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수도관광! (9)
응접실 밖의 문가에 몰려들어서 안에 들리는 소리를 숨죽여 듣고 있던 저택의 사용인들은 이제 아리에테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결국 멜라라 여사의 눈에 살의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과일과 그걸 찍어 먹으라고 가져다 놓은 포크를 주워 들고는 크랭크에게 덤벼들었다.
뭘 하려는 것인지 눈치챈 아리에테가 그녀의 손을 확 잡아챘다.
“아악!”
소파로 쓰러진 멜라라 여사가 표독스러운 시선으로 고개를 들고 외쳤다.
“이 년이 제 어미에게 무슨 짓이냐!”
“제발 진정하세요! 어머니! 당신이야말로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늙은이가 싫다면 나이 차이가 덜 나는 사람을 찾아봐 줄 테니 얌전히 가문을 위해서 널 희생해! 이 집안의 다른 여자들처럼! 네 언니들처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자 아리에테는 눈을 질끈 감고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이이이이!! 말이 안 통해!! 시온! 나를 들어줘! 내 몸을 보여주고 싶다!”
그 순간 지금까지 갑옷으로 알고 있던 시온의 외장 장갑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멜라라 여사가 그걸 보고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뭐……?”
타타탁! 철컥! 끼릭-!
가동골격이 움직이며 장갑판과 외골격을 변형시키고 그녀의 몸을 풀었다. 좌우로 벌어진 어깨에 매달린 팔은 그 상태로 움직여 아리에테를 위로 들어 올렸다.
팔꿈치와 무릎 아래, 사지가 절단되어 팔과 다리를 잃은 아리에테의 몸이 드러났다.
그걸 보자마자 멜라라 여사는 기절했다.
“자작 부인!”
“가주님!”
입을 딱 벌리고 몹시 놀란 얼굴로 사지가 절단된 아리에테를 쳐다보던 집사장과 메이드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 소파 위에 쓰러진 멜라라를 추슬렀다.
시온의 손에 매달린 아리에테가 그 상태로 쓰러진 어머니를 내려다보면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두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흐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이베크 아리에테가 아니야! 내 이름은 시온 아리에테다!”
* * *
아이베크 자작가문의 가주 멜라라 자작 부인의 혼절로 사태는 간단히 마무리되었다. 오랜 시간 가문에 봉사해온 집사장 엔나크가 이야기를 대신 전해 들었다.
응접실 맞은편의 자리에 앉은 그는 크랭크와 캐롯을 바라보았다.
“그럼 두 사람이 우리 아가씨를 구원해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사람이 아닌데요.”
아리에테를 달래주고 있던 캐롯이 바라보자 멋진 콧수염을 기른 엔나크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에게 큰 의지가 되는 시점에서 당신도 어엿한 사람입니다. 캐롯 양.”
“호오옥! 캐롯 양! 양!”
말랑한 볼에 두 손을 대고 감격한 캐롯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데 응접실 문이 열리고 메이드가 달려들어 왔다.
“집사장님! 가주님이 깨셨어요!”
“상태는?”
“횡설수설하고 계세요.”
“기분을 진정시키는 차를 가져다드리고 안정을 취하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하소연을 들어주실 부인들께 초청장을 보냅시다. 미리 써놓은 것이 제 방에 있을 겁니다. 마차도 준비하고요.”
고개를 꾸벅 숙인 메이드는 다시 후다닥 달려 나갔다.
많이 진정된 아리에테가 볼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전하군. 너무 듣기 좋은 소리만 들으면서 살면 글러 먹은 사람이 될 겁니다, 집사장.”
집사장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자작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지요. 가주님이 살아계실 때는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던 아리에테가 물었다.
“틴케트는?”
“학교에 가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시간입니다만.”
“아니, 뮬러 백작에게 시집보내는 이야기 말입니다.”
엔나크 집사장은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렸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백작님이 워낙 고령이시라 그때까지 살아계실지 모르겠군요. 어헛, 불경스러운 말을 입에 담아버렸군요.”
“당분간은 괜찮은 건가.”
가만히 앉아있던 크랭크가 입을 열었다.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저리되신 거라면, 그 짐을 좀 덜어드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대리인을 세운다던가.”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닌데, 지금 틴케트 아가씨는 너무 어리십니다. 부인께서 그 정도로 무책임한 분도 아니시고요.”
