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택배!
그제야 몸을 돌린 보이드 자작이 청사로 들어갔다.
각 부처 사무실이 잔뜩 늘어선 건물 내부에선 많은 사람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는 얼굴도 몇 있었다.
“보이드 아저씨!”
“여기서는 제1궁정 마법사로 불러주십시오.”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붉은 색안경을 끼고 말끔한 정장에 지팡이를 짚은 노신사의 앞으로 화려한 금발에 바지를 입은 제3왕녀 쥬세페가 다가왔다.
오랫동안 보아왔던 사이인지라 서로를 말 안 듣는 꼬마와 옆집에 사는 고집쟁이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들으셨습니까? 사이퍼즈에 내란이 발생했습니다.”
“극동에서 그런 건 아침 인사 같은 거 아닙니까? 그나저나 귀족원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분명 거기 제3왕자가 공주님께 혼담을 보내온 것을 아주 긍정적으로 보던데 말입니다.”
도도한 쥬세페 공주의 얼굴이 상큼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 혼담을 웃기지 말라고 엎어버린 것이 눈앞의 보이드 자작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상황을 설명했다.
“믿어지십니까? 그 제2왕자 하만 사이퍼즈가 화약 병기로 무장하고 정부군을 몰아세우고 있답니다.”
쥬세페 공주의 이야기를 들은 보이드 자작은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외무부 장관과 귀족원의 실무진들이었다.
“화약 병기는 어디서?”
“병사들을 무장시킬 정도의 본격적인 물량은 엘프들이 허가하지 않으면 유통이 어렵습니다. 아마 그쪽 작품이겠지요.”
“굳이 화약 병기까지 손에 쥐여 줄 필요가…….”
말을 하다 말고 보이드 자작이 입을 다물었다. 이건 함부로 입 밖에 내뱉기엔 너무 위험한 생각 같았다.
“요리를 하려니 재료가 너무 적군. 우리 측 정보국 요원들도 파견했겠지?”
“물론입니다. 더불어 국경선 인근 도시의 모험가들에게도 정보 수집을 의뢰해두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보이드 자작은 문득 크랭크의 말을 떠올렸다.
조금 거들어 줄까.
“야생의 모험가들이 그런 걸 제대로 할 수 있나? 제대로 배운 것도 없을 텐데, 글이나 알지 의문이로군.”
“네임드 모험가들은 꽤 믿을 만합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몇몇 사람들이 거들자 보이드 자작은 마지못해 안심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리 그 친구들을 교육 시켜서 이럴 때 현지 요원으로 써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됐고, 다른 궁정 마법사들은 어디 계신가? 국왕께 안건을 보고 하기 전에 입을 좀 맞춰놔야지.”
리즈넷 제1궁정 마법사가 걸음을 옮기자 그 주변으로 몰려든 많은 사람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한편, 극동 사막 지역 사이퍼즈는 지금 난리가 아니었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 사방에서 비명과 총소리와 폭음이 멈추지 않는다.
탕탕! 쾅-!
“으아악!”
“아악!”
“캬오오옥! 화르르르륵!”
사람을 등에 태우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입에서 불을 뿜는 와이번도 간간이 보였지만 그것들은 지상에서 날아드는 수십 발의 포격에 맞아 공중에서 폭발해버리거나 격추되어 떨어지기 일쑤였다.
콰아앙! 뻐어엉!
나무 하나 없는 바위산에 올라서 돌덩이에 다리를 올리고 팔짱을 낀 구스타프가 저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가전을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등 뒤에는 꽤 많은 사람이 바쁘게 오고 가며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거나 구출한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다.
“준비됐습니다!”
따가운 햇볕을 피해 후드를 뒤집어썼지만 튀어나온 귀는 그가 엘프임을 알리고 있다.
그 목소리를 듣고 구스타프가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이 어찌나 살벌한지 사람들이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바위산의 공터에 모인 사람들을 죽 둘러보던 그가 말했다.
“구출대는?”
“전원 복귀했습니다.”
구스타프가 굵은 손가락을 들어 커다란 도마뱀이 끄는 짐마차에 오른 현지인들을 가리켰다.
“저놈들은? 내 과녁인가?”
축 늘어뜨린 오른손이 은빛으로 빛나는 대형권총 부근에서 흔들거린다.
짐마차에 타고 있던 아이와 여자들이 겁에 질려 무시무시한 얼굴의 드워프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그와 함께 무기를 실어 나른 엘프들이 그들을 가리고 나섰다.
