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봄 소풍! (3)
“그만 웃고, 철수 준비해요들. 인원수는 다 맞지? 없어진 애들 없어? 살펴봐, 두 번 살펴봐.”
고개를 휙 돌린 아리에테가 손가락을 꼽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 없다.”
“음, 좋아! 그럼 이제 집에 갑시다!”
“오우! 집에 가자!”
마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숫자를 조합하고 있던 크랭크는 거창한 한숨을 내쉬었다.
“45명, 숫자가 맞아. 다행이야.”
하지만 숫자가 맞지 않은 쪽도 있었다. 얼굴이 새파래진 비타가 달려왔다.
“실례합니다! 여기, 사람 남지 않아요?”
“응? 혹시 모자라?”
“예! 한 명이 모자라요!”
듣고 있던 사람들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크랭크는 자기네 마차를 먼저 출발시켰다.
“나도 남고 싶다!”
“인솔자가 필요하다.”
“오토마톤들이 있지 않아? 저들 만해도 충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아리에테를 보면서 크랭크는 마부석에 앉은 오토마톤들을 가리켰다.
“지금에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보통 캐롯과 같이 일해 본 사람들은 다른 오토마톤에게도 그와 같은 유연한 사고능력을 기대했다가 크게 실망하곤 하지. 아리에테, 저 녀석들에겐 아직 최종결정권자가 필요하다. 네가 인솔해야 한다. 45명의 안전이 네 어깨에 달렸다.”
“브이! 브이!”
히히 웃음 지은 캐롯이 두 손가락으로 V를 만들어 보였다. 새삼 놀라운 얼굴로 그런 캐롯을 내려다보던 아리에테는 결국 마부석으로 뛰어올랐다.
“알았다! 먼저 사람들을 내려주고 다시 데리러 오겠다!”
“음.”
크랭크는 고개를 돌렸다.
“샤를은 남아라.”
“예.”
보고 있던 캐롯이 외쳤다.
“나머지는 출발-! 수고했어! 걱정하지 마! 찾아놓을 테니까! 이런 건 매년 있는 이벤트지!”
캐롯의 밝은 응원도 사람들의 침침한 기분을 희석시키지는 못했다. 안타까운 눈을 한 사람들이 불안한 눈을 한 사람들을 남겨놓고 떠나간다. 다만 우리 쪽에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몸을 돌린 크랭크는 비타에게 걸어갔다.
“여러분들의 인원은? 언제 없어졌는지 알겠습니까?”
“어, 어어. 지금 다들 찾으러 가서요……!”
비타는 당황하고 있었다. 크랭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서서 마차에 오른 사람들을 살폈다.
“몇 명이 오셨습니까? 누가 없어졌습니까?”
“10명, 없어진 사람은 론치라는 아이야. 젊은 처녀인데.”
“점심시간에 보신 분, 계십니까?”
한 아낙이 손을 들었다.
“나랑 같이 있었어요! 아, 저, 그리고 론치 말인데. 그, 얘가 좀…….”
“호기심이 많은가 보군요.”
크랭크의 말에 모두가 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게 말하면 사고뭉치지.”
“괜찮아! 걱정 마! 우리가 찾는 거 거들어 줄게! 사람 찾는 건 어렵지 않아. 오토마톤은 냄새도 잘 맡는다고.”
사람들의 표정이 좀 안도하는 것 같았다. 크랭크는 비타와 샤를을 그곳에 남겨두고 마지막으로 보았다는 근방의 숲으로 걷기 시작했다.
크랭크는 숲을 바라본 채로 입을 열었다. 곁에 있던 캐롯이 고개를 들었다.
“캐롯.”
“응?”
“거짓말은 좋지 않아.”
“나 거짓말 안 했는데?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건 사실이잖아? 그걸로 사람을 찾는 건 별개지.”
크랭크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캐롯을 내려다보았다.
“어서 가자! 찾아서 엉덩이를 때려주자!”
둘은 이제 뛰기 시작했다.
* * *
한편…….
모두가 찾고 있는 론치는 단발머리에 푸른 눈, 주근깨가 뿌려진 얼굴을 한 소녀였다. 그녀는 송이버섯을 따러 숲 안쪽으로 들어왔다가 그녀 기준에 엄청난 것을 발견했다.
“오크! 세상에! 오크야! 그것도 여자야!”
“캬아아아악!!”
올무에 다리가 걸려 비명을 내지르는 오크 여자가 인간 냄새를 맡고 고개를 돌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오우오우-! 해치지 않아요. 내가 풀어줄게요. 오크는 사람 말도 좀 한다던데. 어때요?”
오크 여자는 고통에 겨워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의미 없는 위협성만 질러댔다. 뭔가 도구가 없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는 론치의 시선에 내용물을 쏟아내고 엎어진 바구니가 들어왔다.
“와! 오크도 송이버섯의 맛을 아는구나! 아니, 잠깐, 그게 먼저가 아니지. 잠깐만, 내가 벗겨볼게. 가만 좀 있어 봐.”
