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수도관광! (2)
눈썹을 세운 파이가 그녀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아리에테!”
“사실이잖아?”
“그래도 말은 조심스럽게 해야 해! 넌, 뭐가 되려고 그러니!”
옛 기억을 떠올린 아리에테가 씩 웃었다.
“이제 되고 싶은 건 없다. 나는 모험가가 되었다.”
실수를 깨달은 파이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께서는 따님들을 유력 인사나 그 자식들에게 시집보내는 것으로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셨습니다. 덕분에 아이베크 가문은 아직 건재합니다.”
“흥! 아들이 없어서 가문은 곧 망할 거다.”
“첫째 아가씨께서 건강한 아들을 출산하셨습니다.”
풉!
아리에테가 입에 넣었던 스튜를 뿜어버렸다. 덕분에 맞은편에서 그걸 정면으로 받은 크랭크는 우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잠시 아리에테와 파이가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언니가? 큰언니가 아이를 낳았다고?”
“첫아들은 아이베크 가문으로 입양하는 조건으로 시집가셨기 때문에 상대 쪽 가문에서 약속만 제대로 지켜주면 당장은 무난하겠지.”
아리에테가 한숨을 쉬었다. 수건으로 투구와 몸을 닦던 크랭크가 되물었다.
“딸 넷 중에 둘은 시집을 갔고, 너와 동생만 남은 건가?”
“그래, 믿을 수 있겠나? 그 여자는 나를 80이 넘은 백작에게 팔아넘기려 했다. 회춘하려면 젊은 여자와 살아야 한다는 망측한 생각을 가진 늙은이였지. 엄청난 돈을 제시했다.”
이제 모두는 파이를 보았다.
“사실입니다.”
“와, 그래서 도망친 거였어?”
“애초에! 나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팔려가듯 시집가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큰언니는 잘 지내고 있지만, 둘째언니는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파혼당하고 되돌아왔었다. 그때 그 여자의 얼굴을 너희들도 봐야 했어. 그런데 둘째언니는 어떻게 됐지?”
접시의 음식을 내려다보며 파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돌아가신 가주님의 예전 부하였던 분과 재혼하셨어요. 부인께서는 별로 탐탁지 않아 하셨지만.”
“다행이다. 둘째 언니는 고생을 많이 했어. 잘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너는?”
허리를 숙인 캐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리에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캐롯의 볼을 살짝 매만져주며 말했다.
“나는 지금도 행복하다. 네 덕분에.”
캐롯이 씩 웃었다.
“좋네.”
“하지만 그 여자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지. 다음 목표는 막내인가?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서…….”
파이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거 말인데, 네가 집을 나가버리는 바람에 백작님께 시집가는 건 막내 틴케트 아가씨가 되어버렸어.”
뚜둑-!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최대로 분노한 아리에테는 오히려 평온하게 파이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되물었다.
“뭐라고? 틴케트를?”
파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에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눈썹도 위로 치켜 올랐다. 눈물도 왈칵 쏟아냈다.
“그 아이는 아직! 13살이라고! 이 망할 것들이!”
모두를 싸잡아 욕하며 아리에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더니 무심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크랭크를 내려다보았다.
“크랭크!”
“밥 먹고.”
“안 돼! 내 용건이 먼저다!”
“말해라. 귀는 열려있다.”
“약간의 돈이 필요하다! 내 여동생을 마수의 손에서 구출하고 싶다!”
“알았다. 준비하지.”
크랭크는 이제 빵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덕분에 일어선 아리에테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될 지경이었다.
한 그릇 든든하게 비운 크랭크가 그것을 샤를에게 내밀었다.
“오늘도 잘 만들었다. 한 그릇 더 다오.”
“감사합니다.”
그제야 크랭크가 투구를 돌렸다. 투구 속에서 붉은빛이 솟아오른다.
“꿈만 먹고도 배불러야 할 13살짜리에게 너무 가혹한 것을 강요하는군. 미친 모험가마저 당황하게 만드는 만만치 않은 것들은 세상 어디에나 있구나.”
“와! 그럼 우리 이번엔 서부의 수도에 가는 거야?!”
신난 캐롯을 옆에 두고 투구를 돌린 크랭크가 아리에테를 쳐다보았다.
“너만 좋다면 거들어 주겠다. 너에게 투자한 것도 만만치 않지만 네가 벌어다 준 금액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은 정당한 지출이며 지원이다.”
“고맙다!”
일어선 아리에테가 두 팔을 감아쥐고 환호했다. 파이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뭘 어떻게 하실 거죠?”
크랭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가 아니라, 당장 계획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계획은 가면서 생각해보자. 납치든 암살이든 상관없다.”
파이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녀의 어깨를 아리에테가 붙잡았다.
“걱정마라. 직장을 잃으면 내가 널 고용해줄 테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 * *
다음날, 준비를 마친 그들은 바로 출발했다. 하지만 샤를과 투나는 남았다.
