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난민촌! (2)
다들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비타가 뒤늦게 외쳤다.
“남자? 저 애 남자예요?! 세상에! 저렇게 예쁜데?!”
“어, 그 자식들이 말하는 걸 들었는데, 사이퍼즈 애들은 어릴 땐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된다더라. 맛만 좋으면 그만이라던데. 다행히 아무 일 없이 구출했…….”
퍽퍽!
“내 귀에 이상한 소릴 집어넣지 마요!”
“아오! 내 참! 상황 보고도 걸러서 들려줘야 해?!”
그때 마을의 대표로 보이는 청년이 다가왔다. 일전 구스타프에게 구출되었던 남자였다. 이름은 고디브.
“제 이름은 고디브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당신들 사이퍼즈 사람들이지? 여기 몇 명이나 있나?”
남자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임신한 여자들뿐입니다.”
아리에테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썹이 솟아오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팔을 뻗은 그녀가 남자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서슬 퍼런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라고? 너, 뭐라고 했지?”
“아리에테.”
아리에테는 눈이 돌아가 있었다. 팔을 펼쳐 크랭크의 말을 막은 그녀가 고디브를 노려보았다. 거친 숨소리가 꺼림칙하다고 고디브는 생각했다.
“말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해! 넌 지금 이상한 말을 했다!”
아리에테의 일갈에 울상이 된 고디브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민들이 몰려들어 마을 비슷한 것을 꾸리게 되었는데 인근의 모험가나 산적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더니 돈과 사람을 잡아갔다는 것이다. 대체로 젊은 여자와 아이들을…….
아리에테의 눈이 돌아갔다. 그녀는 마을 살폈다. 허우대 멀쩡한 젊은 남자들도 꽤나 있었다.
“이렇게나 많으면서! 왜 막지 못했냐! 부끄럽지도 않아?! 싸웠어야지!”
사람들은 리즈넷 말로 외쳐대는 아리에테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불안한 표정만을 지었다.
하지만 고디브는 달랐다. 말을 알아듣는 그는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부끄럽습니다. 지금도.”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는 그를 보고 아리에테가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캐롯이 그녀의 진정시키기 위해 다리를 철썩철썩 때렸다.
그리고 지오의 파티가 들으라고 말했다.
“여기, 이 가여운 사람들을 봐봐. 제대로 된 무기나 병기가 있었다면 그게 무서워서라도 상황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야. 세상의 평화는 사람의 마음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거든?”
보고 있던 크랭크가 아리에테의 손을 잡았다.
“그만 놔줘라. 그 사람의 상황도 이해해라.”
입을 꾹 다문 아리에테는 순순히 그의 말을 들었다. 크랭크가 고디브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질문에 대답하시오. 비슷한 난민촌이 더 있습니까? 다들 어떻게 온 겁니까? 정말 산을 넘어서 온 겁니까?”
“아니요. 우리는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그 외에는 동굴을 지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크랭크가 투구를 들이밀었다.
“엘프? 동굴?”
고디브가 입을 다물었다. 아뿔싸 싶은 얼굴이다. 가만히 그를 보던 크랭크는 협박하는 대신 제임스를 돌아보았다.
“다들 영양상태가 좋지 못하군요. 먼저 이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합시다.”
“허허허, 괜찮겠나? 나야 시키는 대로 할거지만.”
난민들을 힐끗 돌아본 크랭크가 지오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구슬리는 방법은 협박과 고문 말고도 많습니다. 먹을 것의 위대함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제임스는 으허허 웃으며 요리 준비를 시작했고 캐롯, 베누스, 로테는 사냥을 나갔다.
잠시 후, 난민촌 입구에서 난데없는 대규모 바비큐 파티가 벌어졌다.
“음, 냄새 좋다. 냠냠.”
코비가 맛깔나게 구워진 사슴 고기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피란길을 나서는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사람들이 저마다 침을 삼키며 모여들었다.
커다란 냄비 앞에 선 크랭크가 국자를 들고 고디브를 보았다.
“사이퍼즈 말로 그릇이 뭐요?”
사이퍼즈 사람들도 그에게 뭐라고 말을 해댔다.
