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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인형 오토마톤-114화 (114/329)

114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내기 장기!

가늘게 뜬 눈동자마저 황금색으로 물든 캐롯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빨을 드러낸 잔인한 미소였다.

“선수를 허락하지. 망설이지 말고 덤비거라, 용사여. 이 몸이 짓밟아주겠노라.”

“허호! 뭐가 뭔지 모르겠다만, 호기롭구나.”

마주 웃어버린 보이드 자작이 장기 말을 붙잡았다.

착착착착!

초반은 재빠르게 서로의 장기 말이 옮겨 다녔다. 하지만 30분이 지나자 이동 속도가 줄어들면서 방 안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이거 왜 이래? 여기 좀 덥지 않아?”

“난방이라도 켠 건가? 이보시오. 난방을 줄여주시겠소?”

당황한 메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난방은 켜지 않았는데요?”

“그럼 이 열기는 어디서 오는 거지?”

치이이이……!

길게 늘어뜨린 캐롯의 방열 가발에서 후끈한 열기가 쏟아졌다. 모여든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마주 앉은 보이드 자작의 장기판은 궁지에 몰렸으나 그 붉은 색안경 너머에 비친 날카로운 눈은 너무도 즐거워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뛰고 있구나! 좀처럼 두근거릴 일이 적어진 내 가슴이! 내 심장이!

“클클클! 하하핫! 놀랍구나! 단 3일 만에! 크랭크, 자네 짓이지? 무슨 짓을 한 겐가! 멋지구나!”

칭찬으로 받아들인 크랭크가 가슴에 오른손을 대고 허리를 조금 숙였다. 슬쩍 든 투구에는 보이드 자작의 눈과 비슷한 광기에 물든 눈이 드러나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동원해보았습니다. 어떠신지요?”

장기 말을 들어 올린 보이드 자작이 금니로 때워진 이빨을 드러낸 채 웃었다.

“압도적인 마왕과 겨루는 기분이로다! 좋아! 실로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구나! 흐하하!”

“말이 많은 용사로다. 하지만 모르겠구나. 왜 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지? 그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착!

반쯤 뜬 눈을 한 캐롯이 장기 말을 판에 올리고 무심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장군, 그대는 다시 궁지에 몰렸다. 용사여, 어디 다시 한번 활로를 찾아보아라.”

말을 옮기기 전에 손을 까닥이자 대기하고 있던 오토마톤 메이드가 담배와 성냥불을 준비했다. 뻑뻑거리며 담배를 피워 문 마법사는 코와 입으로 연기를 뿜어내며 다음 수를 준비했다.

“활로는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손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오. 막아보시오. 마왕.”

탁!

용사의 수를 맞이한 마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를 이어 황금빛 머리카락에서 급격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며 작은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그 시선이 크랭크에게로 향했다.

“과과과열 주의주의주의, 추추추가 내내냉각이 피피피필요.”

빠르게 몸을 돌린 크랭크는 물 주전자를 가져와 캐롯의 머리에 부어버렸다. 그리고 찻잔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든 캐롯은 단숨에 입에 대고 들이켰다.

푸쉬후우화아아악-!

금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의 등으로 이제 폭풍 같은 날개가 뿜어져 나온다. 몇몇 사람들이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여신의 인형?”

담배 연기와 증기가 만들어낸 안개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깜짝 놀란 사용인들이 환기를 위해 창문과 문을 여느라 부산을 떨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흐릿한 세상의 장기판과 그것을 사이 놓고 앉은 마왕과 용사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을 한 용사와 황금빛 눈을 뜬 마왕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젠 장기판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가 침을 삼키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별안간, 캐롯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는 전에 나에게 물었지. 왜 인간처럼 되고 싶어 하는지.”

“오오, 그랬지. 대답이 준비되었나?”

안개 속 작은 여신의 인형이 장기 말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너희가 신을 이해하기 위해 그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은 것이란다. 나는 이해해보고 싶었다. 너희들을, 그래서 사랑한단다. 아이들아.”

마주 장기 말을 옮기던 보이드 자작이 귀를 의심했다.

잠깐 목소리가 바뀌지 않았나?

눈을 크게 뜬 보이드 자작이 시선을 들었다. 동시에 맞은편에 앉아서 흔들거리던 조그만 오토마톤이 앞으로 엎어졌다.

꿍-!

