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광기!
몸을 돌린 크랭크는 단검을 뽑아 들고 걸어가더니 대모의 손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그리고 마을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가시오.”
모두가 놀라운 표정을 했다. 고디브의 통역을 들은 난민들이 분통을 터트렸지만 크랭크는 무시했다.
“당신의 처지 따위 내 알 바 아니오. 다만 그 원한의 깊이와 사실을 실험해보고 싶군. 나가시오. 쫓지 않겠어. 당신이 가진 원한과 당신을 향한 원한 어느 쪽이 더 깊은지 알아봅시다.”
손목을 매만지며 피식 코웃음을 지은 대모는 순식간에 늙어버린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마을 밖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 중에 드워프 하나가 외쳤다.
“이봐! 저대로 놔줄 참인가?! 우리가 얼마나 모진 짓을 당했는데!”
크랭크가 몸을 돌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바가 있으면 알아서 하십시오. 다만, 이 근방 숲속에는 몬스터가 우글거립니다. 혼자서 나가는 걸 추천하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크랭크는 이제 바닥에 주저앉아 멀어져 가는 노예상 대모를 바라보는 늙은이를 힐끗 쳐다보았다가 그만 고개를 돌렸다.
피곤한 몸과 지친 마음을 추스르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모닥불가에 모여 식사를 하던 사람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앞으로의 방침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전날 저녁 아리에테와 그녀가 데려온 사람들을 돌보면서 대략적인 사정을 전해들은 크랭크가 말했다.
“소문으로만 들리던 것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군. 판을 좀 키우면 재미있겠어.”
그렇게 말하며 아리에테를 슬쩍 쳐다보는 크랭크였다. 되레 불안해진 그녀가 물었다.
“너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직 아무 말도 안했다.”
식사를 위해 모여 앉은 사람 중에는 새로 합류한 모험가들도 있었다. 방주도시 듀칼리온에서 왔다는 파티의 리더 에이플이 입을 열었다.
턱수염에 사자 갈기 같은 머리모양을 한 남자로 키는 보통이었지만 그 어깨너비는 크랭크와 견줄 정도였다.
“한가한 일이라 생각하고 왔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군요.”
“빠지려면 지금입니다?”
크랭크의 말에 에이플이 도전적인 시선으로 씩 웃었다.
“농담도, 저희도 돕고 싶습니다. 흐흣! 노예 상인을 때려보고 싶습니다.”
호쾌한 리더를 선두로 모여 앉은 파티 멤버들이 저마다 고개를 내밀고 히죽 웃고 있다.
저녁 늦게까지 사람들의 상처 입은 몸을 돌보았던 비타가 내내 궁금했던 것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말이에요. 드워프나 엘프들은 자기 동족들이 이런 대우를 받는데도 가만히 있어요?”
모두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여 있는 모험가들 중에서 최연장자인 크랭크가 입을 열었다.
“전에 함께 일했던 드워프 분께 비슷한 질문을 한 적 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길…….”
크랭크의 이야기는 모두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멸망시킬 뻔 했다고요?”
“저, 그 이야기 들은 적 있어요. 거의 200년 전 일이라고 하던데.”
에이플 파티의 여성 마법사 하나가 손을 들고 말했다. 크랭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족들의 불상사에도 그들의 윗선이 움직이지 않는 건 자기들이 나서면 또 그때 같은 일이 생길 거라는 우려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문제는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합니다. 그건 엘프도 마찬가지고요.”
말을 마치고 투구를 돌린 크랭크가 근처에 서 있던 베누스를 바라보았다.
“야간에 특이사항은? 캐롯에게서 연락은 없었나?”
“특별히 없었습니다.”
딱딱한 빵을 물에 게워 떠먹던 보리스가 말했다.
“나라면 이사 갈 거야.”
“자세히 말해봐라.”
아리에테가 고개를 돌리자 후르릅 그릇을 비운 보리스가 이제 건육을 씹으며 말했다.
“같은 영업을 뛰던 옆집이 털렸고 주인도 납치당했는데 당연히 다음은 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겠어요? 빨리 남은 재고를 털어서 현찰을 확보한 다음 한동안 조용히 지내는 거지.”