모두의 고개가 아리에테에게 향했다. 아리에테는 두 손을 엑스자로 만들며 고개를 흔들었다.
“싫다. 숨 막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 나는 아버님을 따라 군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기사 학교에 들어갔었지.”
“지금이라도 되면?”
캐롯의 말에 아리에테가 슬프게 웃었다.
“자작 부인은 내가 군인이 되는 것을 격렬히 반대했다. 내가 집을 나온 것은 그 때문이었지. 그리고 이제 사관학교에 들어가기엔 나는 너무 늦은 나이다. 이제 팔다리도 없고,”
“애초에 왜 딸들을 억지로 시집보내려고 혈안이 된 거야? 결국 돈 때문에 아냐?”
다들 대답하지 않고 캐롯을 보았다. 크랭크가 투구를 돌렸다.
“집사장님, 이 가문은 어떻게 유지되고 있습니까?”
“전대의 가주님이 남겨주신 유산과 첫째 아가씨의 도움으로……. 아, 그리고, 아리에테 아가씨.”
아리에테가 시선을 들자 집사장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일전에 참 감사했습니다. 큰 도움이 되었어요.”
“아닙니다. 저택을 남기고 싶어서 한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귀족이라고 해서 다들 그냥 놀고먹는 것이 아니었다. 선대부터 쌓아 내려온 재산이 많은 일부라면 모르지만, 대다수의 가문들은 귀족원에서 나오는 지원 말고도 가문의 유지를 위해서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 때문에 흥하는 가문이 있는가 하면, 망하는 가문들도 많았다. 최악의 경우엔 가문의 이름을 팔아버리고 일반시민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고, 반대로 일반 시민이 돈으로 가문의 이름을 사서 귀족이 되는 경우도 흔했다.
두 사람을 차례로 돌아보던 캐롯이 크랭크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혹시 너도 나랑 같은 생각 하고 있어?”
크랭크가 투구를 들었다.
결국 돈이다. 그것만 있다면 1차원적인 안녕은 일단 보장될 것이다.
그는 꽤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것을 입에 담아보았다. 묵살 당해도 상관없었다.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가능성의 제시는 중요하다.
상상력은 무기,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어선 안 된다.
“발칙한 모험가의 망측한 생각이라도 좋으시다면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만.”
크랭크가 내놓은 제안은 아리에테가 환호할만한 것이었다.
“모험가들의 후원자?! 양성소?”
“그렇지. 모험가 양성 사무소를 만들고 후원하는 거다. 이 세계는 성벽을 쌓고 살아가야 할 만큼 많은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모험가라는 직업은 언제나 수요가 있지.”
캐롯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그 모험가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곳은 거의 없어. 보통 길드에서 지원하거나 기성 모험가들이 데리고 다니면서 알려주는 편이지.”
“내내 생각했었다. 그런 곳이 있다면 내 추억 속의 동료들이 좀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고.”
“멋진 생각이다!”
모험가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불합리와 어려움을 몸소 겪어왔던 아리에테도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집사장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런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하면 저희는 다시 일어설 여력이 없습니다.”
“집사장님, 지금 여기 한 명 파견 보내왔잖아요?”
캐롯이 아리에테의 허벅지를 탁탁 치면서 말했지만, 집사장은 여전히 신중했다. 아리에테는 이제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는 아이베크 모험가 양성 학원의 그 첫 번째인가?”
“대표님. 잘 부탁드려요.”
“음! 너희들을 학원의 중요 간부로 채용하겠다.”
캐롯이 와하하 웃는 와중에 크랭크는 커다란 몸을 소파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이건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제대로 정착되려면 앞으로 십 수 년 이후의 일이 될 거다. 사업은 소모전이야. 관련 업계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더불어 안착하기까지 버틸 충분한 밑천이 필요해. 안 그러면 망해.”
고풍스러운 응접실을 슥 둘러본 크랭크가 집사장을 바라보았다.
“그저 부족하고 발칙한 모험가의 제안일 뿐입니다. 저 역시 이런 부담이 큰 사업을 어떻게 해볼 생각도 의지도 없습니다. 생각만 해도 위장병이 도질 것 같군요. 그저 가능성의 하나로만 염두에 두어 주십시오.”
