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프로포즈!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기를 나누고 모험담을 늘어놓았다. 크랭크는 흑마도사 잔당에 대한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두었다.
여기서 캐롯은 올리브를 다시 만났다. 작년 가을쯤에 보고 처음 보는 것이었다.
“캐롯?”
올리브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린 캐롯은 가만히 올리브를 보았다. 그리고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리고 소리를 뺙 질러 올리브를 놀래줬다.
“왁!”
“으갹?!”
깜짝 놀란 올리브가 엉덩방아를 찍었다. 히히 웃은 캐롯이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는데, 이번엔 하얀 손이었다.
그래서 올리브가 좀 신기한 눈으로 그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안녕, 올리브.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으, 응.”
손을 잡고 일어서는 올리브를 쳐다보던 캐롯이 환하게 웃었다.
“와! 너, 키 좀 컸는데? 작년엔 나랑 거의 비슷했잖아.”
“어? 그런가?”
“우리 올리브도 이제 11살이다! 좀 만 더 지나면 엄마를 닮아서 미인으로 자랄 거야!”
술기운이 좀 오른 게토가 즐거워했다. 그를 올려다보고 웃어준 캐롯이 올리브에게 윙크를 찡긋했다.
“올리브는 좋겠다. 미인으로 자랄 수 있어서. 나보다 커져서 몰라보면 어쩌지? 자주 놀러 와서 얼굴도장 찍어놔야겠는걸?”
“자주 놀러온다고? 그럼 우리 친구야? 내 친구 되어 주는 거야?”
올리브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캐롯은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주변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거나 했다.
“와, 올리브 좋겠다. 캐롯이 친구라니.”
“이 녀석 좀 위험한데 괜찮을까? 캐롯, 너 올리브한테 이상한 거 가르쳐 주지 마.”
“올리브도 조심해. 이 녀석 말이 험해. 욕쟁이야.”
허리에 손을 올린 캐롯이 으헤헤 웃었다.
“언어의 발달 정도는 욕이 얼마나 많은지로 알 수 있다고 어떤 언어학자가 그랬대! 더럽다고 외면하면 안 돼! 사실은 그것도 우리네의 생활이거든? 알고 무서워하는 거 하고 모르고 들이대는 건 다른 거지!”
모험가들이 놀라운 표정을 했다. 한 사내가 올리브를 보았다.
“어쩌면 올리브에겐 좋은 스승님이 될지도 몰라. 욕만 안 가르치면.”
“에이~! 욕 안 한다니깐요? 그거 말고도 도발할 수 있는 말이 얼마나 많은뎅!”
보고 있던 게토가 흐뭇하게 웃었다. 아내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캐롯에게 더 인간다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친구와 선생님이 되어 줄 거야.
“오, 다들 모여 계셨군요.”
뒤늦게 로마니와 울파가 도착했다. 사람들이 그들을 환영했는데, 로마니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는 몹시 놀라워했다.
“헉! 경비대장님!?”
“어, 흠!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내 잠시 들러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로마니가 하하 웃으며 셀린 제1경비대장을 소개했다.
“퇴근길에 모셔 왔습니다. 경비대장님이 안 계셨다면 이번 흑마도사 잔당 소탕은 어려웠을 겁니다. 최종 결제 라인에서 물밑 협상을 해주셨지요.”
하지만 그의 소개는 뒷전이었다. 정원에 모인 모험가들은 셀린 경비대장과 로마니 사이의 소문이 더 신경 쓰였다.
그런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기정사실! 기정사실이 일어났어! 으흐읏하하!”
사람들을 헤치고 캐롯이 셀린에게 달려갔다. 그 붉은 머리카락이 원래 주인을 만나 반갑게 휘날린다.
“경비대장님! 반가워요. 요즘 어때요?!”
“아, 캐롯인가? 요즘 어떠냐니?”
도끼눈이 된 캐롯이 으흐흣 웃으며 입가에 손을 세웠다.
“로마니 아저씨랑 잘 되어가고 있는지 물어보는 거지요. 케케케.”
사람들의 귀가 엄청나게 커졌다. 더불어 셀린의 얼굴도 달아올랐다. 하지만 셀린은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녀는 로마니를 한번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대답을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사람들이 기뻐했다. 거의 난동을 부릴 정도였다.
“이대로 피로연! 피로연이에요!”
“으왁?! 야! 넌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숨어있던 보좌담당관이 사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경비대원들도 몇 명 슬쩍 끼어있었다. 셀린 경비대장이 질겁했지만 두 사람의 만담과 케미를 보면서 함께 모인 모험가들도 즐거운 표정과 시간을 보냈다.
* * *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크랭크들은 로마니와 게토에게만 인사를 하고 도중에 슬쩍 돌아갔다.
“공방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늦으면 걱정할 겁니다.”
“자네도 가족들이 생겼군. 참 좋은 일이야.”
게토와 로마니가 기뻐했다. 크랭크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공방으로 돌아가자 벌써 식사 준비를 마쳐놓은 투나가 환하게 웃으며 돌아온 사람들을 반겼다.
