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모험가! (4)
허쉬는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남은 놈들이 분명히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거야. 적당히 들고튀자. 베누스! 이 주변 숲속을 뒤지고 다니면서 거꾸로 매달린 생존자들을 찾아봐. 시간 없으니 오크는 덤비지 않으면 무시해! 나머지는 전리품을 뜯어내자! 빨리빨리!”
이때 유에스가 조금 크게 외쳤다.
“동료들은 이미 구출했습니다. 내가 늦게 나타난 이유는 그 때문이었지.”
뒤를 돌아본 허쉬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오른손의 엄지는 유에스를 향했다.
“베누스! 주변 경계! 두 사람은 적당히 몸을 숨겨! 자! 털자!”
“무기부터 주워! 자동 석궁! 히트 소드! 겁나 비싸게 팔릴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에스가 자동석궁을 하나 주워 왔다. 아까 허쉬들을 저격했던 것이었다.
“이건, 내가 갖지.”
“좋을 대로 하십쇼.”
전리품은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다. 그리고 지금은 언쟁을 벌일 기력도, 시간도 없었다. 부서진 가옥을 뒤지고 다니며 쓸 만한 것을 적당히 챙긴 그들은 이제 빈 마을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걸 보는 유에스와 이미스의 얼굴이 몹시 씁쓸했다.
“이 마을 사람들도 새로운 삶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이곳에 왔을 텐데.”
“가죠, 엘프 아저씨. 애초에 너무 멀리 나온 이 사람들 잘못이에요.”
오토마톤의 경계 아래 이동을 시작하는 모험가들을 보면서 유에스는 자동석궁을 든 채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대들은 슬퍼할 겨를이 없군. 그저 나아가기 바쁘니 말이야. 내 눈에는 그저 불꽃같아.”
앞서가던 이미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억지로 웃고 있었다.
수 시간 뒤, 오크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곳의 은신처에서 정신을 차린 일행들은 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넋을 잃은 표정을 하고 마주 앉았다.
죽음직전까지 몰고 간 전투상황과 포션의 남용으로 다들 얼굴은 물론 몸도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흐흐,”
“히히.”
“크크.”
세 남자가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들 옆에 세워진 마차에는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죽을 뻔했지만 성공이었다.
모험에서 살아남은 모험가는 목숨을 건졌으니 부자라고는 말하지만 그래도 뭔가 남는 게 있어야 한다. 이것도 엄연한 직업이니까.
“경사로세. 축하드리는 바요. 덩달아 나도 기쁘군.”
으쌰으쌰 어깨춤을 추고 있는 세 남자를 내려다보며 베누스와 함께 철야로 그들을 지킨 엘프 유에스가 퀭한 눈을 하고 손뼉을 쳤다. 좀 비틀거리며 일어난 허쉬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덕분입니다.”
“내가 뭐 한 게 있나.”
그러면서도 그의 손을 잡아주는 유에스였다. 허쉬는 마차의 짐칸에 실려 있는 3구의 시체와 이미스가 돌보고 있는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유에스는 쓰게 웃었다.
“두 사람이라도 살았으니 됐어.”
동료가 죽은 사람을 앞에 놓고 기뻐하는 것은 좀 아니었다 싶었던 허쉬가 머리를 긁으며 미안한 척을 해 보였다.
“베누스는?”
“여기 있습니다.”
근처의 바위에 올라가 사방을 경계하고 있던 베누스가 머리에 태양을 올리고 고개를 돌렸다. 허쉬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웃었다.
“반은 네 덕이다. 고마워.”
항상 찌푸린 표정 아니면 비아냥거리는 얼굴을 하고 다니는 허쉬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웃는 게 동네 악동 같다. 잠시 그를 내려다보던 베누스가 마주 엄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나머지 반은 누구의 덕입니까?”
이 오토마톤, 크랭크의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말하는 게 그 땅콩 같다고 다들 생각했다.
허쉬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팔짱을 한 로이가 코를 바짝 세운 채 앉아있었다.
“음, 뭐, 다 나의 미래를 보는 날카로운 눈빛 덕분이지.”
“그래, 나머지 반은 네 덕이다. 자식아.”
툴툴거렸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승리의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
불을 질러놓은 오크 마을은 나중에 한 번 더 보러 오기로 하고 바로 철수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의 정오, 그들은 그리운 방주도시 아르곤에 도착했다.
아르곤이 방주도시로 개장했을 때부터 성문 경비병으로 살아오고 있는 경비병 월터에겐 한 가지 특기가 있다. 좋아서 연마한 것이 아니고 하도 많이 보다 보니 자연스레 터득한 것이다.
