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모험가! (2)
드넓은 숲과 벌판에서 지도와 나침반만 가지고 목적지를 찾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지형탐색은 모험가의 기본 소양중의 하나였고, 허쉬는 그 최저기준점을 만족하고 있었다.
엎드려서 산 아래 오크 부락을 살펴보는 시선이 곱지 못하다.
“제기……! 아주 자기들 것인 줄 아는구나.”
숲속 잡목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망원경을 내린 허쉬가 그것을 옆의 파핀에게 내밀었다. 망원경을 눈에 대고 길이를 조절하자 마을의 현재 모습이 잘 보인다.
개척민 마을을 습격해서 모든 것을 빼앗은 오크들은 의외로 마을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해 둔 채 살던 사람들의 물건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옷도 사람들의 것을 제멋대로 꺼내 입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커다란 오크가 마을 처녀의 것으로 보이는 빨간 원피스를 입고 통나무를 짊어진 채 걸어가는 모습은 못 봐줄 정도였다.
이른바 오크 개척민 마을이었다.
“여기 작년 가을까지 만해도 왕래를 하던 곳이었대, 제길! 왜 하필 이렇게 외진 곳에 지은 거야? 저기 집주변 화단에 장식해놓은 저건 사람 뼈야? 염병……!”
망원경을 들고 돌아다니는 오크를 세어보던 파핀이 혀를 내둘렀다.
“뭐야? 왜 이렇게 많아? 100마리 넘는데?”
“이놈들은 대체 어떻게 저만큼 불리는 거지?”
“오크는 새끼를 한 번에 4~5마리씩 낳는대.”
허쉬가 찡그린 얼굴을 돌렸다.
“너, 그런 건 어디서 들었냐?”
흐흐 웃은 로이가 누운 채로 허리 가방을 뒤적여 두꺼운 책을 꺼내 보였다. 일전 캐롯이 만들어서 편찬한 모험가 지침서였다.
“이거 진짜 좋아! 별게 다 있어. 냄새 죽이는 방법도 여기서 본 거야. 오크는 냄새도 잘 맡는대. 처음 알았어.”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냄새 주머니를 만들어 허리춤에 매어놓은 허쉬가 잡목 사이에 엎드린 몸을 뺐다.
“됐고, 일단 빠지자. 저걸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 좀 해봐야겠다.”
멀리 숨겨둔 마차로 돌아온 허쉬는 찡그린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미스가 다가왔다.
“어때요?”
“수가 많아, 성체만 100마리가 넘겠더라.”
이미스의 얼굴이 허쉬처럼 되었다.
모두들 리더를 바라보았다. 속이 쓰린 기분에 수통의 물을 한 모금 마신 그가 쳐다본 것은 변변치 못한 파티 멤버들 중에서 유독 빛을 발하고 있는 전투용 오토마톤이었다.
“베누스.”
“예.”
이제 모두가 베누스를 보았다.
“오크가 100마리다. 자신 있냐?”
“저는 1대 다수의 전투 경험이 적어서 궁금해 하시는 사항에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에 따르면…….”
잠깐 말을 멈춘 베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리의 일부에 압도적인 폭력을 행사하면 그걸 본 나머지는 심리적 압박을 느끼고 즉시 다음 행동을 수행합니다. 폭력으로부터 달아나거나, 그걸 따르거나, 혹은 대항하거나.”
베누스는 계속 말했다.
“약탈자의 관점에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은 목표물이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반드시 이쪽도 손실이 발생합니다.”
“확실히 전부 상대하는 것보다 일부에 겁을 줘서 쫓아내는 게 우리 수준에 맞는 것 같다.”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한 허쉬가 파핀을 보았다.
“우리 공용 무장 뭐가 얼마나 있지?”
“각자 가진 날붙이 제외하면 자동석궁 2대와 탄창 5개, 장거리 대형화살 30발 정도?”
로이도 끼어들었다.
“이거 파이어 볼 스크롤도 있어.”
“그건 됐……!”
신경질적으로 대답한 허쉬였지만 약간의 기대가 생겼다. 무장 하나가 급한 판국에 마법 스크롤, 그것도 800만 리즈짜리, 최소 평타로 한 번 터져주면 오크들에게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파이어 볼을 터트리고 활을 쏘면서, 베누스가 돌입하면, 손실분은 저놈들이 모아놓은 전리품으로 대체 하고…….”