역시 보리빵을 물에 말아놓은 것을 떠먹던 비타가 말했다.
“와, 역시 나의 신도! 봐요, 내 덕이죠?”
신전의 교리나 설법 대신 재미있는 추리 소설을 잔뜩 빌려다 주변에 권유하던 명탐정 비타가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그 첫 번째 희생자 보리스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인정할게, 허구의 이야기지만 솔직히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그런 어설픈 이야기도 도움이 된다고 봐. 그야, 결국 사람이 적은 거잖아. 누가 말했지? 상상력은 무기라며?”
“하는 짓은 어차피 비슷하니까 말이지?”
코비가 거들었다. 그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 아리에테가 닫혀 있는 목책 대문을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캐롯이 가져올 정보는.”
“확실히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요격을 준비해야겠어.”
그릇을 손에 들고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에이플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 싸움입니까? 노예 상인을 때려 볼 수 있는 겁니까?”
“당신은 때리는 걸 참 좋아하는 군요.”
코비의 근육을 3배 정도 더 키운 몸을 한 에이플이 사납게 웃었다.
“악당을 때리는 것이 뭐가 나쁘죠?”
“그건 동감입니다. 호출이 있기 전까지 어제와 마찬가지로 주변 탐색과 조사 임무를 병행해 주십시오.”
식사를 마친 에이플과 그의 동료들은 드넓은 숲속을 뒤지고 다니며 노예 사냥꾼을 견제하고 숨어든 난민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개척민 마을로 탈바꿈한 곳에 사람들을 모아놓은 크랭크가 목소리를 좀 키우더니 말했다. 고디브는 통역을 위해서 함께 섰다.
“리즈넷에는 개척민 마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흉악한 몬스터와 생존경쟁을 벌이고 그 땅을 개척하여 사용할 수 있는 토지로 바꾸는 역할입니다.”
잠시 뜸을 들인 크랭크가 그들의 가슴을 울리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니 여러분에게도 희망은 있습니다.”
“으우아아아!”
고디브가 통역을 마치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확 밝아지며 환호를 지르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뜬 목소리를 내려버려 둔 크랭크는 이제 오도카니 앉은 하얀 피부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여러분들은 저희가 철수할 때 믿을 만한 도시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그곳에서 가족이 있는 분들은 가족에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적당한 마을에 이주시켜 드릴 겁니다. 당분간 참아주십시오.”
각지에서 납치되거나 팔려와 앞으로 펼쳐질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던 사람들이 고마워했다.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크랭크가 지시했다.
“그러니 할 일이 많습니다. 오늘도 나무를 베어 자재를 만들고 건물을 세웁시다. 사람이 많아졌으니 식량 확보도 중요합니다.”
그때 사이퍼즈 처녀 하나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그녀의 말을 들은 고디브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드워프들이 식량을……!”
서둘러 달려가 보니 정말 개척민 마을 안쪽에 세워진 식량 창고를 드워프들이 점거하고 훈제시켜놓은 고기며 각종 나무 열매 같은 것을 와구와구 훔쳐 먹고 있었다.
“움움-! 맛있다! 맛있어!”
“이런 게 뭐가 맛있냐! 이따위 것은 연료다! 나는 살기 위해서 먹고 있다! 음음!”
찌이익! 쫘악! 으적으적!
세 마리 짐승 같은 꼴인지라 창고 앞에 몰려선 사람들은 망연자실하게 그 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크랭크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어깨를 축 늘어뜨린 크랭크가 중얼거렸다.
“드워프의 먹성과 집념을 들어보긴 했지만 말입니다. 실제로 보니 가공할 만하군요.”
폭식 중인 드워프들이 무서운 눈을 들고 버럭 외쳤다.
“무! 이놈들아! 뭘 보느냐!?”
그때 한 청년이 외쳤다. 요즘 고디브와 오토마톤 베누스에게 리즈넷 말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것! 우리! 물건! 식량! 전부! 없다! 안 돼!”
짤막한 단어의 나열이었지만 의미 자체는 전달되었다. 창고를 점거한 드워프들은 입에 집어넣고 씹어 삼키는 것이 많을수록 몸의 근육이 쑥쑥 늘어갔다.
