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강호의 도리! 과거편! (외전 2)
부리나케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돌아보며 로나가 말했다.
“참 시끄러운 사람이었어요.”
“그 오토마톤에 눈독을 들이던 누군가가 생각나는구먼.”
로나가 고개를 돌렸다.
“움직이는 인형이잖아요? 한번 만져보고 싶은 걸 참느라 힘들었어요. 저렇게 작은 오토마톤도 있었군요. 얼마나 하죠?”
드워프 밥은 괜히 말을 꺼냈나 싶었다. 듣고 있던 피터가 대답했다.
“글쎄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소형이니 좀 싸지 않을까요? 1000만 리즈쯤 하지 않을까 싶군요.”
“생각보다 비싸군요.”
로나가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짐을 다 꾸린 크랭크가 마차를 몰고 다가왔다.
“저, 도중에 저 사람들이 왔다는 곳을 한번 살펴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늑대 가죽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서요. 그건 비싸요.”
“가는 길에 발견할 수 있으면 상관없지만, 탐색은 불허합니다. 우린 일이 있어요.”
“알겠습니다.”
마차를 타고 30분쯤 이동하자 정말로 길가에 쓰러진 고블린과 늑대를 발견했다. 로나는 하는 수 없이 허락했고, 크랭크는 단숨에 늑대 2마리의 가죽을 벗기고 머리와 다리는 잘라서 가져왔다.
신관이 인상을 찌푸리자 크랭크가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보고 있던 밥이 물었다.
“이봐, 그거 공평히 나누는 거지?”
“당연합니다. 공동 수입은 나누는 것이 파티 규칙이니까요.”
그제야 다들 표정 관리를 시작했다. 피터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저 친구는 돈 되는 건 그냥 버리고 가버리는군. 이런 것도 나름 쏠쏠한데.”
“돈이 급하지 않거나. 아예 모르는 사람이겠지요. 출발하겠습니다.”
다시 마부석으로 올라온 크랭크는 길을 재촉했다.
* * *
이후, 스테인에 도착한 케인은 모험가로 등록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실력이 좋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편이라서, 몇 달 되지 않아 나름 이름을 알리게 되어 길드에서도 주목하는 신입 모험가가 되었다.
“후우……! 다녀왔습니다.”
“오오! 케인! 돌아왔어?!”
모험가 길드 접수처에 앉아있던 안경 낀 젊은 남자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법사 길드에서 의뢰한 재료를 찾으러 멀리까지 나갔다가 돌아온 케인이 초췌한 얼굴로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음후후! 이 몸에게 걸리면 다 끝장나는 거야. 그런데 너무 피곤하군. 좀 쉬어야겠어. 루루.”
케인이 뒤를 돌아보자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조그만 오토마톤이 걸어 나왔다. 입고 있는 메이드 제복은 피와 먼지에 더럽혀지고 찢어져 엉망이었고,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에도 화살이 박혀 장식되어 있을 지경이었다.
그 배낭에서 주섬주섬 의뢰품을 끄집어낸 케인은 그것을 접수처에 맡기고 의뢰비를 받았다.
철그럭-!
“만드라고라 채취 완수! 의뢰비 200만 리즈!”
“우와-! 한방에 200만!?”
“비싼 거 아니야! 죽는 줄 알았다고! 만드라고라 비명, 들어봤어?!”
길드에 어슬렁거리다 구경하러 온 모험가들에게 힘겹게 소리쳐준 케인이 돈주머니에서 내용물을 적당량을 덜어낸 다음 다시 접수처에 밀어 넣었다.
“나머지는 저금. 지금 얼마나 모였습니까?”
안쪽의 책상에 앉은 여성 접수원이 서류를 뒤적이더니 웃으며 말했다.
“3천 300만 리즈입니다.”
“음, 생각만큼 잘 모여지지 않는군. 전투용 오토마톤을 마련하고 싶은데.”
옆에서 보고 있던 모험가들이 거들었다.
“그러니까 빨리 파티를 맺어. 혼자서는 정말 한계가 있다고.”
“그래야 할까 봐, 하지만 일단 좀 씻고 자자. 밤을 새워 달려왔더니 죽을 것 같아.”
일을 마치고 길드에서 제공해주는 기숙사로 돌아간 케인은 대충 씻은 후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서 기절했다.
