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수도관광! (5)
듣고 보니 그럴듯해서 아리에테도 놀라워했다. 그때 크랭크가 뒤를 돌아보며 손짓하고 있다.
“크랭크! 캐롯이 하는 말을 들어봐라! 뭔가 엄청난 발견이 일어난 것 같다!”
“그런 것보다 너는 먼저 방에 들어가서 씻어라. 그 몸으로는 세면장을 이용할 수 없으니 수건을 적셔서…….”
“그런 것이라니! 너는 말이다! 너무 무신경하다! 지금 캐롯이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참인데!”
퍽퍽!
“아프다. 아파, 때리지 마라. 어서 씻어라. 일찍 자야 한다.”
아리에테의 주먹질을 귀찮다는 듯이 밀어내며 크랭크가 재촉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린 그녀는 캐롯을 돌아보았다. 볼을 붙잡고 폴짝폴짝 뛰면서 혼자서 놀라워하고 있던 캐롯은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아리에테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래, 그런 건 아무렴 어때, 어서 씻고 자자. 너 냄새나.”
“무엇?! 냄새가 난다고!”
개처럼 킁킁거리기 시작하는 아리에테를 방으로 밀어 넣는 캐롯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준 크랭크는 수건을 챙겨 들고 혼자 세면장으로 향했다.
“파이, 밥……!”
“지금 주무십니다.”
로테가 손가락을 세우며 말하자 아리에테와 캐롯이 따라서 입가에 손가락을 세우고는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 저택에서만 지내던 메이드였던지라 장거리 여행이 익숙하지 않아 파이는 정말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으음, 그걸 이렇게 해서 저쪽으로 옮기면…….”
침대에 걸터앉은 채 계속 허공을 응시하며 헛손질을 하는 캐롯을 아리에테가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장기 연습하는 건가?”
“어, 그 영감님 콧대를 꺾어놓고 싶어. 들었어? 소원을 이뤄 주겠대.”
“소원이라니, 그건 너무 막연한 보상이로군.”
철컥! 끼릭, 기긱.
시온이 고정골격을 풀고 아리에테를 들어서 침대에 놓아주자 로테가 준비해온 오토마톤 의수를 가져다 그녀의 팔에 끼워주었다. 나머지 의수와 의족은 아리에테가 스스로 끼웠다.
“음, 가져오길 잘했다.”
팔다리를 붙이고 움직여보며 고개를 끄덕인 아리에테는 그 상태로 입고 있던 셔츠와 반바지를 벗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는 것으로 간단하게 몸을 씻기 시작했다.
천장을 보면서 허공 장기를 두다 말고 고개를 돌린 캐롯이 가만히 아리에테의 알몸을 쳐다보았다.
참 아름다운 인간의 몸이었다. 그 유려한 곡선은 오토마톤의 조형미로는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소프트 스킨이라는 치트키가 있긴 했지만,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넋을 잃고 아리에테의 알몸을 쳐다보던 캐롯이 곧 두 손을 들고 그 조그만 손가락을 몹시 기괴하게 움직였다.
“참 말랑말랑해 보이네. 그거, 가슴 한번 만져 봐도 돼?”
“으헉!”
오토마톤 의수로 몸을 가린 아리에테가 붉어진 얼굴로 당황한 표정을 했다가 새침하게 거절했다.
“아, 안 된다! 이걸 만질 수 있는 사람은 미래의 남편과 자식들뿐이다!”
“호오, 거기 크랭크도 순위에 있어?”
“으아악! 캐로-옷!”
벌게진 아리에테가 눈을 질끈 감고 빽 소리를 지르자 캐롯이 와하하 웃어댔다.
“장난이야. 수건 줘봐. 등 닦아줄게.”
“으, 음. 자, 장난이 좀 지나치구나.”
수건을 받아 양동이에 넣고 헹군 다음 물기를 짜낸 캐롯은 의자에 앉은 아리에테의 흉터투성이 등을 슥슥 닦아주기 시작했고, 베누스와 로테는 근처의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와, 옛날 기분 난다.”
“옛날?”
“너, 팔다리 없을 때 항상 자고 일어나면 땀이 흥건해서 자주 닦아줬잖니.”
“아아.”
작년 가을이었으니까, 채 1년도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지옥과 천국을 오고 간 경험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그녀 기준에 천국이라 해도 좋았다. 어느새 길어진 머리카락을 앞으로 돌려 잡고 있던 아리에테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에겐 항상 감사하고 있다.”