“어, 자, 잘 다녀와.”
“집 잘 보고 있어! 투나 어린이! 샤를 엄마 말 잘 듣고!”
투나는 으히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골목길로 모습을 감추자 투나도 공방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크랭크만 돌아왔다. 놓고 간 물건이라도 있나 싶었던 투나가 고개를 들자 바싹 다가온 크랭크가 샤를에게 말했다.
“샤를, 할 이야기가 있다. 자리를 피해다오.”
고개를 끄덕인 샤를이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크랭크는 허리를 숙여 투나를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투나, 아리에테의 팔다리를 자른 것이 너냐?”
순식간에 핼쑥해진 투나가 머리와 손을 휘휘 흔들었다.
“아, 아냐! 내가 안 그랬어! 나, 내 연구과제는 생체 기관부 조직의 분석과 신경계…… 거, 거기서 아, 아리에테는 본 적도 없었어! 믿어줘! 정말이야! 내, 내가 안 그랬어……!”
“그러면 됐다. 네 탓이 아니지 않나. 좀 더 어깨를 펴라. 너와 아리에테는 대등한 관계에 있다. 겁먹지 마라. 평소 네가 너무 주눅 들어 있어서 신경 쓰였다.”
당황한 나머지 이제 훌쩍이기 시작하던 투나가 소매로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머리를 툭툭 매만져준 크랭크가 허리를 폈다.
“그 붉은사슴뿔버섯 좀 줘봐. 분말로 만든 것 있나?”
“어, 마, 말리는 도중인데….…”
투나는 실험실로 들어가서 미리 가공해놓은 버섯 가루를 가지고 나왔다.
“고맙군. 곧 돌아오겠다. 요즘 공짜 일이 많군.”
“너, 너는 로맨티스트네. 돈 안 되는 일에 자주 나서서.”
크랭크가 몸을 돌렸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럴만한 돈이 없다. 그래서 노력하는 거지.”
히죽 웃은 투나가 멀어져 가는 크랭크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 나는 남자 복이 좀 있나 봐. 으흐흣.”
기다리는 일행들과 길드로 향한 크랭크는 청동문의 사용 허가서를 발급받았다. 파이가 저걸로 아르곤을 방문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와, 저거 사용하는 거였어요?”
“물론, 작년 겨울부터 시작했어요. 캐롯은 시험운행단을 만났다고 들었는데?”
“아, 작년 길드 마스터와 함께 있던 그 사람들! 기억나요!”
오리온이 방긋 웃으며 종이에 도장을 찍어 내밀었다.
“안에 들어가시면 중계소가 있어요. 요금은 거기서 내면 돼요.”
“요금?!”
“공짜로 쓰게 해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번엔 어디로 가요?”
캐롯이 작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수도! 리즈넷! 최초의 방주도시!”
“목적은?”
“관광!”
오리온이 아하하 웃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준 일행들은 바로 광장 청동문 앞으로 가서 나란히 섰다.
캐롯이 그걸 올려다보며 말했다.
“와, 그날 이후 들어가는 건 처음이야.”
“너희들 날 만나기 전에 꽤 대단한 모험을 한 모양이군. 이 포탈 게이트에 너희들의 이름이 관련되어있는 줄을 몰랐다. 기회가 되면 이야기를 들려줘.”
“그래. 좋아. 여름철 우기에는 정말 할 게 없으니 그때 들려줄게.”
크랭크는 전날 출발 전에 작성해 놓은 수첩을 꺼내 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이걸 이용해서 메인쿤으로 간다. 거기서 수도 리즈넷으로 가는 도시 간 이동 차편을 알아보자.”
“오오! 캐롯 관광단 출발!”
앞에서 지켜보던 경비병들이 히죽 웃으며 그들의 서류를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후우웅-!
상쾌한 바람이 분다.
내부에 처음 들어가 본 아리에테는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언덕 위에 올라선 그녀는 드넓은 이국적인 숲과 하늘,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놀라워했다.
“완전 별세계지 않나! 이럴 수가! 왜 여길 이제야 들어와 보는 거지?!”
“아리에테! 뭐해! 빨리 와!”
언덕 아래에는 원래 숲이 펼쳐져 있었는데, 지금은 벌목을 하고 바닥을 포장을 해서 사람들이 다니기 편하도록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전 오크 마을이 있던 곳에는 커다란 콘크리트 성벽과 함께 중계소가 설치되어져 있었다.
중계소를 쳐다보던 캐롯이 주변의 숲을 살피며 말했다.
“아예 이걸로 써먹기로 작정했구나. 뒤쪽 공간 탐사는 그냥 포기했나 봐?”
“이쪽으로는 나도 신경 끄고 있어서 들은 것이 없다. 돌아오면 알아보자.”
“응!”