잠시 후, 그의 방문이 슬쩍 열리더니 루루가 고개를 내밀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린 조그만 오토마톤은 빨랫감 가득한 바구니를 머리에 올리고 세면장으로 도도도 달려가더니 빨래를 시작했다.
복작복작-!
한참 동안 시간을 들여 주인님의 옷을 전부 세탁한 루루는 이제 자기 옷을 벗어서 찬물에 불리고 비누칠해서 씻기 시작했다. 마침 그 모습이 신기했던 모험가들이 다가왔다.
“와, 이거 봐. 쪼그만 오토마톤이 혼자서 빨래를 해.”
“그거 참, 신기하네. 알아서 세탁, 청소를 다 해주는구나.”
“이거 정말 편리한데. 나도 한 대 살까?”
“차라리 결혼을 하는 게 어떠냐?”
자기들끼리 킥킥거리던 모험가들이 다가오더니 루루의 빨래통에 자신들의 옷가지를 쏟아놓았다.
“어이, 오토마톤, 이것도 좀 해라.”
고개를 든 루루가 말했다.
“이것은 제 주인님의 옷이 아닙니다.”
“와, 말하는 것 좀 봐.”
“같은 지붕에 사는데 좀 안 되겠어? 내가 너희 주인에게 말해둘게.”
“주인님의 허가와 직접적인 확인이 필요합니다.”
한 남자가 루루가 빨고 있던 옷을 주워 들더니 말했다.
“이거 매일 입고 다니는 그 메이드 옷이구나. 귀엽네. 그런데 거의 걸레 조각이야.”
“돌려주십시오. 세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으하하! 내 빨래해주면 돌려주마!”
턱-!
높이 들어 올린 팔을 두꺼운 손아귀가 움켜쥐었다. 우연히 빨래하러 온 크랭크였다. 순박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그가 남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키는 이 세계에서도 드문 편이었다.
“뭐야! 이 새끼는?! 이거 안 놔?! 엉! 어?”
“어엇! 크랭크!?”
남자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우연히 도망 다니는 빚쟁이를 맞닥뜨린 크랭크가 분노의 주먹을 들어 올렸다.
“내 돈 내놔라. 이번엔 그냥 못 넘어간다.”
“아, 아니, 그게 말이야……!”
사내들이 빠르게 눈알을 굴리며 변명거리를 찾는 순간 주먹이 날아갔다. 크랭크는 전부터 빌려준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만큼 버릇을 고쳐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참이었다.
퍽퍽퍽!?
던져버린 빨래통은 벽을 맞고 튕겨 나와 더러운 빨랫감을 온 사방으로 흩트렸고, 그것을 배경으로 커다란 곰들이 뒤엉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퍽퍽퍽! 퍽!
“이러지 마! 돈 줄게!”
“필요 없다!”
받을 돈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생각하는 채권자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는 것을 크랭크는 그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다.
퍽퍽퍽!
느닷없이 세면장에서 벌어진 난투극은 곧이어 떼거리로 몰려온 운영위원들에 의해 강제 진압 당했다.
“적당히 해라! 이 미친 녀석들아! 너희들은 이쪽으로 와!”
“아! 거, 살살 좀 다뤄주쇼! 아파요!”
“계집애처럼 굴지 마라! 정신병자 놈아!”
퍽퍽!
“너! 크랭크, 이 새끼야! 두고 봐라!”
붙들려 나가는 사내들이 험악하게 한 소리 하자 크랭크는 크랭크대로 으르렁거렸다.
“나중에 원금을 때리러 갈 테니 밤길 조심해라. 이 추악한 사기꾼 놈들,”
“크랭크! 네 이놈! 헛소리 그만해라!”
사내들을 끌고 나가던 운영위원이 곤봉을 들어 경고하자 크랭크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세면장에 홀로 남겨진 채 씩씩거리던 크랭크는 무언가 시커먼 것이 바닥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물러섰다.
때마침 쏟아진 빨랫감을 줍고 있던 작은 오토마톤이 고개를 들었다.
얼마 전부터 모험가 기숙사를 돌아다니기 시작한 오토마톤으로,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벗겨놓으니 정말 볼품없는 인형이구나.
싸우면서 빨래통을 쳐버린 것 같았는데, 쏟아진 것은 다시 새로 헹궈야 할 판이었다. 크랭크는 급격히 미안해졌다.
“어, 음, 미안하다. 네 빨래까지 엎어버렸구나.”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제 옷을 찾아주셨습니다.”