장기판에 머리를 처박은 캐롯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력이 떨어졌습니다. 마력석을 교환하여 주십시오. 마력이 떨어졌습…….”

“이런-!”

마력 엔진이 정지하자 캐롯의 작은 몸에서 피어오르던 황금빛 물결과 그 머리카락에서 멈추지 않고 뿜어져 나오던 열기도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대국을 보던 사람들도, 하던 사람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지켜보고 있던 크랭크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하얀 손수건을 꺼내 쓰러진 캐롯의 머리에 덮었다.

“졌습니다.”

보이드 자작을 비롯해 장기 동호회 사람들은 못내 아쉬운 얼굴을 했다.

과열로 오버 히트를 일으키고 쓰러진 캐롯은 점검을 위해 크랭크가 방으로 옮겨갔다.

대국은 아쉽게 끝났지만, 오랜만에 전체 모임을 가졌기에 다들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파티홀에 모여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시 인형들에게 아직 이런 복잡한 작업은 무리겠지.”

“내 생각은 달라. 이런 게임 자체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야. 그런데 왜 그렇게 헤매는 거지? 다른 일은 곧잘 따라들 하면서 말이야.”

“고려할 변수가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보브, 자네 생각은 어때?”

포도주를 병째로 들이키던 오토마톤 조립기사 보브가 얼큰하게 취한 얼굴을 돌렸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그가 말했다.

“음, 잘 모르겠는데?”

“크흣-! 어쨌든 인상 깊은 대결이었어. 놀라운 것을 봤다. 인챈트를 그런 식으로도 쓸 수 있다니.”

덜컹!

“안녕하세요!”

가발과 연상수정도 원래대로 되돌린 캐롯이 으헤헤 웃으며 파티홀에 모습을 드러냈다. 환하게 웃음 지은 사람들이 몰려와 머리를 쓰다듬거나 하며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이 꼬마 녀석! 그런 실력을 낼 줄이야. 대단했었어.”

“맞아, 리즈넷 장기 동호회 회장님을 상대로 말이야.”

“아저씨들이 가르쳐주신 덕이죠. 헤헤.”

방긋 웃음 지은 캐롯은 고개를 돌렸다. 보이드 자작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도도도 달려가 다시 맞은편에 앉은 캐롯이 말했다.

“고마워요. 자작님, 마력석 충전해주셔서.”

“음, 원래대로 돌아왔구나. 계속하겠느냐?”

장기판은 캐롯이 쓰러지기 전으로 다시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캐롯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거 너무 어려워요. 자꾸만 장기판 너머를 계산하려고 해서요. 멈출 수가 없었어요.”

“호오, 장기판 너머를 계산한다고?”

머리카락을 좀 매만지던 캐롯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장기판의 다음 수를 계산하다가 그걸 넘어서 자작님의 다음 행동, 다음 생각, 그 미래까지 계산하려고 했어요. 멈춰지지 않더라고요.”

“호오.”

지팡이를 짚고 있던 보이드 자작이 흥미로운 표정을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동호회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 다만 포도주병을 들고 있던 보브만이 인상을 찡그렸다.

미래를 계산해?

보이드 자작은 이제 곁에 서 있는 크랭크를 올려다보았다.

“자네, 이 녀석에게 뭘 했지? 인챈트 말고.”

“연산 수정도 증설했습니다.”

“그거 말고는 없나?”

“예. 없습니다.”

보이드 자작은 다시 캐롯을 보았다.

“놀랍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문 그가 이윽고 손을 내밀었다.

“잠깐이었지만 참 즐거웠다. 하지만 졌으니 소원은 이뤄 줄 수 없어. 대신 식사라도 많이 들고 가게.”

아리에테는 못내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크랭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튿날 일행들은 저택을 떠나기 위해 인사를 나누었다.

“벌써가?”

“응, 돈 벌어야지.”

어린 나이였지만 캐롯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다. 올코트는 이제 크랭크에게 인사를 했다. 예의를 차린 크랭크가 소년에게 마주 허리를 꾸벅이는 가운데 올코트가 말했다.

“또 와주세요.”

“수도에 들리면 그러겠습니다.”

지팡이를 짚은 채 그들을 바라보던 보이드 자작이 손짓했다.

“캐롯, 이쪽으로 잠깐 와 보거라.”

캐롯이 도도도 달려가자 무릎을 꿇은 메이드가 자켓의 옷깃에 별모양의 배지를 매달아 주었다.

