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사방치기!
낄낄 웃은 보이드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척 걸치더니 말했다.
“국왕이랑 장기 친구라고 해도 일개 마법사가 국가사업을 막 추진할 수는 없어. 하지만 여기저기 이야기만은 떠벌리고 다닐 수 있지. 그것으로도 좋겠나?”
“충분합니다.”
보이드 자작이 씩 웃으며 무릎을 쳤다.
“좋아, 받아들이지. 다만 조건이 있어. 우리 동호회 사람들과 돌아가면서 대국을 해라. 져도 상관없어. 솔직히 지금도 꽤 괜찮지만 못 이길 정도는 아니야. 넌 훈련이 필요해. 나는 느려진 내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는 걸 또 느껴보고 싶구나.”
캐롯이 작은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한판 떠봅시다. 대마법사님.”
“클클클! 좋구나. 나를 두근거리게 만든 오토마톤은 네가 처음이야. 기대하마. 나를 몰아세워 보거라.”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여관방을 잡으러 나가려 했으나 방은 많으니 저택의 객실에 머무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에 곧바로 짐을 푼 일행들은 곧 저택에서 손님에게 허가된 곳을 마구 들쑤시고 다녔다.
대체로 캐롯이.
“으에하하! 올코트! 어디에 있냐!”
쾅-!
문을 박차고 들어간 캐롯은 책상에 엎드려 뭔가를 쓰고 있던 조그만 소년을 발견하고는 두 팔을 흔들며 다가갔다.
“놀자! 애들은 그게 일이지!”
“나 숙제 아직 안 끝났는데.”
눈을 부릅뜬 캐롯이 꽥 외쳤다.
“우리 주인님이 말했어! 수학을 잘하는 살인마는 필요 없대! 그것이 인류의 진보를 늦추게 될지라도! 가자, 해가 떨어질 때까지 놀자. 할 사람도 모아뒀어!”
캐롯의 손을 잡고 정원으로 끌려 나간 올코트를 맞이한 것은 저택 경비용 하드 스킨 오토마톤이었다.
나뭇가지를 주워 바닥에 그림을 슥슥 그린 캐롯이 외쳤다.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사방치기!”
손을 뒤로 돌리고 한쪽 다리를 든 채 깡충거리며 바닥의 그림 속으로 뛰어드는 캐롯을 보고 올코트는 정말 오랜만에 흥분과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도련님 간식……?!”
책상에 있어야 할 도련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언제나처럼 탐색과 추적을 개시하려는 찰나 괴이한 소리가 들려온다.
쿵-! 쿵-!
암살자처럼 창가의 커튼에 몸을 숨기고 슬쩍 밖을 내다보니 정원에 그림을 그려놓고 팔을 뒤로 돌린 채 망토를 휘날리며 뜀뛰기를 하는 하드 스킨 오토마톤과 그 주변에서 배를 잡고 웃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걸 보고 코를 벌렁거린 메이드 루이스가 주의를 주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저녁에 쓸 식자재를 옮기기 위해 밖으로 나왔던 주방의 사용인들은 치마를 들어 올리고 아이들과 함께 사방치기에 열중인 메이드 루이스를 보고 그만 웃어버렸다.
다음날은 시내에 있다는 장기 동호회 건물로 향했다.
“돈 많은 귀족들은 역시 다르구나. 단순 취미에 건물도 가지고 있네.”
“의외로 많다. 다들 자기 관심사에는 돈을 아끼지 않지.”
소개받은 건물의 2층 내부는 바와 바텐더까지 있는 술집처럼 보였는데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다들 진지한 얼굴로 장기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관리인 겸 바텐더가 다가왔다.
“여긴 회원이 아니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보이드 자작께 소개받고 왔습니다. 이거 소개장.”
크랭크가 편지를 내밀자 그걸 열어서 읽어보던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은 들였다.
잠시 그곳을 선점하고 앉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캐롯은 아침부터 얼큰하게 취한 남자의 앞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캐롯이에요.”
사내는 인사도 없이 장기 말을 움직였다.
“대국은 시작되었다. 오토마톤, 우리가 너를 단련시켜주마. 어디까지 하나 보자고, 연산부가 과열되지 않게 주의해라.”
캐롯의 귀여운 얼굴로 잔인한 표정이 스며든다.
“오토마톤을 도발하는 방법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나는 오토마톤 생산부서에 일하는 조립 기사다. 네놈들 구조야 눈감고도 알고 있지.”
휙휙착착!