크랭크는 대답 없이 커다란 몸으로 쭈그려 앉아 흩어진 빨랫감의 수거를 도왔다. 루루는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 주인님의 것입니다.”
“아니야. 내가 더럽혔으니 내가 해줄게. 걱정하지 마. 좀 헹구기만 하면 될 것 같아.”
조그만 오토마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루루의 빨래의 수거와 헹굼이 끝나자 크랭크는 이제 자기 빨래를 위해 통에 물을 퍼 담았다. 그때 곁으로 다가온 루루가 냄새나는 빨랫감이 따로 쌓여있는 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제 주인님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인님의 허락을 받아온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걸 왜 나에게 물어보는 걸까.
빨래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것이 루루는 뭔가 망설이는 것 같았다. 혹시 인간의 명령을 자기 의지로 거부할 수 없으니 다른 인간의 명령으로 그걸 덧씌우려는 것인가?
머리를 좀 긁적인 크랭크는 다시 루루를 보며 말했다.
“아까 그놈들 거지? 내가 책임지겠다. 거기 그냥 둬.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해라.”
루루는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발판에 뛰어올라 자기 옷의 세탁을 서둘렀다.
촤아악! 팡팡!
헹군 다음 물기를 짜고, 두어 번 턴 다음 빨래통에 던져 넣은 루루는 이제 크랭크의 곁으로 발판을 밀고 와서 올라섰다.
크랭크는 옆으로 다가와 빨랫감을 가져가 복작이기 시작하는 이 작고 까만 오토마톤을 신기하게 여겼다.
“됐다. 네 할 일 다 했으면 돌아가.”
“다했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됐어.”
“돕고 싶습니다.”
빨랫감이 오락가락하다가 멈췄다. 루루가 그것을 붙잡고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밋밋한 오토마톤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크랭크는 손에 힘을 빼버렸다.
“그래. 고맙네.”
결국 루루의 도움을 받아 빨래를 마친 크랭크는 옷가지를 기숙사 건물 뒷마당의 빨랫줄에 걸어 놓고 나무 아래 돌덩이에 걸터앉아 마르기를 기다렸다. 옆에는 젖은 옷을 입은 루루가 앉아있었다.
“넌, 왜 그걸 입고 있어?”
“여벌의 옷이 없습니다.”
슬쩍 입고 있는 것을 살펴보니 곳곳이 찢어져 있다.
“그 친구는 참 험하게 다루는군. 벗어봐라. 꿰매주마.”
“외간 남자의 앞에서 옷을 벗으면 안 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크랭크가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또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너, 발에 그건 신발이냐?”
“예.”
원래는 레이스가 달린 고급 양말에 귀여운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거친 일을 따라다니며 무거운 무게를 버티다 보니 양말은 다 해져버렸고, 구두도 다 닳고 찢어져 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거기에 가죽 조각을 덧대어 묶어 놓았다.
“이건 정말 끔찍하군.”
허리를 숙인 크랭크는 그 가는 다리를 붙잡고 신발을 벗겨냈다. 의외로 루루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잠깐 빨래 지키고 있어.”
그걸 가지고 자기 방으로 올라간 크랭크는 가죽끈, 송곳, 망치 등을 이용해서 한참 툭탁거리더니 나름대로 손을 본 신발을 가지고 다시 내려왔다.
루루는 여전히 나무 그늘의 바위에 앉아 있다가 그를 반겼다.
“이거 한번 신어봐라.”
빨래를 지키고 있던 루루가 벌떡 일어나 맨발로 달려가더니 크랭크가 내미는 신발을 받았다. 이곳저곳 꿰매어지고 보강된 구두는 원래의 귀여움은 사라지고 다소 험악한 모양이 되었지만, 그만큼 튼튼하게 보였다.
그것을 신어보자 발이 한결 가벼워 진 것 같다.
“감사합니다. 걷기가 편합니다.”
“네 주인에게 새 신발을 사달라고 그래라. 그걸 로는 힘들다. 오토마톤은 신발이 없으면 발바닥이 닳아버린다며?”
“요청했습니다만 현재 자금 부족으로 미뤄지고 있습니다.”
“그렇군, 항상 돈이 문제지.”
고개를 끄덕이는 크랭크의 앞에서 루루가 바싹 마른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치마를 입은 오토마톤 루루 나름의 감사의 인사에 크랭크는 쑥스럽게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