고개를 끄덕인 캐롯은 씩씩하게 앞장서서 중계소를 향해 걸었다.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청동문을 이용하기 위해 중계소를 오가고 있었다. 원정 당시 그것을 처음 발견하고 능력을 알아보았던 크랭크는 지금 이 모습이 참 감개무량했다.
“개인 이동교통 수단으로서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구나. 뿌듯하다. 그날의 고생은 헛되지 않았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요금을 치르기 위해 줄은 선 크랭크와는 반대로 중계소를 안팎을 신나게 돌아다니던 캐롯은 굉장한 것을 발견했다.
중계소 바깥마당에 설치된 검은 비석에는 이곳을 발견하게 된 짧은 경위와 함께 그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우와! 내 이름이 있어! 그것도 맨 위에 있어!”
감동한 캐롯이 볼을 감싸고 뺙 소리를 질렀다. 그 호들갑을 듣고 바깥으로 나온 아리에테는 비석에 쓰인 글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곁에 서 있던 파이도 놀라워했다.
“정말이네, 오토마톤 캐롯이라고 적혀있어요. 여기에 참가했었어요? 아니! 오토마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파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함박웃음을 지은 캐롯이 손을 들었다.
“예! 크랭크랑 같이! 그런데 주인님 이름은 없네.”
“빼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애덤과 레나의 이름도 없구나. 좋아. 약속은 지켜주시는군.”
통행료를 치르고 나온 크랭크가 캐롯의 곁으로 와서 비석을 올려다보았다. 아리에테가 물었다.
“통행료는 얼마였지?”
“메인쿤까지 성인 3명과 오토마톤 3대, 210만 리즈. 인당 35만쯤 된다.”
아리에테가 입을 벌렸다.
“비싸!”
“싸다.”
슬슬 중계소를 나서서 푯말을 따라 메인쿤 청동문이 있는 언덕을 올라가며, 아리에테가 뒤를 돌아보았다.
“싸다고? 어째서지?”
“도시 간 이동 차편 비용보다 약간 비싼 정도다. 실 차편의 이동 시간과 위험도를 고려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이지. 하지만 오토마톤까지 성인 비용으로 처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호다닥 언덕을 뛰어오른 캐롯이 청동문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
“빨리 와! 이 굼벵이들아!”
“와아! 대단해요! 캐롯! 새삼스럽지만 반가워요. 크랭크, 수도에서는 당신들 꽤 유명인이에요.”
크랭크가 투구를 돌렸다.
“그 동화책 때문인가 보군요.”
“그럼요. 누구나 모험을 꿈꾸잖아요? 대리만족이란 거지요.”
언덕 위에 도착한 그들은 차례를 기다렸다가 청동문을 통과했다.
메인쿤의 청동문 역시 광장 근처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다만 콘크리트 방호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차례를 기다려 두 번째 입구에 통행증을 제출하고 나서야 그들은 두꺼운 문 바깥의 메인쿤 광장으로 나설 수 있었다.
“우와! 메인쿤! 메인쿤이야! 킁킁! 좋은 냄새가 막나! 신기하다!”
캐롯을 흥분시키는 향기의 정체는 광장 주변에 잔뜩 심겨 있는 대량의 꽃과 나무들 때문이었다. 아리에테도 그걸 보고 놀라워했지만, 크랭크는 등 뒤의 청동문 방호벽을 더 인상 깊게 바라보았다.
악용되었을 때를 대비한 것인가. 좋군.
“동네 구경은 됐고! 이제 어디로 가지? 크랭크는 와본 적 있어?”
“아니, 하지만 파이는 알겠지. 이용하신 도시 간 이동 차량 역은 어디입니까?”
“이쪽이에요.”
다들 파이를 따라 메인쿤의 도시를 거닐었다. 아르곤의 도시 구성이 뭔가 좀 여백이 많은 느낌이라면 메인쿤은 빈틈없이 건물과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곳이었다.
“여기 영주인님은 꽃나무를 좋아하시나 봐. 완전 정원 도시네.”
“듣기로는 엘프들이 많이 살아서 그렇다더라고요.”
“와! 엘프요?”
파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의 숲이랑 가까워서 자주 찾는 곳이라고 해요. 덕분에 치안도 굉장히 좋고요.”
“오! 그건 좀 부럽네.”
역에 도착해서 표를 끊는 와중에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났다.
머리에 두건을 감은 사내가 찌푸린 눈을 하고 주변을 서성이다가 캐롯과 눈을 마주치고는 손가락을 튕기더니 외쳤다.
“엇! 맞네! 역시 캐롯이야!”
“어? 날 알아요?”
“그럼! 너, 나 모르겠냐! 드래곤레어 원정 때 밤에 잠 깨라고 사탕 던져 줬잖아!”
“아! 그 불침번 아저씨구나!”
캐롯과 남자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