장기 말들이 빠르게 오고 갔다. 잠시 후, 술 취한 남자는 바텐더에게 진한 커피를 주문했다. 그의 얼굴로 어이없는 웃음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 녀석, 꽤 하는데?”
1시간 후 남자는 패배를 시인했다. 남자도 놀라워했지만 캐롯도 놀라워했다.
“내가 이겼어?”
“오토마톤에게 지다니!”
구경하던 사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으로 나선 것은 콧수염이 멋진 남자였다. 그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장기 말을 움직였다. 그걸 보는 캐롯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오오옥!”
몇 수 나누지 않고 궁지에 몰린 캐롯이 절규했다. 콧수염 남자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함정을 팠단다. 여기에서 너를 이쪽과 이쪽으로 두도록 유도했지.”
“유도? 그게 돼요?”
“일종의 속임수지. 보통의 오토마톤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끌려 들어오게 된단다. 지금의 너처럼.”
캐롯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짱을 하고 옆에서 지켜보던 크랭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리에테는 담배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숨쉬기 힘들어했다.
대국은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오후에 접어들자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기 시작하더니 줄을 서서 캐롯과 장기를 두었다.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캐롯은 입을 헤벌리고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왕, 지금 눈앞에 장기 말들이 떠다니고 있어. 신기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미안하다. 정말 너희들에겐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도움만 받고만 있어.”
팔짱을 하고 있던 크랭크가 말했다.
“딱히 널 위해서 한 것이 아니다. 지금 대단히 구색이 좋은 상황이야. 나는 지금 이 기회를 이용해보려고 하고 있지. 네 안타까운 상황마저도, 오히려 욕을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다.”
“너는 같은 말을 해도 좀 듣기 좋게 할 수 없나? 그러면 내 마음이 기울지 모른다.”
크랭크의 무심한 시선이 말을 해놓고 부끄러워진 아리에테에게 향했다.
“놀랍군, 호박이 말을 하는데.”
“끄으으읏!! 크랭크으으으!”
퍽퍽!
보통 같으면 둘의 투닥거림을 구경하고 웃었겠지만, 지금의 캐롯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입력된 대량의 정보를 정리하고 장기 말의 예측 수를 계산하느라 캐롯의 머릿속 연산부는 과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어쨌든 첫날의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둘째 날부터 캐롯의 패배가 많아졌다. 그리고 셋째 날, 장기 동호회 회원 거의 전부와 대국을 마친 캐롯은 급격히 말이 적어졌다.
대국을 마치고 저택에 돌아온 후부터 가만히 앉아서 허공을 올려다본 채로 눈알만 대굴대굴 움직이는 모습은 괴기스러울 정도라 괜히 아리에테의 걱정을 샀다.
“캐, 캐롯?”
“정리 중이다. 건드리지 마라.”
호들갑을 떠는 아리에테에게 주의를 준 크랭크는 가만히 캐롯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의자에 얌전히 앉아있는 로테와 베누스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가능한 모든 수를 동원해보자.”
* * *
이윽고 약속의 날.
쏴아아아아!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봄비를 바라보는 아리에테의 얼굴에는 수심이 피어올랐다.
“내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있다니 회의감이 든다. 나는 이러려고 여기 온 것인가.”
“너는 네 할 일이 생겼을 때 나서면 된다. 뭣하면 여기 와서 좀 거들어라. 손이 필요하다.”
로테와 베누스를 침대에 눕혀놓고 그 머릿속을 살피던 크랭크의 부름에 아리에테가 다가갔다.
“헉?! 뭐 하는 거냐?”
아리에테의 손에 수건을 깐 소반을 올려준 크랭크는 핀셋으로 오토마톤의 머릿속에서 조그만 보석 같은 것을 뽑아냈다. 로테는 3개, 베누스에게선 4개가 나왔다.
“이게 뭐지?”
“연산 수정이다. 떨어뜨리지 마라. 충격에 약하다.”
자리를 옮긴 크랭크는 역시 가만히 누워있는 캐롯의 가발을 벗기고 소프트 스킨을 찢어 두부 장갑판을 열었다.
오토마톤의 머리 안을 처음 본 아리에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쁘다……!”
마치 보석 상자의 뚜껑을 열어놓은 것 같았다. 커다란 검정색 보석의 주변을 색색의 작은 수정들이 반짝이는 별처럼 모여 자리 잡고 있었다.
“빈자리가 거의 없군?”