“캬아아악!!”
인간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기겁한 오크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다리는 부러져서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그 다리를 물고 있는 올무는 절대로 조잡한 것이 아니었다. 대 몬스터 포박용으로 만들어진 강철 이빨 트랩이었다.
다리가 잘리지 않은 것은 함께 끼어있는 나무 조각이 버티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와, 이건 내가 못 풀겠는데? 사람을 불러와야겠어.”
“으흐으윽……! 크으흑!”
오크 여자의 흐느낌에 론치가 고개를 돌렸다. 쭈그려 앉은 론치가 오크 여자를 보면서 물었다.
“많이 아파?”
“으으윽…….”
오크 여자와 인간 여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두 종족이 쌓아온 깊디깊은 갈등의 골은 지금 여기에서는 아무런 버프도 발휘하지 못했다.
“내가 바보라서 그런가? 그냥 불쌍하기만 한데?”
“그건 네가 당한 적이 없어서 그런 거야. 이 정신병자야.”
날카로운 목소리, 잘생겼다고 소문이 자자한 나머지 팬클럽 결성 소문까지 들리는 포니테일 미남자가 씩씩 숨을 몰아쉬며 롱소드를 비켜 들고 나타났다.
보리스는 눈앞의 오크 여자와 올무를 보고는 상황을 이해했다.
빠른 판단을 마친 그는 거칠 손길로 론치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다들 기다려.”
“어, 어엇?! 저, 저 여자는요?”
“누구? 여기, 여자는 너뿐이야.”
어머나.
론치가 약간 달아오른 얼굴로 볼을 감싸며 고개를 돌리자 기가 찬 보리스는 손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그때쯤 지오와 코비도 숨이 목까지 차오른 상태로 도착했다.
“허억! 헉! 찾았어?!”
“어서 가자.”
“마, 말도 없이 사라지면 어떡해요! 찾았잖습니까!”
코비의 목소리에 론치가 찔끔했다.
“소, 송이 좀 따려고요. 어, 근데! 저 오크 여자는 어떡해요?! 다쳤어요!”
산비탈의 둔덕으로 올라온 지오와 코비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정말 올무에 다리를 잡힌 오크 여자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오크는 몇 번 보긴 했지만, 그 오크 여자는 난생처음 보았다. 대부분의 여성체가 그러하듯 오크 여자도 골반과 가슴이 크게 발달했는데, 굳이 따지자면 드워프 여성과 비슷했다. 드워프 여성들은 오크 여성과 비교하는 게 싫어겠지만…….
굳은 얼굴의 지오가 등을 돌렸다.
“우리가 나설 필요까지는 없어. 가자.”
그것 보라는 듯이 보리스가 론치의 손을 잡아끌었지만, 론치는 고집이 센 여자였다.
“안돼요! 뻔히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오크! 여자! 라고요! 여자!”
보리스는 저 주근깨 소녀의 행동에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야, 꼭 하는 짓이 비타 같지 않냐?”
지오와 코비가 동시에 얼굴을 찡그렸다.
“비타를 너무 무시하지 마. 그건 그래도 적과 아군을 구분할 줄 알아.”
일행 중에 가장 덩치가 큰 코비가 나섰다. 그는 론치를 붙잡더니 어깨에 들춰 올려 버렸다.
“으아악! 엄마한테 물어봐야 해요!”
“어후웃! 뭘 물어봐요! 소름 돋는 소리 마요! 가자!”
인간들이 서로 툭탁이더니 일행인 여자를 데리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다리를 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 도와주…….”
코비에 어깨에 올라가 있던 론치가 그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오크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간절한 눈빛이었다.
“도와달래요!”
퍽!
“으헉?!”
론치가 무릎을 휘둘러 코비의 가슴을 찍어버렸다. 그 덕에 중심을 잃고 쓰러진 둘은 비탈을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론치는 무릎이 좀 까지고 옷이 흙에 더러워졌지만 씩씩하게 비탈을 다시 기어 올라와 오크 여자의 다리를 물고 있는 강철 이빨 트랩을 살펴보았다. 오크 여자는 이제 가만히 있기만 했다.
“함정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맞아, 오크는 사람을 잡아먹어요.”
“그런 건, 나중에 따지시고! 이 여자를 그냥 두고 갔다간 나는 50년 뒤에 큰 후회를 할 것 같단 말이에요!”
강철 이빨을 잡고 낑낑거리는 론치를 보고 지오가 거창한 한숨을 내쉬면서 팔을 걷어붙였다.
“열어만 주고 가자.”
“야! 사람이 좋아도 유분수지!”
지오가 웃는다.
“나도 50년 뒤에 오늘 일을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서 그래.”
“어휴-! 나는 몰라!”
그 와중에 씩씩거리는 소리와 함께 코비가 코피를 닦으면서 터벅터벅 올라왔다.
“이 여자 어디 있어! 피나잖아! 아오! 가슴 아파!”
“도와줘요!”
“야! 너는! 뭐, 뭐야? 지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러게 말이다. 파티 이름은 구급봉사활동단이 좋겠네. 제길.”