이거 잘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어쨌든 사람은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고, 허쉬도 암담한 상황에서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해 실낱같은 희망을 띄워보고 싶었다.
“좋아, 그렇게 하자. 어두워지면 시작하자. 그 전에 베누스는 주변 지형 한번 돌아보고 와. 나머지는 작전을 짠다. 짱돌 모아.”
실실 웃은 세 남자가 정말로 머리를 맞대고 흙바닥에 작대기로 그림을 그리며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쳐다보던 이미스는 찌푸린 얼굴로 살짝 망설였다.
나도 저기 머리 대야 하나?
잠시 후, 야간 돌입을 대비해 미리 지형을 기억해두려고 숲속을 탐색하던 베누스가 뭔가를 발견하고 급하게 되돌아왔다.
“잠시 와보셔야겠습니다.”
“뭔데?”
베누스가 안내한 곳은 멀지 않은 곳의 비탈이었는데, 지형 상 오크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기괴한 상황을 입을 슬쩍 벌리고 쳐다보던 로이가 이윽고 한마디 했다.
“문패 삼아 저래 놓은 건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엘프를 황망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모두가 찡그린 얼굴을 돌리자 로이가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암습을 위해 검은 옷을 선호하는 파핀이 숲속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그 엘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후 몹시 놀란 얼굴을 하고서 돌아왔다.
“살아있어! 구출 옵션의 선발대야!”
“그럼 빨리 구출 하, 아니! 잠깐, 잠깐 기다려봐. 이거…… 혹시?”
순간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쉬가 말을 하다 말고 목소리를 줄였다. 그때 파핀이 손에 쥐고 온 구슬 목걸이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여, 친구들 우릴 구하러 왔는가?
다들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목걸이와 멀리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엘프 남자를 번갈아 보며 어버버하는 사이 계속 엘프 남자의 목소리가 목걸이에서 흘러나왔다.
-놀라지들 마시게, 이건 통신기야. 그보다 친구들 몇 명 왔나? 장비는? 작전은 있나?
통신기라는 말에 모두가 이제 침을 삼켰다. 듣기는 했지만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잠깐만, 엘프 아재, 아재 이름 뭐예요?”
-나? 유에스, 파티 이름은 아르곤의 밀밭이라네.
수첩을 꺼내 볼 것도 없었다. 선발대 파티의 이름 정도는 외우고 있었으니까. 목걸이를 받아든 허쉬가 고개를 돌려 거꾸로 매달린 엘프 남자를 바라보았다.
“며칠째 그러고 있어요?”
-음, 한 이틀 됐군. 나는 상관없지만 다른 친구들은 어찌 됐을지 모르겠어. 아는가? 인간은 거꾸로 매달면 얼마 못 가 죽어.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는데요? 아니, 애초에 어쩌다가 잡혔어요?”
이틀 거꾸로 매달린 사람 같지 않은 유에스의 말에 따르면 남은 생존자는 5명 더 있으며, 아마 주변 숲 어딘가에 자신과 같이 거꾸로 매달아 놓았을 거라고 했다. 이유인즉 슨,
-내가 여기 매달리기 전에 앞서 매달린 모험가의 해골을 걷어냈거든, 무슨 토템 대신인가 보더군. 그리고 여기 오크 놈들 장비가 좋아. 날붙이는 제외하고 자동 석궁 2대, 히트 소드 1개를 확인했어. 더 있을지도 몰라, 주의하게.
“히트 소드에 자동 석궁요?”
-앞서 매달린 모험가들의 것이 아닌가 싶군.
씁쓸한 입맛을 다신 허쉬는 자신들의 작전을 설명했다. 잠시 말이 없던 유에스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자네들, 거기 오토마톤에게 너무 기대고 있군. 우리 파티 사람들도 엘프라며 나를 많이 의지했지. 그래서 이 꼴이 된 거고,
“거, 같은 편 욕해도 되요?"
-곧 죽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가슴속에 맺힌 답답한 응어리를 좀 풀어야 하지 않겠나?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나는 너희 인간들이 싫어. 서로를 잡아먹으려 하면서도 아끼고 사랑하지. 뭘 하고 싶은 건지 가늠을 못 하겠어. 아주 끔찍해.
엘프의 솔직함에 파티 체리보이즈가 피식 웃었다. 신관 이미스는 당황했고, 베누스는 팔짱을 끼었다. 허쉬가 물었다.