“우리 리즈넷 장기 동호회 명예 회원 뱃지란다. 클럽 건물을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지.”

“오옥! 장기 클럽 자유이용권! 자작님 고마워요!”

두 팔을 들어 올린 캐롯이 환하게 웃었다. 그걸 바라보던 보이드 자작도 금니로 때워진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주었다.

“언제든 놀러 오시게, 당분간 자네들은 잊지 못할 것 같으니까.”

크랭크를 비롯해 일행들 전부가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작별을 고한 다음 저택을 나섰다.

자동승용차량의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멀어지는 수도 성벽을 바라보던 캐롯이 외쳤다.

“안녕! 리즈넷! 구경 참 잘하고 간다!”

“나는 그저 그렇다. 확실히 정리된 것은 없고, 앞으로 해야 할 일만 잔뜩 늘어난 기분이다.”

“그래도 길드의 팬들에게는 확실히 눈도장 찍지 않았냐.”

눈썹이 축 내려간 아리에테가 크랭크를 보면서 말했다.

“어쩐지 요즘 나를 막 대하는 것 같지 않나? 전에는 좀 더 조심스러웠던 것 같은데.”

“친해지면 원래 좀 그렇지 않아? 이게 꾸밈없는 크랭크의 모습이야. 겉은 차갑지만 가슴은 누구보다 따뜻한.”

캐롯의 말을 들은 아리에테가 별생각 없이 팔을 뻗어 그의 가슴을 만져보았다.

“음, 그런가? 딱딱하기만 한데. 으히익?!”

기괴한 움직임을 느끼고 깜짝 놀라 팔을 접은 아리에테가 크랭크를 올려다보았다.

움찔움찔.

커다란 가슴의 좌우가 번갈아 가며 움직이는 모습은 아리에테의 눈에는 너무도 끔찍하게 보였다.

퍽퍽!

“징그럽다!”

“아야, 아프다. 때리지 마라.”

* * *

오랜만에 가슴을 두근거리게 해준 친구들을 떠나보낸 보이드 자작은 그길로 마차를 타고 궁성에 출근했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 후임들에게 다 맡겨 두었지만 가끔은 얼굴을 비춰야 했고, 저번에는 있었던 습격 사건의 배후도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요즘 자주 나서는 중이었다.

여러 관문을 통과해 왕성에 도착한 보이드 자작이 마차에서 내려서자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대거 몰려왔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음, 특이사항 있나? 오늘 국왕 기분은 어떠신가?”

“어제 진상된 생굴 요리를 드시고 배탈이 나신 것을 제외하면 문제없습니다.”

“클클클-! 이젠 젊은 나이도 아니니 그런 건 그만 드시라고 누누이 말씀드렸거늘.”

보이드 자작이 지팡이를 짚으며 걸음을 옮기자 호위 겸 보좌관들이 그를 따라 걸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국왕이 기거하는 왕성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정부 청사였다.

“일전에 스승님을 습격한 자들의 신병이 확보되었습니다. 국내에 잠입해서 공작 중이던 사이퍼즈 간첩들이었습니다.”

“응? 그놈들이 왜 날 습격했지? 전쟁이라도 벌일 셈인가?”

보고를 하다 말고 어깨에 힘이 좀 빠진 젊은이가 입을 열었다.

“그 친구들은 마차 주인이 누군 줄 몰랐답니다. 그저 활동비 확보를 목적으로 강도짓을 벌였다고 하더군요.”

청사 건물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창을 세우고 인사를 했고, 문은 자동으로 열렸다.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 멈춰선 리즈넷 제1궁정 마법사 보이드 자작이 붉은 색안경을 낀 얼굴을 들었다.

“강도라고? 클클클-! 활동비를 현지 조달할 정도로 사이퍼즈가 돈이 없지는 않을 텐데?”

“어제 사로잡았습니다. 현재 리즈넷에 망명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망명? 보이드 자작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의 제자 호라이즌은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사이퍼즈에 내전이 발생하여 보급과 연락 체계가 엉망이 되었다고 합니다. 돌아가 봐야 싸움터를 전전할 게 뻔하니 그만두겠다고 하더군요. 수일 전에 분위기가 심상찮다고 경고하던 국경수비대장의 보고가 맞았습니다.”

“또 인가? 이번엔 누군가?”

“사이퍼즈 제2왕자 하만 사이퍼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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