바로 사람의 표정과 감정을 읽는 것, 아무리 감추려 해도 사람의 표정이 그리 쉽게 숨겨지지 않는다.
“저희들 왔습니다.”
마차에 앉은 로이가 피곤한 얼굴로 통행증을 보여주었다. 안면이 있는 얼굴들이기 때문에 형식상 그걸 힐끗 보고 되돌려준 월터가 그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고생했다. 인석들아. 어서 가서 씻고 자라.”
마부석에 앉은 로이와 파핀이 히히 웃었다. 그때 짐칸에서 뛰어내린 엘프 유에스가 그에게 다가왔다.
“일주일 전쯤 앞서 나갔었던 모험가 파티입니다. 사망자의 시신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환자도 있습니다. 병원으로의 이송을 요청합니다.”
엘프의 얼굴을 슬쩍 바라본 월터는 고개를 돌리고 사람을 불렀다. 경비대 오토마톤과 대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환자들과 시신을 인계받아 옮겼다.
급히 실려 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는 엘프 남자를, 월터가 가만히 쳐다보다가 슬쩍 물었다.
“엘프님, 괜찮소?”
“예?”
유에스가 고개를 돌리자 긴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창을 어깨에 기댄 경비병 월터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소. 당신 탓이 아니오.”
그때까지 평온을 유지하고 있던 엘프 유에스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마차의 짐칸에 팔과 머리를 기대고 낮게 흐느꼈다.
엘프 남자가 우는 것을 처음 본 사람들은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 * *
뽕-!
치이익……!
차갑게 식힌 유리병의 코르크 마개를 뽑자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것을 허둥지둥 입으로 후르릅 빨아들인 로이가 그대로 병을 세우고 내용물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비슷한 짓거리를 파핀과 허쉬, 유에스도 함께 하고 있었다.
“벌컥벌컥!”
자기 몫의 맥주병을 손에 쥐긴 했지만, 코르크 마개를 뽑을 엄두를 못 내고 있던 신관 이미스가 기가 찬 표정으로 외쳤다.
“미쳤어요?! 당신들 배에 구멍 났었다고요! 거기서 막 흘러나올 거라고요! 죽는다고요!”
하지만 소용없었다. 남자들의 수명이 짧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푸흐하-!”
“끄으어억! 살 것 같아!”
“크하-! 다른 건 다 엉망이지만 맥주 맛만은 최고지!”
모험에서 살아남은 모험가들이 맥주병을 손에 든 채 저마다 감탄사를 내놓았다.
유에스는 약속대로 맥주를 대접했다. 길가 노점에서 파는 병맥주였지만 그 맛은 각별했다.
길드에서 정산도 끝났고, 수리비가 걱정되지만, 오토마톤도 반납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차에 실어 온 잡동사니를 처분하고 쉬는 일만 남았다.
몸이 나으면 또 모험을 나가야지.
허쉬가 고상하지 못하게 병나발을 불고 있는 엘프를 쳐다보았다.
“엘프 아재는 이제 어떻게 해요?”
입에서 병 주둥이를 내린 그가 허쉬를 보았다.
“글쎄, 한동안 병원에 입원한 파티 멤버들을 돌봐야 할 것 같군. 이 친구들이 재기하려나 모르겠지만.”
“혹시 모험을 계속할 생각이면 연락해주세요. 파티 멤버 상시 모집 중이니까.”
맥주병을 손에 든 엘프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가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초대는 참 고맙군. 그래, 자네들 파티 이름은 뭔가?”
세 남자가 외쳤다.
“체리보이즈!”
다시 맥주를 들이켜던 엘프 남자가 풉 하면서 그걸 뿜어놓았다. 쿨럭거리며 기침을 좀 한 그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
“미안하네만 안 되겠군. 내가 들어가면 그 파티 이름을 못 쓸 거야. 나는 체리보이가 아니거든? 집에 가면 이만한 손녀가 있지.”
팔을 돌린 유에스가 이미스의 머리 위에 슬쩍 손을 올려 보였다. 이 와중에 파티 이름에 대한 뜻풀이를 듣게 된 이미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뭐, 그게 그런 의미였어요?”
“응!”
세 남자가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이번 의뢰를 함께 수행하며 그들에 대한 인식이 살짝 바뀐 이미스가 흥하며 고개를 돌렸다.
“신관이 필요하면 다음에도 또 불러주셔도 된다고요.”
맥주병을 들고 있던 남자들이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다가 히죽 웃었다.