“어, 어서 와! 밥 다 됐어.”
“그래.”
“역시 우리 집이 최고다.”
“으, 응. 흐흣.”
내내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투나가 기쁘게 웃었다. 자리에 앉은 크랭크는 작업대에 누워있는 베누스를 보고 물었다.
“베누스가 돌아왔구나. 방열 가발이 바뀌었군? 어떻게 된 거지?”
“너 찾으러 가넷 여사 가게에 갔다가 바꿨어. 남부 기술을 탐구하고 싶다던데.”
“음. 이해한다.”
“화, 화살을 박은 채로 돌아왔었어. 내, 내부에 인공 근육이 상한 것은 교환했는데, 장갑판에 생긴 구멍은 어, 어떻게 하지?”
“교환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수리하는 방법도 있다. 내일 가르쳐 주마.”
“응.”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캐롯이 주전자를 들고 물그릇을 채워주면서 말했다.
“좀 있다가 잠깐 나갔다 올게. 도서관에 빌린 책을 가져다줘야 해.”
“저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드물게 샤를이 끼어든다. 크랭크는 허락했다.
“그래, 가끔 외출도 중요하다. 너무 집안에만 있으면 투나처럼 돼.”
“아, 아냐. 나도 요즘 밖에 외출 나간다고. 빠, 빵집, 약방에, 고르곤 님의 마녀공방······.”
크랭크가 눈을 크게 떴다.
“고르곤? 마녀공방?”
“아, 이야기하지 않았지. 너 쓰러져 있을 때 있었던 일인데.”
캐롯의 이야기를 들은 크랭크는 짧은 감상평을 남겼다.
“마녀는 종잡을 수 없군.”
“그러니 위험하지. 나중에 시간 되면 인사라도 한 번 가봐.”
“그래. 차라리 잘 됐다. 포션을 사러 멀리 가지 않아도 되겠어.”
“가격을 들으면 깜짝 놀랄걸?”
일가족의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까지 마치자 캐롯은 책을 쌓은 보따리를 샤를과 나눠 들고 공방을 나섰다.
밤거리를 걸어 도서관에 도착한 캐롯은 도서관 건물 근처 길가에서 익숙한 오토마톤을 발견하고 샤를을 올려다보았다.
“먼저 들어가 있을래? 난 볼일이 있어.”
“알겠습니다.”
샤를을 보내고 쫄래쫄래 걸어간 캐롯은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 아래에 서 있는 울파에게 다가갔다.
“울파?”
긴 오렌지색 방열가발을 늘어뜨린 오토마톤 울파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캐롯.”
“너, 길가에서 뭐 해?”
“나는 작전을 수행 중.”
“작전?”
“읍읍-?!”
갑작스러운 신음에 깜짝 놀란 캐롯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포박당한 보좌담당관과 휘하 경비대원들이 건물 그림자 속에 숨겨져 있었다.
“으으읍! 읍!”
“어어? 울파? 저기 경비대 언니가 무서운 눈을 하고 있는데?”
“조용히.”
고개를 돌린 울파가 손가락을 세웠다. 아까부터 뭘 보고 있나 싶어서 나무 너머로 고개를 내민 캐롯은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울고 있는 셀린 제1경비대장과,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로마니의 모습이었다.
“프프프프프로포즈야?!”
“방금 시작, 아무도 방해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울파는 길드 유명 오토마톤 중의 하나로, 마스터인 로마니를 도와 기관, 단체, 국가가 연루된 복잡한 문제나 사건을 조사하고 해결하며 정보수집에서부터 전투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높은 실력을 자랑하는 녀석이다. 그 울파가 눈에서 붉은빛을 뿜어냈다.
“절대로 주인님들의 사랑을 방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내가 반드시 저들을 지켜내겠다.”
무서울 정도로 강한 다짐을 내비치는 울파를 좀 올려다보던 캐롯은 이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로마니는 반지를 꺼내 보이며 다시 한번 말했다.
“결혼합시다.”
손등으로 눈가를 닦던 셀린이 꺽꺽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훌쩍, 이, 인제 와서 이, 이런 거 하면 뭘 해요······.”
“당신 곁에서 함께 늙어가고 싶습니다. 내 남은 인생을 드릴 테니, 당신의 남은 인생을 나에게 주시오.”
그 말에 동요한 셀린은 입을 크게 벌리고 엉엉 울었다. 로마니는 웃으면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 어어, 저기, 나, 나는 요리 같은 거 잘못해요! 청소나 빨래도 잘······!”
“괜찮습니다. 내가 잘합니다.”
“왜, 왜 지금 말하는 거예요. 5년만 더 일찍 했더라면······!”
로마니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엉망이 된 얼굴로 콧물까지 줄줄 흘리던 그녀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환하게 미소 지은 로마니가 그녀의 왼손을 잡아든다.
그걸 좀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던 캐롯이 도끼눈이 되었다.
“이런 안 돼! 울파! 이 나무를 흔들자!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겨줘야지!”