우수에 젖은 시선으로 오토마톤 의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데 어깨 너머로 익살스럽게 웃고 있는 캐롯의 얼굴이 스르륵 올라왔다.
“오우, 그래서 가슴 만지게 해주는 거야?”
“으아악! 끈질기구나!”
반응이 재미있어서 캐롯은 자주 아리에테를 놀리는 편이었다. 물론 적당한 수준에서.
수건을 돌려받아 얼굴과 가슴, 배, 다리 순으로 슥삭슥삭 닦은 아리에테는 다시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훔쳐내고 목에 수건을 건 채 자신의 알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팔다리가 있다는 것은 참 좋구나.”
“알았으니 빨리 옷 입어. 크랭크 올 때 됐어.”
“음.”
그녀가 속옷과 반바지를 챙겨 입는 동안 오토마톤들이 주변을 정리하고 양동이를 치웠다.
목욕이 끝나자 캐롯이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던 크랭크를 불러들였다.
“다됐어. 파이는 자고 있어.”
웃통을 벗은 크랭크가 목에 수건을 건 채로 방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밤엔 쌀쌀하군. 다 끝났나?”
“음, 다 씻었다 너는?”
“밖의 세면장에서 대충 씻었어. 일찍들 자자, 잠은 잘 수 있을 때 푹 자두는 것이 좋다.”
바쁘거나 귀찮아서 야외에서는 잘 안 씻는 모험가도 많지만, 크랭크의 파티는 그의 성화에 자주 씻는 편이었다.
“더러우면 병 생긴다. 거기서 다치기라도 하면 파상풍이 올 수도 있지.”
“나는 너희들과 함께 지내면서 매일 뜨거운 물 목욕을 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팔 하나만 제외하고 의수를 전부 뺀 아리에테가 침대에 누우면서 말했다. 그 곁으로 의자를 가지고 와서 앉은 캐롯이 담요를 끌어당겨 주었다.
“그전에는 어땠는데?”
“방금처럼 적당히 수건으로 닦는 편이었지, 뭣하면 그냥 자기도 했다.”
“끔찍하군. 씻지 않고 침대에 들어가다니.”
“뭣! 너는 너무 무신경하다! 이 결벽증 환자!”
“불면증 환자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다. 불 끈다.”
천장에 매달린 라이트 볼에 덮개를 씌우자 당장 어둠이 찾아왔다. 덜컥 겁이 난 아리에테였지만 곁에 앉아있는 캐롯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안도했다.
그리고 기절했다.
“신기하기도 하지. 어떻게 이렇게 바로 잠들 수 있을까? 맞아. 전에 그거 내 베개 인형은 어땠어?”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운 크랭크가 대답했다.
“음, 생각보다 잘 먹히더군. 지금 정도는 아니었지만, 문제없이 잠들었어.”
“오.”
그리고 크랭크도 곯아떨어졌다. 숨 쉬는 소리만 자욱한 좁은 방 안, 오토마톤들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죽였다.
어둠에 물든 방 안에서 잘 자고 있는 불면증 환자의 곁을 지키고 앉은 캐롯은, 여전히 그 헛손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걸 이렇게 저렇게.
* * *
이튿날 아침.
부산한 아침, 방 정리를 나 몰라라 하고 밖으로 뛰쳐나온 캐롯은 마침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아침 식사 중인 보이드 자작을 발견하고 재도전을 신청했다.
이른 식사 중임에도 보이드 자작은 흔쾌히 캐롯을 맞이했다.
“심장 뛸 일이 적어진 이 몸을 두근거리게 할 도전자는 언제나 환영이야. 연습은 좀 해왔느냐? 꼬마 인형.”
“그럼요! 자작님의 코끝을 훔쳐드리겠습니다. 으헤헤!”
마주 낄낄 웃음 지은 보이드 자작은 식사하면서 장기판을 깔았다.
캐롯이 보이지 않아 찾으러 다니던 크랭크는 식당에 모인 사람들의 틈에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장기를 두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여기 있었어? 좀 있다 출발해야 하니까. 슬슬…….”
굳은 얼굴의 캐롯이 손바닥을 펼쳤다. 앞에 앉은 보이드 자작이 색안경 너머로 날 선 시선을 들었다.
“놀랍군,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케케케! 계산했지요! 자작님의 패턴!”
캐롯이 장기 말을 들어 올렸다.
착!
고개를 살짝 숙이고 도전적인 시선을 위로 뜬 꼬마 인형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장군.”