그중 하나가 웃으며 외쳤다. 씹고 있던 음식물이 마구 튀겨 올라서 처녀들이 오만상을 구겼다.
“무허허허! 누가 모르느냐! 좀 빌리는 거다! 움움움! 맛있구나!”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챈 청년들이 분노하여 그들을 끌어내려고 했으나 크랭크가 말렸다.
뭘 하든 투구를 벗지 않는 이 기묘한 거인은 그 투구를 흔들고 있었다.
“식사 중인 드워프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차라리 식량을 다시 마련하는 것이 빠릅니다.”
고생하며 저장한 식량 창고가 거덜 나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보게 된 청년들은 우거지상을 하고 있다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은 사냥을 좀 해 와라. 주변에 몬스터를 잡아 와. 고디브, 몇 명 붙여 주십시오.”
베누스와 로테를 선두로 개척민 마을의 가장 용감한 청년들이 나섰다. 사냥을 떠나는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크랭크는 간단하게 지붕만 올린 작업장에서 만들고 있던 것을 쳐다보며 투구를 매만졌다.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군.”
“저건 뭐냐?”
내내 졸졸 따라다니는 아리에테가 물어오자 크랭크가 대답했다.
“여기 처녀들이 의뢰한 퀘스트다. 직물을 짜는 베틀인데, 본적도 없고 만들어 본 적도 없어서 애먹고 있었다. 드워프라면 자세히 알까?”
“음, 그래서 그냥 내버려 뒀군?”
“그래, 드워프는 의리가 있다. 그건 됐고, 모여 봐라. 작전을 짜자. 계획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다.”
그 와중에 기어코 식량 창고를 거덜 낸 드워프들은 이제 개척민 마을을 돌아다니며 얼마 없는 생활용품을 훔쳐 가기 시작했다.
“아악! 안 돼! 안 돼!”
커다란 냄비를 눈앞에서 도둑맞은 사이퍼즈 처녀가 울상을 지었지만, 드워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동화장실로 뛰어가더니 그곳의 분뇨를 냄비에 막 퍼 담기 시작했다.
그걸 보자마자 냄비를 강탈당한 처녀는 그만 까무러쳐버렸다.
“우움! 네놈들은 똥이 굵고 아름답구나!”
“꺄아아악!”
화장실에 앉아 있다가 드워프가 똥을 퍼가는 것을 보고 기겁한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개척민 마을에서 분탕질을 친 드워프들은 이젠 드워프 공방이 되어버린 식량 창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가버렸다. 항의도 통하지 않자 결국 크랭크가 다시 불려왔다.
그들의 만행을 전해들은 크랭크가 문 앞에 서서 점잖게 말했다.
“대체 뭘 하시는 겁니까? 가져가신 것을 돌려주십시오. 이곳은 물자가 많이 부족합니다.”
안에서는 뭘 하는 것인지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쓰고 돌려줄게.”
“엘프들은 괜찮은가?”
연이어 들리는 드워프의 목소리에 크랭크가 대답했다.
“예, 하지만 몸이 말이 아니라서 신관께서 보살피고 계십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드워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까 자네들 이야기 들었어. 그 말이 맞아, 어르신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밖에 나가지 말라는 데도 꿈과 모험을 좇아 뛰쳐나왔으니 사고를 당해도 우리가 알아서 해결해야만 해.”
“그렇다! 어설픈 놈들과 비교하지 말아라. 내 똥구멍은, 내가 닦을 것이다! 모욕을 되갚아주지 않으면 나는 화병으로 죽을 거야!”
“이 고얀 놈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울분이 잔뜩 실린 드워프의 격앙된 목소리에, 마을의 생활용품을 수집하여 들어간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한 크랭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뭘 만들고 있는 겁니까?”
복수심에 사로잡혀 눈이 돌아간 드워프의 웃음소리가 나무판자 사이로 흘러나온다.
“크크크크……!”
“으흐흐흐!”
“맛을 보여주겠어. 못된 인간 놈들이 우리를 화나게 했다. 다시는 그런 못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마.”
크랭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드워프들이 누구인가. 천부적인 기술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다. 논리적인 기술자는 미치지 않지만 미친 기술자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짜릿한 분노와 광기가 기술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