고개를 끄덕인 울파가 벚나무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나무로 뛰어오른 캐롯도 커다란 가지 하나를 붙잡아 마구 흔들어 댔다.
쏴아아-!
때마침 불어온 부드러운 봄바람이 쏟아지는 벚꽃잎을 옮겨 주었고, 그것들은 수은등 불빛 아래의 두 사람에게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환상적인 벚꽃잎 속에서 로마니는 셀린의 왼손 네 번째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손가락에 끼어있는 반지들을 들어보던 셀린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다가 두 손을 들어 로마니의 얼굴을 붙잡아 뜨거운 딥키스를 남겨주었다.
얼굴을 떼어낸 셀린이 달아오른 얼굴로 시선을 돌리며 기어가는 투로 말했다.
“······저, 겨, 결혼하면 저 가, 갖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뭡니까? 내 뭐든 구해 드리리다.”
고개를 돌린 셀린은 이제 로마니를 정면으로 보면서 배에 손을 댔다.
“아, 아기.”
이번엔 로마니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코피라도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입을 꾹 다문 그는 작은 체구의 셀린을 번쩍 안아 들더니 말했다.
“으음! 노, 노력해봅시다!”
늦은 나이에 맺어진 두 사람은, 그렇게 벚꽃잎 나부끼는 밤거리를 재빠르게 걸어갔다.
도서관 근처 벚꽃 가로수의 가지에 매달린 캐롯이 고개를 내렸다. 아래에는 오렌지색 방열 가발을 바람에 나부끼는 울파가 있었다.
나무 위와 아래의 두 오토마톤이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팔을 휘둘러 손바닥을 마주쳤다.
짝-!
* * *
“다들 봄 소풍 준비는 끝났어?”
마리아의 여관 입구에서 허리에 손을 올린 캐롯을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대부분 여성들로, 허리에 큼직한 바구니나 자루를 하나씩 끼고 있었다.
군데군데 장난스러운 아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저기! 정말 얘들도 데려가도 되는 거지?”
“물론! 작년과는 다르다고! 소개할게! 아군에겐 친절한 양철 거인, 크랭크!”
양철 투구를 뒤집어 2미터짜리 쓴 거인이 마차를 손보다가 투구를 돌리고는 살짝 까딱였다.
“다음으로는 전투용 오토마톤 샤를! 로테! 베누스!”
여관 안쪽에서 전투복에 완전무장 한 상태의 오토마톤들이 걸어 나왔다. 캐롯은 신이 나서 외쳤다.
“그다음으로 증기 망토의 여기사. 아리에테.”
철크럭-!
시온의 3차 개수 작업을 완료한 아리에테가 나타났다. 판급 갑옷으로 장갑판을 덧대고 방열 소재의 천으로 파란색 치마도 만들어 붙였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좀 더 갑옷기사에 가깝게 바뀌었다.
“어머나······! 멋져.”
“음,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수리를 마친 것이라.”
남녀가 좋아할 코드는 다 들어가 있어서 처녀들은 물론 사내아이들도 그녀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공방의 조수 1호! 집순이! 투나!”
“으히히······!”
후드를 뒤집어쓴 투나는 이미 마차에 올라앉아 있었다. 이번 봄나물 뜯기에는 투나도 참가 의사를 밝혔다. 이유는 간단했다.
“야, 약초! 돈 주고 사는 것보다 지, 직접 양질의 것을 채집하는 것이 좋지. 어, 어서 가고 싶다.”
“아, 그리고 쟤는 방구석 폐인이라서 낯을 엄청나게 가리니까 주의해주길 바라.”
후드를 써서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처녀들과 아낙들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소개를 마친 캐롯이 두 팔을 들고 외쳤다.
“어때? 든든하지? 이 정도 무장이면 웬만한 중형 파티 수준이라고! 걱정하지 말고 봄 소풍을 즐겨! 자, 그럼 여기서 아르곤 7번가 부인회 회장님께서 한 말씀하시겠습니다.”
캐롯이 옆으로 물러서자 작업복 차림의 마리아가 호호 웃더니 말했다.
“동네 아줌마들 나물 뜯으러 나가는데 데려가는 호위로는 너무 거창하지만, 우리야 좋지. 출발하자꾸나.”
크랭크는 짐마차를 모두 2대 준비해왔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을 태우고 마차는 바로 출발했다.
대로를 지나 성문에 다다르자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저기는 무슨 오토마톤을 몇 대나 태우고 가는 거야?”
“마리아가 회장으로 있는 부인회구나, 아는 모험가에게 부탁했다고 하더라고.”
“안녕하세요!”
“그쪽도 나가세요?”
마차에 앉은 사람들끼리 서로를 알아보고 안부 인사를 하거나 하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후 크랭크들의 차례가 왔다.
마차를 둘러본 성문 경비병 월터가 말했다.
“너희들 점점 구성이 화려해지는구나. 보기 좋다.”
“엣헴!”
마부석에서 일어선 캐롯이 코를 세우며 잘난 체를 하자 월터와 그의 부하 경비병이 낄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