하지만 아리에테의 생각은 달랐다. 몹시 위험한 눈을 한 그녀는 크랭크의 옆으로 바싹 붙어 앉아서 말했다.
“나는 이 건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돈이 없군.”
“벌면 되지 않으냐. 내가 노력하겠다. 네가 조금만 도와주면……!”
크랭크의 투구가 돌려졌다. 길게 뚫린 눈구멍 안의 어둠 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리에테. 희망을 안은 인간 장작이 되어 타오르려고 하지 마라. 진정해라.”
“불타오를 자리를 준비해 주지 않았느냐! 이런 멋진 계획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괜히 말을 꺼냈나 싶었던 크랭크가 집사장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신 전 가주님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집사장은 그저 웃기만 했다.
틴케트가 돌아올 시간이 되어 아리에테는 그만 저택을 나서기로 했다. 집사장과 메이드들이 그녀를 붙잡았지만 아리에테는 단호했다.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꿈을 좇다가 팔다리마저 잃은 이런 모습을 그 아이에게 보여줄 수는 없어.”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집사장의 곁으로 파이가 다가왔다.
“찾으셨습니까.”
“혹시 저 사람들의 주소를 아나요? 편지라도 자주 보내어 연락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저기 크랭크라는 모험가와 그 오토마톤은 우리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집사장이 고개를 돌리고 파이를 보았다.
“앞으로 당신이 자주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원정을 또 가라니, 파이는 기절하고 싶었다.
마차를 타고 도시로 향하면서 아리에테는 크랭크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려고 관심 없다는 듯이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던 크랭크가 곧 투구를 돌리고 말했다.
“나는 맛이 없다.”
“살은 많아 보이는데.”
아리에테가 히죽 웃으며 별안간 농담을 하더니 표정을 바꿔 눈썹을 세우고 목청껏 외쳤다.
“크랭크! 나와 결혼하자! 내 부인이 되어라!”
창문에 매달려 밖을 내다보고 있던 캐롯이 찡그린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응? 뭐야, 뜬금없이 무슨 프로포즈야?”
팔짱을 한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크랭크는 거창한 몸짓으로 기지개를 켜더니 다시 창틀에 팔을 걸쳐 올리고 나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 취향은 연하에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미소년이 아니었나?”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어리숙하지 않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봄의 풍경을 무심하게 내다보던 크랭크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어찌 된 것인지, 요즘 내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군. 아마 투구를 써서 맨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겠지. 멋대로 상상하는 거야. 상자 속의 양 같은 거지.”
아리에테는 진심이었다.
“네 얼굴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 부인이 되어다오! 너를 행복하게 해주겠다! 그리고 함께 양성소를 차리……! 우부붑!!?”
마차는 좁았기 때문에 크랭크가 팔을 뻗으면 맞은편에 앉은 아리에테의 얼굴을 간단히 붙잡을 수 있었다.
볼을 잡혀 오랜만에 오리입이 된 아리에테가 버둥거리는데 크랭크가 그녀의 얼굴에 투구를 들이밀었다.
“진정해, 진정해라. 너는 지금 흥분했다. 내일 아침이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거야. 지금 네 행동이 딸들을 시집보내 집안을 일으키려 했던 저 자작 부인과 뭐가 다른지 생각해봐라.”
“무! 무무무!”
입을 놓아주자 아리에테가 볼을 매만지며 말했다.
“분명 크게 다르다. 나는 내가 원하고 있다. 너를 내 것으로 삼아 네 능력을 얻고 싶어.”
눈썹을 꿈틀거린 크랭크가 이제 캐롯을 보았다.
“좀 말려봐.”
“왜? 좋지 뭘, 드디어 크랭크! 결혼하는구나!”
“내 오토마톤은 이럴 때 도움이 안 되는군.”
히히 웃는 캐롯에게서 투구를 돌린 크랭크는 다시 팔짱을 하고 창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그런 식의 청혼은 거절한다. 그리고 넌, 내 취향이 아니야. 너무 못생겼어.”
내내 미인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아리에테는 그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분노한 그녀가 크랭크에게 덤벼드는 바람에 마차가 마구 흔들렸다.
“내게 그런 무례한 소릴 한 건 네가 처음이다! 너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나를 이렇게 취급하는 것이냐! 벗어봐라! 얼굴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