크랭크의 어깨 부근에 얼굴을 바싹 들이댄 아리에테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들고 있는 소반에서 연산 수정을 조심스럽게 집어 든 크랭크는 캐롯의 머릿속 남은 빈칸을 마저 채워나갔다.
“잠깐, 크랭크. 캐롯은 연산 수정이 대체 몇 개나 되는 거지?”
같은 모양의 연산 수정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아리에테의 물음에도 크랭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립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촘촘한 보석들 사이의 얼마 없는 빈칸을 꼼꼼하게 채워 넣고 노트에 그림으로 표시까지 마친 그는 이제 캐롯의 머리를 닫고 소프트 스킨도 덮었다. 찢어진 소프트 스킨은 빠른 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이 기묘한 치유력을 부여한 투나에게 고마워하며, 크랭크는 방열 가발도 베누스의 것을 가져다 올렸다.
언제나 발랄한 빨간 포니테일 소녀가 롤이 들어간 초록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되자 조금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베누스의 것은 전부 방열사로 만든 것이다. 길이도 더 길고, 캐롯의 것보다 방열 성능이 더 좋을 거야.”
“이렇게 보니 캐롯은 인형이 확실하구나. 어쩐지 묘한 기분이다.”
잠든 캐롯을 내려다보며 크랭크가 말했다.
“눈을 뜨면 네가 아는 그 녀석이 아닐 거야. 놀라지 마라.”
“응?”
크랭크가 캐롯의 이름을 불렀다.
칭-!
캐롯이 눈을 떴다. 그리고 발딱 일어나서 앉았다. 아리에테가 다가왔다.
“캐롯? 나를 알아보겠나?”
눈을 반쯤 뜬 캐롯이 아리에테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스르륵 옆으로 쓰러져 누웠다. 만사 귀찮은 얼굴이 된 캐롯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자지 마라. 할 일이 있다.”
캐롯은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알고 있다. 나에게 대항할 용사는 준비되었느냐?”
놀란 아리에테가 크랭크를 보았다.
“캐롯이 아닌가?”
“맞다. 지금 연산기능이 한계선을 넘어서 인격이 약간 변한 것뿐이야.”
“약간이 아닌데?”
* * *
오토마톤과의 대국은 장기 동호회 사람들의 큰 관심사였다. 안전한 성벽 안에서 평범한 일상을 지내다 보니 사는 것이 지루해진 사람들은 가끔 색다른 청량감을 찾아 시간과 삶을 허비했다.
모험가들의 모험담이 그랬고, 장기와 같은 보드게임도 그러했다.
어쨌든 휴식과 오락도 일만큼 중요하다.
“겨우 3일 연습하고 자작님에게 이길 수 있을까? 그 조그만 인형은 나한테도 졌는데.”
“아냐, 그 녀석 다른 오토마톤하고는 좀 달랐어.”
“맞습니다. 그 꼬마가 버벅이는 이유가 앞의 수 몇 가지가 아니라 내 행동 자체를 계산하는 걸 알았을 때는 정말 소름이 돋았어요.”
“뭘 계산해? 말도 안 되는 소릴!”
“아! 나는 그렇게 느꼈다고!”
오늘은 취해 있지 않은 오토마톤 조립기사 보브가 비에 젖은 코트를 메이드에게 넘겨주고 저택의 복도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오토마톤이 멍청한 건 안전성을 위해서야. 연산 수정을 5개 이상 박으면 자아가 강해져서 말을 안 들어. 그런데 그 녀석은 똑똑하고 말도 잘 들었어. 무슨 짓을 해놓은 거지?”
동호회 사람들은 파티홀로 안내되었다. 그곳의 테이블에는 간단한 음료와 음식이, 홀 중앙의 탁자에는 의자 두 개와 장기판이 준비되어 있었다.
“왔는가, 친구들.”
“오오! 자작님!”
“회장님!”
장기 동호회 사람들이 저마다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보이드 자작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때마침 캐롯도 나타났다. 걸어서 온 게 아니라 크랭크가 안고 왔다.
자리에 앉은 보이드 자작은 마주 앉아있는 초록색 머리의 꼬마 인형을 보았다가 크랭크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게 뭐지?”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 했습니다.”
주머니에서 스크롤마저 꺼낸 크랭크는 그것을 찢은 다음 캐롯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인챈트.”
찌이잉-!
모든 능력치가 급상승함과 동시에 황금빛 연기가 캐롯의 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초록색 방열 가발은 어느새 금발로 물들어버렸다.
보고 있던 보이드 자작의 얼굴로 광기의 웃음꽃이 피었다.
“으흐허허허! 멋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