양측 사람들의 사이에 서서 망설이고 있던 고디브가 결국 입을 열었다.
“델카.”
사람들의 눈이 커지더니 움막으로 달려가 그릇을 들고 왔다. 크랭크는 그것에 제임스 특제 스프와 구운 고기를 담아주었고, 사람들은 너무도 고마워했다.
커다란 솥과 바위 불판을 바쁘게 오고 가며 고기를 굽고 스프를 떠주던 제임스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보기 좋군그래, 일단 먹어야 힘이 생기지.”
국가 간의 사이가 어떻든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좁혀진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오랜만에 따뜻한 식사를 하면서 훌쩍이거나 우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고디브가 그들을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데 국자를 든 크랭크가 이제 그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델카.”
고디브는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을 숨기기 위해 애를 썼다. 겨우 밥 한 끼 대접받은 것뿐인데, 그동안 보아왔던 무뢰배 같은 자들의 행패 때문에 작은 선행을 베푸는 이 사람들이 성인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사람들의 얼굴로 행복감이 떠올랐다.
그들은 유일하게 리즈넷 말을 할 줄 아는 고디브에게 몰려와 저마다 말을 전했다.
“다들 감사하답니다.”
“고마우면 질문에 대답해 주시오. 엘프의 도움과 동굴은 무슨 말입니까? 혹시 저 산에 따로 길이 있습니까?”
교묘하게 본색을 드러내는 크랭크의 질문에 고민하던 고디브는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말을 통역했다.
그러자 몇 사람이 뭐라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와! 말이 달라. 신기하다.”
캐롯이 대뜸 끼어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쏠렸다. 히히 웃은 캐롯이 말했다.
“어때요들? 배가 부르니 좀 살 것 같죠? 다들 꼬박꼬박 먹고 싸야 해서 불편하겠네.”
사람들이 조그만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난민 중에는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도 있었지만 캐롯은 그 아이들과 표정부터가 달랐다. 어딘지 모를 자신감, 오만이 몸짓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 캐롯을 보고 입을 열었다.
“미디 칸데 오토마타?”
“오토마타? 사이퍼즈 말인가 보네? 맞아요. 나는 오토마톤.”
허리를 숙인 캐롯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더니 사람들의 눈앞에서 그걸 바스러뜨렸다.
크랭크가 고디브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동굴은 어디에 있습니까?”
크랭크의 넘겨짚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고디브가 대답하기 전에 캐롯의 행동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외쳤다.
시끄러울 지경이라서 고디브가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뭐래? 갑자기?”
“음, 나는 네 행동을 보고 힘의 차이를 느끼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르게 보였나 보다.”
“그렇네. 다들 희망에 찬 표정이야.”
팔짱을 하고 있던 보리스가 말했다.
“난 알겠는데, 불쌍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나눠줄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 무력도 가지고 있으니 이제 잡혀간 사람들을 구해달라는 거지. 당연한 순서 아니야? 그런데 우리가 거기까지 해줄 필요가 있어요?”
“물론 없습니다만, 정당한 대가가 따르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지요”
찾는 사람이 많아서 스프를 다시 끓이던 제임스가 허허 웃어버렸다. 보리스의 예측은 들어맞아서 고디브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잡혀간 사람들의 구출을 원합니다.”
협상을 위해서 앞으로 나선 크랭크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닙니다. 솔직히 목숨을 걸고 나설 필요는 없지요.”
고디브는 입을 다물었고, 분위기상 사람들도 조용해졌다. 그러다 크랭크가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우리는 모험가입니다. 돈이 된다면 비공식 의뢰도 받지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나설 수도 있습니다. 통역하시오.”
크랭크의 말에 고디브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성인을 보는 것 같은 그들의 얼굴은 크랭크의 말을 듣고 엉망으로 구겨졌다. 그중에는 불만을 토로하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캐롯이 하하 웃는다.
“봐봐, 배고프면 짐승이 되었다가 배부르면 사람이 된다니까? 참 신기하지?”
보리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손가락으로 캐롯의 정수리를 가리켰다.
“누가 이 시니컬한 꼬마 인형 좀 닥치게 해봐.”