“현지 협력자들입니다. 저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사로잡힌 동족들을 구출하지 못했을 겁니다.”
여차하면 허리의 권총을 뽑아 들 것 같은 그를 말리기 위해 엘프들은 물론 구출된 사람들까지 나섰다.
“구스타프, 그러지 말게. 자네가 참아. 우릴 도와줬어.”
몰골이 말이 아닌 드워프 늙은이가 손짓하자 고개를 돌린 구스타프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그게 뭐요. 그놈들은 밥도 제대로 먹이지 않고 일을 시켰소?”
“흐흐흣……. 그래도 우린 나은 편이지. 엘프들은 더 심한 꼴을 당했어.”
빈사 상태로 치료를 받고 있는 엘프들을 돌아본 구스타프가 이빨을 꽉 깨물었다.
사이퍼즈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노예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영하는 나라였다. 그것은 자국민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나라 사람은 물론 다른 종족도 해당하였다.
특히 이종족 노예들은 큰 인기를 끌었다. 그중에서도 손기술이 좋은 드워프나 용모가 아름다운 엘프들은 사이퍼즈에서 비싸게 거래되고 소모되었다.
이런 몰지각한 제도 때문에 주변국은 물론 타 종족과의 관계는 엉망이었고, 항의나 협박도 듣고 흘리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나라가 너무 크고, 부족 단위의 유목 생활이 사회의 근간이 되는지라 갑자기 나타나 국왕이라고 떠드는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줄 리가 만무했다.
과거에는 전쟁으로 버릇을 고쳐놓으려 했던 적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물밑으로 오고 가는 무역 거래가 커서 상회에서 반대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었다.
인간들의 입장도 그렇지만, 엘프 장로회나 드워프 연합 측에서도 의외로 이런 일에 수동적이었는데, 애초에 그들과 엮이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뛰쳐나가기 때문에 일족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그런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정기적으로 납치된 동족들을 구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구스타프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 모였으면 이제 탈출한다. 좀 더 있다간 나도 저기 뛰어들고 말겠어. 사람들과 물자를 마법진으로 옮겨.”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여 완성된 마법진 안으로 마차와 물자들을 옮겼다. 작업이 마무리되자 술사인 엘프 청년이 스크롤을 찢으며 크게 외쳤다.
“워프!”
칭-!
순식간에 그들의 시야가 바뀌었다. 사방에 녹음이 가득한 숲속이었다. 엘프들과 드워프들은 당장 한숨을 내쉬었고, 따라온 현지 협력자들과 가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주머니에서 신호탄을 꺼낸 구스타프가 그걸 위로 들고 줄을 당기자 푸른 빛 구슬이 솟아오른다.
퉁-!
빈 통을 휙 던져버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자네들 대표는 누군가? 우리 말 할 줄 아나?”
사이퍼즈 민족 특유의 갈색 피부색을 가진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할 줄 압니다.”
젊은이를 힐끗 쳐다본 구스타프가 따라온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안전지역으로 옮겨주기로 했다지? 그럼 여기까지야. 알아서 잘살아보도록 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청년이 물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리즈넷 동부 국경선 부근의 웨일즈 본 산맥 아래쯤 되겠군. 저기, 보이나? 저 산 너머가 사이퍼즈지.”
구스타프가 팔을 뻗어 국경선 역할을 하는 웨일즈 본 산맥을 가리켰지만 남자는 그 산을 보지 못했다. 거대한 공중수송선이 나타나 산을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쿠우우우-!
“왔어! 왔어! 이제 집에 가는 거야!”
“어흐흑……!”
여행 중에 납치당해 갖은 고역을 치른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뜬 수송선을 바라보았다.
비틀 비틀거리며 일어난 드워프 하나가 도움을 준 사이퍼즈인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마차에 올라앉은 소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묘리나, 고맙구나. 건강해라. 나는 지금 인간이라면 뜯어먹을 정도로 미운데, 눈앞의 너희들에게만은 은혜를 느끼고 있다. 이상한 기분이야.”
“드디어 노망이 든 게지! 어서 갑시다. 집에 가서 맥주랑 고기를 뜯으면서 이야기나 좀 들어보자고.”
구스타프가 닦달하자 고생에서 벗어난 그는 킬킬 웃더니 울고 있는 소녀 묘리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착륙하는 수송선으로 걸어갔다.
그들만 오도카니 남겨둔 채…….
* * *
청동문을 통해 아르곤 광장에 도착한 캐롯은 두 손을 들어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우리 동네가 역시 최고야!”