“이참에 너도 고정으로 오지 않을래? 여기 엘프 아저씨 있으면 화장실도 걱정 없잖……?!”
무신경하게 지껄이던 허쉬는 병을 거꾸로 잡고 덤벼드는 그녀를 보고 기겁했다.
“아! 으아! 야! 아파!”
퍽퍽!
“당신은 그 입을 좀 조심하세요! 그러니 아직 체리보이지!”
내일 저녁에 다시 모여 뒤풀이 겸 밥이라도 먹기로 하고 다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갔다. 이미스는 유에스가 신전까지 바래다주기로 했다.
손을 흔들어주고 거리를 걸어가는 두 사람을 쳐다보던 파핀이 조바심 같은 것을 냈다.
“나, 나랑 데이트 약속 잊지 않겠지?”
“너 지금 저 둘이 어울린다고 생각 하냐? 부녀다 부녀.”
“부녀가 뭐야. 손녀가 있다고 하던데, 엘프는 나이가 안 드러나서 좋네. 그리고 들었잖아? 저 아저씨 인간 싫어한다고.”
그의 독백을 기억한 파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마차에 실린 잡동사니를 처분하기로 한 그들은 자주 가는 무기점 골목으로 향했다.
“오-! 히트 소드야! 그것도 소재가 텅스텐!”
“이 자동 석궁도 꽤 상태가 좋은걸?”
“여기 롱소드 전부 30만에 사지!”
“와! 사장님! 고철로 쳐도 그 정도는 나오겠어요! 몇 개는 상태 좋은데 좀 더 쳐 줘요!”
마차의 짐칸에 실린 것들을 구경하면서 무기점 주인들이 매입 가격을 부르기 시작했다. 협상은 파핀에게 맡겨놓고 몸을 돌린 허쉬는 가까운 곳에서 로이를 발견했다. 그는 좀 떨어진 골목길에서 어떤 가게의 아가씨를 상대로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뭐해?”
“어! 허쉬! 여기야. 여기! 내가 스크롤 산 곳!”
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가게 점원인지 주인인지 모를 여자를 보았다. 안경을 쓰고 메이드 복장을 한 그녀가 방긋 웃었다.
“손님, 본 점포의 물건은 어떠셨습니까? 만족스러우셨나요?”
아주 복잡한 감정이 솟아오른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고, 그 위력 또한 대단히 인상 깊었기 때문에 속이 쓰려오는 것을 꾹 참으며 허쉬가 물었다.
“다른 건 뭐가 있죠?”
* * *
“수리 견적이 나오면 연락을 주도록 해. 그쪽 파티에 청구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길드 담당자의 말에 베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몸에는 여전히 화살이 박힌 상태였다. 허쉬가 뽑아보려고 했지만, 괜히 건드렸다가 일이 커질까 봐 손을 대지 못했다.
인사를 하고 복귀하려고 몸을 돌리는데 길드 입구로 캐롯이 나타났다.
“크랭크! 여기 있냐? 혹시 우리 큰 얘 본 사람!?”
“응?”
안쪽에서 오고 가던 사람들은 서로를 보면서 수군거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 종일 못 봤는데?”
“없어졌어?”
아랫입술을 삐죽 내민 캐롯이 허리에 손을 올렸다.
“아침에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더니 정오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잠깐 찾으러 나왔어요.”
“오, 기특한 녀석이네.”
모험가들이 저마다 칭찬했다. 접수처의 오리온에게도 크랭크의 소재를 물어보던 캐롯은 마침 그곳에 서 있던 베누스를 보고 반갑게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베누스! 돌아왔구나! 마침 잘 됐어! 나랑 같이 크랭크를 찾으러 가자!”
“알겠습니다.”
길드를 나선 두 오토마톤이 들린 곳은 2번가의 가넷 여사의 가게였다.
“여기는 우리 방열 가발을 만들어주는 곳이야.”
베누스는 가게의 통유리 안쪽에 걸려있는 각양각색의 가발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캐롯의 뒤를 따랐다.
“계세요?”
“어, 어서 오세요!”
마침 안에서 청소 중이던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문고리를 잡은 캐롯과 은색 단발머리 소녀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엇? 너, 은상 받은?”
“아, 그, 캐롯.”
이마를 찡그린 캐롯이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잠깐 기다려봐! 지금 네 이름이 기억날 것 같아!”
“페트라예요.”
페트라가 싱긋 웃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선 캐롯이 물었다.
“그런데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 그게…….”
그때 작업실의 문이 열리더니 가넷 여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밖이 시끌벅적하다고 생각했더니 우리 캐롯이 왔구나.”
“가넷 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