“음. 실례했다.”
아리에테가 앞으로 나서더니 캐롯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몸에 갑옷을 두른 번쩍이는 금발 여 기사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므하하하! 하지만 걱정 마! 우리가 당신네 눈물을 대신 닦아 줄게! 대신, 알지?”
아리에테의 팔에 매달린 채 눈을 찡긋한 캐롯이 엄지와 검지를 붙이고 나머지 손가락을 펼쳤다.
만국공통어로, 돈을 말하는 것이었다. 캐롯의 그 손 모양을 보고 늙은이 하나가 움막에서 묵직한 보따리를 들고 왔다.
깜짝 놀란 고디브가 무어라 외쳤지만 늙은이는 완강했다.
“호옥! 뭐야? 돈이야?”
“아, 아니요. 이것은.”
크랭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느긋하게 말했다.
“꼭 돈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현물도 받습니다.”
펼쳐진 보따리 안에서 나온 것은 단단하게 뭉쳐놓은 나무 잎사귀 같은 것이었다. 늙은이가 거친 음성으로 말했고, 고디브가 통역했다.
“잡혀간 사람 중에 어르신의 며느리, 손자와 손녀가 있습니다. 구출을 원하십니다. 찾을 수 없다면 잡아간 자들의 목을 원합니다.”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크랭크가 굵은 손가락으로 풀 잎사귀 덩어리를 가리켰다.
“그건 뭐니까?”
“카타, 사이퍼즈의 귀족들이 기호품으로 사용하는 마약입니다. 씹으면 대단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이!”
국자를 내던진 제임스가 눈을 부릅뜨고 달려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타 덩어리 앞에 무릎을 꿇은 제임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세! 이건 해야 해! 자네들, 이게 얼마나 하는 줄 아는가?!”
항상 사람 좋게 웃는 제임스가 흥분한 모습을 처음 본 비타가 중얼거렸다.
“아저씨. 좀 무서워요.”
“어, 아니. 나도 모르게 그만. 어흠!”
자리에서 일어나 헛기침을 한 제임스가 크랭크를 바라보았다.
“카타, 자네들이 가끔 마시는 그 용기의 물약, 각성 포션의 원료야. 사이퍼즈에서만 나는 거지. 중독을 막으려고 순도를 엄청나게 떨어뜨린 걸 포션으로 유통하고 있는 거지. 시세는 잘 모르겠지만 저 정도면 억 단위야.”
모두가 입을 벌렸다.
캐롯은 이 정적을 놓치지 않고 괴성을 내질렀다.
“호우~! 예!”
하고 싶은 것이 생겨서 요즘 돈이 꽤 궁했던 크랭크는 그들의 의뢰를 받기로 했다.
“자세한 이야기랑 동굴의 위치 알아낸다며?”
“그런 건 좀 천천히 물어봐도 될 것 같다. 아리에테.”
캐롯을 다시 내려주고 팔짱을 하고 있던 아리에테가 고개를 돌리자 크랭크가 말했다.
“네게 일임하지. 잡혀간 사람들을 찾아와라. 우리는 이 사람들을 도우면서 마저 조사하겠다.”
“호오, 정말로? 내 성격을 알고서도 그렇게 말하는 건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크랭크가 말했다.
“안전장치로 캐롯을 붙일 거다. 너도 파티를 이끌었던 리더였다니 따로 이래라 저래라 하진 않겠다. 로테, 지오, 코비를 데려가라.”
보리스가 외쳤다.
“나는 왜 빼요?!”
“당신은 저 아리에테와 성질이 비슷해서 그렇습니다. 날뛰는 정의의 멧돼지는 하나면 충분합니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던 비타가 깔깔거리며 놀려댔다.
“와하하! 거봐요. 보리스는 성질 죽여야 한다니까?”
“끄으음-!”
캐롯이 아리에테의 치마를 잡아당기더니 말했다.
“아리에테, 남동생 생겼네? 보리스도 너랑 비슷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지.”
서로 시선을 마주한 아리에테와 보리스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붉혔다.
“으으음! 자중! 자중하겠다.”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