그 뒤에서 크랭크가 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한 건 없는데 뻐근하구나. 가서 좀 쉬자.”
“모험은 언제 나가지? 일은?”
허둥대는 아리에테를 돌아본 크랭크가 말했다.
“너는 바람 부는 갈대밭의 그것 같군.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흔들리지.”
캐롯이 그 말을 받아서이었다.
“하지만 뿌리가 깊어서 부러지지 않아. 지금의 너처럼, 느긋하게 가자고. 인생은 길어.”
“아니, 말이 자꾸 바뀐다. 전에는 100년만 지나면 다 녹아서 하나가 될 거라며? 너희와 대화하면 몹시 피곤하다. 왜 그런 거냐?”
“그건 네게 상식과 유연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공부는 그다지 잘하지 못했나보군.”
크랭크를 선두로 다시 한번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진심으로 분노한 아리에테는 롱소드를 검집 채 들고 그를 추격했다.
“서라! 너는 내게 모욕감을 줬다! 나는 이래 보여도 기사 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했어! 엘리트란 말이다! 사관학교 추천장도 여럿 받았었다! 자꾸 바보 취급하지 마라!”
분노한 아리에테 덕분에 순식간에 공방에 도착했다.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녀가 중얼거렸다.
“허억! 헉……! 시온, 어째서 크랭크를 따라잡을 수는 없는 것이냐? 우리는 대화가 필요하다.”
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크게 한숨을 내뱉은 아리에테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랭크가 공방의 문을 열자 투나가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 오오오! 어서와우오옥!”
철퍼덕!
도도도 달려 나오던 투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상자에 걸려 또 넘어져 버렸다. 이젠 한심한 기분마저 들기 시작한 크랭크는 다리를 잡고 바닥을 굴러다니는 투나에게 걸어가더니 그 발을 살펴보았다.
“발가락을 찍었나? 바닥 청소는 하고 있지만 맨발로 다니지 마라.”
“끄우오우오오…! 아파! 아파……!”
“내가 호, 해줄게, 호오-!”
캐롯이 다가와 투나의 찍힌 발가락을 보더니 호호하면서 숨결을 불어 넣었다. 고통에 겨우면서도 그걸 보면서 으흐흣 웃기 시작한 투나는 캐롯의 머리를 조금 매만져 주었다.
크랭크가 바닥에 떨어진 상자를 들어보다가 말했다.
“이건 뭐냐?”
“이게 다 뭐야?”
공방 안으로 들어선 아리에테의 말이었다. 투구를 든 크랭크는 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말을 잊고 말았다. 안 그래도 잡동사니 때문에 좁아지기 시작하는 공방에 같은 모양의 상자 수십 개가 곳곳에 쌓여 더 좁아 보였다.
앞치마를 두른 샤를이 상자를 들고 걸어왔다.
“떠나시고 다음 날부터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들은 전부 머리카락입니다.”
“머, 머리카락?”
샤를이 편지를 하나 내밀었다. 모험가 길드 마스터의 직인이 찍힌 편지였다. 그것을 읽어보던 크랭크의 어깨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동화책을 읽고 감동한 사람들이 머리카락을 잘라서 보냈다는군. 부디 자기 머리카락으로도 오토마톤의 방열 가발을 만들어주길 바란다면서.”
캐롯이 좋아라했다.
“와-! 한동안 우리 머리카락 걱정 없겠다!”
“이래서 유명해지고 싶지 않았던 거다. 고마운 민폐가 쏟아지지.”
투나가 으히히 웃으며 말했다.
“그, 그럼 내가 좀 써도 돼? 여자 머리카락은 조, 좋은 재료가 되는데.”
“그건 안 된다. 이걸 잘라서 보내준 사람들의 마음을 져버릴 수는 없다.”
“오, 오우. 로, 로맨티스트.”
캐롯이 거보라는 듯이 흐뭇하게 웃었다. 상자 하나를 열어 안의 머리카락을 살펴보던 아리에테가 물었다.
“그럼 이것들을 여기 그대로 두는 건가?”
주변을 둘러보던 크랭크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아무래도 너무 많으니 따로 창고를 하나 더 빌려서 보관해야겠다. 몇 개나 되지?”
“오늘 온 것까지, 57개입니다.”
“오늘? 계속 오고 있다는 거야?”
캐롯의 물음에 갑자기 공방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실례합니다. 우편국에서 나왔는데요. 택배입니다.”
“네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