실로 오랜만에 위협당한 보이드 자작의 얼굴로 놀라움이 번졌다. 그는 다음 수를 두지 않은 채 담배를 꺼내 성냥으로 불을 붙인 다음 긴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오토마톤 주제에 소질이 있군. 너와는 시간을 들여 느긋하게 싸워보고 싶구나.”
“으하하! 패배를 시인하시는 거예요?”
착!
“으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 수를 옮기자 캐롯이 장기판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머리를 붙잡고 뺙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런 캐롯을 바라보는 보이드 자작의 눈은 진지했다.
“연산 능력이 굉장히 높은가 보군. 이 꼬마 인형, 조금만 더 하면 꽤 즐거운 상대가 되겠어. 좋은 대전 상대는 구하기 어렵지.”
스윽-!
곁을 지키고 선 오토마톤 메이드 하나가 조그만 명함을 탁자에 올리고 앞으로 밀었다.
붉은 색안경을 낀 보이드 자작이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캐롯을 가리켰다.
“내 저택의 주소다. 나를 이기거나, 제한 시간을 버티기만 해도 네 소원 하나 반드시 들어주마.”
냉큼 명함을 받아든 캐롯이 그걸 들여다보다가 눈을 위로 떴다.
“그거 말인데요. 진짜 아무거나 들어줘요? 소원.”
이제 담배를 입에 문 보이드 자작이 이빨을 드러내고 씩 웃었다. 몇 개가 금니라서 좀 우스꽝스러웠다.
“이래 보여도 나는 꽤 영향력이 있단다. 돈도 썩어 넘칠 만큼 있지. 너무 얼토당토않은 것만 아니면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하다.”
“오오.”
그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크랭크가 슬쩍 끼어들었다.
“출발 시간이 가까워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음, 장기 아니라도 한 번쯤 들리도록 하시게. 구해준 답례로 식사 정도는 대접할 테니까. 저택 주방장이 요리를 잘해. 마음에 들게야.”
“감사합니다.”
승차장에서 인원 파악 중에도 캐롯은 허공을 보면서 헛손질을 해대고 있었다.
아리에테가 물었다.
“아까 그 장기 마왕을 만나고 온 거 아니야? 아직도 하는 건가?”
“응! 연습! 일정 시간 버티기만 해도 소원을 들어주겠대.”
듣고 있던 아리에테가 되물었다.
“그나저나 무슨 소원을?”
“네 동생을 구해달라고.”
헉?!
아리에테는 물론 가만히 듣고 있던 파이조차도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그러다가 아리에테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 나는 언니로서 아무런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나는 틴케트의 언니 자격이 없다.”
“아리에테, 너무 자책하지 마.”
시무룩한 얼굴의 파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차장에게 차표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크랭크는 집을 버리고 뛰쳐나올 때는 언제고 어디서 갑자기 그런 우애가 생겨났느냐고 쏘아붙이지는 않았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작위 차이가 너무 난다. 또 그런 걸 남에게 부탁하는 건 무리가 있어. 그보다 어서 타라. 출발한다.”
“그래도 말이나마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차례대로 차에 오르는데 누군가가 뛰어왔다. 보이드 자작의 인간 메이드 루이스였다.
“잠깐만요!”
루이스는 조그만 소년 하나를 데리고 와서는 캐롯을 찾았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캐롯이 차량에서 내렸다.
“오! 그 장기 마왕님네 메이드 언니구나. 무슨 일이에요?”
존경하는 주인을 놀리는 듯한 호칭에 미간을 좁힌 루이스였지만 별다른 항의 없이 용건을 말했다. 그녀는 함께 온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 도련님이 어제 저녁부터 당신들을 만나 뵙고 하셨습니다. 늦잠을 주무시는 바람에! 하마터면 놓칠 뻔했군요.”
말에 힘을 주어 잠꾸러기 도련님의 힐난하는 메이드를 억울하다는 듯이 올려다보던 보이드 자작의 손자 올코트가 동화책을 가슴에 안고 다가왔다. 잠이 덜 깬 얼굴은 눈앞의 캐롯을 살피며 점점 환희로 물들기 시작했다.
너무 흥분했는지 말까지 더듬어댔다.
“저, 저, 저, 네가 혹시! 그, 저기, 이, 이거!”
눈을 질끈 감은 올코트가 껴안고 있던 동화책을 내밀자 그걸 빤히 보던 캐롯이 책을 받아 촤르륵 넘기더니 환하게 웃었다.
“우왁! 이거 우리 이야기야!? 크랭크 이거 좀 봐봐! 우리 동화책이야! 우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