크게 안심했다.
그 덕에 여유가 생긴 캐롯이 심심하다는 이유로 괭이질로 밭뙈기를 일구기 시작했다.
퍼퍼퍼퍽!
“이야아아압!!”
지켜보던 사람들이 입을 딱 벌렸다. 그때까지도 캐롯을 보통 아이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반으로 가른 감자를 넣고 물을 주는 거지. 아, 우물도 하나 더 있어야겠는데?”
감자밭을 마무리하고 삽과 곡괭이를 챙겨 든 캐롯은 우물도 하나 파주었다.
“우오오오오!”
푹푹퍽퍽퍽!
수맥 찾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나왔다가 눈을 의심케 하는 삽질에 점점 땅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캐롯을 지켜보던 드워프들이 저마다 감상평을 내놓았다.
“광산에서 쓰는 오토마톤 같지 않아?”
“그렇군.”
꽤 큰 우물 구덩이 안쪽에서 캐롯이 고개를 들었다.
“와? 드워프는 오토마톤 써요?”
“음, 쓰지. 광산 개척용으로 딱 너만 한 녀석들을.”
“오오!”
잡담을 나누며 한참 파고들어 가다가 결국 수맥을 터트린 캐롯은 온천처럼 터져 나오는 물줄기를 타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푸화아아악!
“우오오옥?!”
쏴아아아!
뜨거운 봄 햇살을 식히는 시원한 물방울이 하늘에서 쏟아지기 시작하자 갑작스레 비가 오나 싶어 손을 펴보던 에이플의 머리 위로 캐롯이 떨어진 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빡-!
“후누욱?!”
“호곡?!”
괴상한 비명과 함께 두 사람이 쓰러지고 청명한 마른하늘에서는 비가 내리며 동시에 무지개가 펼쳐졌다. 사막이 고향인 사람들에겐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라 다들 일을 멈추고 서서 개척민 마을에 드리워진 무지개를 구경했다.
그 무지개 사이로 머리에 혹이 난 모험가가 연신 깔깔거리는 꼬마 인형을 붙잡고 악을 써댔다.
“얌마! 너는!”
“와하하! 무지개! 무지개야! 저 끝에 보물이 숨겨져 있대!”
아직 말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모습만은 참 재미있게 보여서 다들 고개를 돌리고 쿡쿡거리며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