보리스가 주변을 경계하며 쓰게 한 소리 했다. 말라깽이들이 낑낑거리는 것을 보다 못한 코비도 나섰다.
잠시 후…….
그들의 흔적을 찾아 따라온 크랭크가 본 것은, 트랩을 밟고 쓰러진 오크 여자와 그 트랩을 벌리려고 노력하는 초보 모험단의 모습이었다.
캐롯은 눈을 좀 비비더니 말했다.
“크랭크. 내 눈이 이상해. 이상한 게 막 보여. 이건 환상이야?”
“걱정 마. 나도 같은 게 보이니까.”
그들을 맞이한 보리스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크랭크는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비켜보십시오.”
“어엇! 크랭크 아저씨!”
전술 주머니에서 활을 만들려고 가져온 공구를 꺼내든 크랭크는 트랩의 해제 핀을 잡아당긴 다음 캐롯을 불렀다.
“캐롯, 이빨을 벌려줘. 그리고 당신들은 그 틈에 다리를 빼내십시오.”
“이얍!”
캐롯이 그걸 단숨에 벌리자 크랭크는 재빨리 말했다.
“빨리-!”
지오가 부러진 오크 여자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잘리지만 않았을 뿐 겨우 붙어있는 수준이었다. 오크 여자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다리를 빼내고 드러난 트랩의 스위치를 재빨리 올려 고정한 크랭크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보리스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오, 오크다. 오크가 몰려왔어.”
자리에서 일어선 지오와 코비, 론치가 겁에 질려 주변을 살폈다. 산비탈 위에 시커먼 그림자와 함께 시뻘건 눈들이 나타나 있었다. 점점 내려오는 것인지 흙과 돌이 마구 굴러 떨어진다.
캐롯이 하하 웃었다.
“우리가 도와줬다고 해도 믿지 않겠지? 앙숙이니까! 앙숙!”
“……먼저 공격하면 반격해라. 봐주지 마.”
“예압! 이히히히! 자신 있냐! 오크들아! 오늘 저녁은 오크 고기 스튜를 만들어보자! 뭐해, 등신들아! 싸울 준비해! 의뢰인을 지켜!”
론치가 당황했다.
“우, 우리가 살려줬잖아요?! 살려준 건데……!”
그녀를 돌아본 캐롯이 엄지손가락으로 멀리서 으르렁거리는 오크들을 가리켰다.
“아, 너는 도와주면 무슨 보답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구나? 최소한 은혜는 기억해줄 거라고 말이야.”
오토마톤이 잔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비프스튜에 오렌지 주스 한 방울 떨어뜨린다고 오렌지의 풍미가 느껴지겠니? 지금 쟤들 눈에는 우리가 자기네 여자를 건드린 불한당으로 보여. 이상과 현실은 항상 동떨어진 곳에서 나타나지. 케케케!”
분기탱천한 캐롯이 빠르게 외쳤다.
“같이 한번 해봤지?! 내가 앞장설게! 칼쟁이는 내 뒤! 활쟁이는 엄호!”
치이이익……!
갑자기 하얀 연기가 솟아오른다 싶더니 오크 여자가 놀라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는 순식간에 붙은 상태였다.
쭈그려 앉은 크랭크가 힐링 포션 병을 들고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있었다.
오크 여자는 위를 올려다보며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몹시 힘겨운 목소리로 인간 모험가들과 바닥의 함정과 쏟아진 바구니를 가리키며 알아들을 수 없는 오크 말로 한참 떠들어댔다.
“뭐라는 거래?”
“글쎄, 무척 흥미로운 상황이네. 좀 더 지켜보자. 하지만 경계는 늦추지 말도록.”
크랭크가 반쯤 사용하고 남은 힐링 포션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잔뜩 긴장한 초보 모험가들과는 별개로 팔짱을 낀 캐롯은 도끼눈을 뜨고 웃기만 했다.
그 와중에 론치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더니 바닥에 떨어진 바구니를 챙겨 들고 쏟아진 것들을 주워 담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오크 여자에게 덥석 안겨 준 다음, 안에 든 송이버섯을 하나 꺼내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오! 맛있어!”
그걸 보는 지오들은 물론 캐롯마저도 론치의 정신상태를 의심했다. 오크 여자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던 크랭크도 갑자기 앞으로 나서더니 바구니 안에 손을 쑥 집어넣어 송이버섯을 꺼내 투구를 슬쩍 들고 입에 넣어 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오크 여자의 등을 앞으로 살짝 떠밀었다. 대신 그는 뒤로 물러섰다.
“자극하지 않도록 천천히 물러섭시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표정을 하고 남아있던 캐롯을 마지막으로 다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적당히 멀어지자 오크들이 내려와서는 오크 여자를 이리저리 살피며 저 밑으로 내려간 인간 모험가들을 노려보았다.
밑에서 목소리가 올라왔다.
“나는 론치!”
“닥쳐! 좀!”
“론치론치론치! 로오온치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