“이봐요. 안 구해 줄 겁니다?”
그도 웃는지 큭큭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디 같이 매달리게 될지. 아니면 내가 사는 맥주를 마시게 될지. 기대하지. 통신 목걸이는 가지고 있어 줘. 뭔가 있으면 연락할 테니.
고개를 끄덕인 허쉬는 파핀에게 심부름을 부탁했다.
암살자처럼 움직여 다시 엘프 남자에게 다가간 파핀은 포션 한 병을 낙엽 더미에 숨긴 다음 그의 손에 단검 하나를 쥐여 주고 돌아왔다.
-고맙군.
“폭발음이 들리면 알아서 움직여 주십쇼.”
더 이상 엘프 남자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짧은 한숨을 내쉰 허쉬가 고개를 돌렸다.
“준비하자.”
몇 시간 후 밤이 되었다. 오크들은 대체로 야행성 동물이지만 드물게 야외에서 마을을 형성하는 것들은 어찌 된 것인지 낮에 활동하고 밤에는 조용했다.
축복을 받기 위해 일렬로 선 사람들의 앞에 지팡이를 든 신관 이미스가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대지의 여신, 바다의 신, 하늘의 신께, 이 바보들을 굽어 살피시어 부디 살아 돌아갈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야……!”
목소리를 낮추며 인상을 구기는 허쉬를 보고 이미스가 낮게 입을 열었다.
“정성을 쏟든, 그렇지 않든, 운명은 불확실합니다. 다만 관측과 동시에 결정되는 거지요. 그래서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를 공평히 대하십니다. 유일하게 제가 인정하는 부분이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허쉬의 옆에서 비장한 얼굴의 파핀이 말했다.
“이미스, 돌아가면 나랑 데이트해줘.”
“예, 좋아요.”
“엇! 정말?!”
“그럼요. 살아 돌아가는데 데이트 한번 못 해 드릴까요.”
파핀이 흐흣 웃으며 신나 했다. 까치발을 하고 그의 머리에 손을 올린 신관 이미스는 낮게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뒤이어 그 허리춤에 매달린 롱소드와 들고 있는 자동석궁에 강화 축복을 걸었다.
“인챈트.”
징……!
황금빛 기운이 무기에서 피어오른다. 정의신관 외톨이 이미스를 섭외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팔짱을 하고 있던 허쉬도 자신의 무기에 강화 축복 인챈트를 받았다.
“돌아가면 로이, 저놈이 사고 친 스크롤 환불하려고 했는데, 결국 쓰는구나. 쯧!”
“뭐! 뭐!”
코를 벌렁거리는 로이의 앞으로 이미스가 다가왔다.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이미스가 말했다.
“스튜 정말 좋았어요. 솔직히 모양은 엉망이었지만,”
“맛만 좋으면 그만이죠. 다른 것도 해드릴게요. 흐흣!”
환하게 웃는 로이에게 이미스는 마주 웃어주었다. 그에게도 인챈트를 걸어주고 마지막으로 오토마톤 베누스의 앞으로 걸어갔다. 키가 비슷했기 때문에 이미스는 손쉽게 그 머리에 손을 올리고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인챈트.”
징……!
“어?”
황금색 기운이 베누스의 전신으로 퍼지는 것을 보고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온몸이 노란 황금색으로 물들어 같은 색 방열 가발과의 구분이 어려워진 베누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주 상쾌한 느낌입니다.”
손을 거둔 이미스가 말했다.
“오토마톤은 영혼이 없어서 도구로 인식되기 때문에 인챈트가 전신에 걸린다고 하더군요. 단점은 남은 축복을 다 가져가기 때문에 오늘 인챈트는 끝났다는 것.”
허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색으로 물든 베누스가 전신으로 빛을 뿜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바로 돌입할 거니까.
“만약 스크롤이 꽝이면 바로 철수한다. 그리고 그 가게를 뒤집어엎어 버리자.”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로이가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대나무 통을 열었다. 안에는 부적 같은 종이가 말린 채 들어있었다.
그걸 뽑아서 찢어버린 로이는 손가락으로 어둠이 깔린 오크 마을을 가리키며 외쳤다.
“파이어 볼!”
병기는 사용자의 애를 태우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듯 순식간에 반응이 일어났다.
칭-! 파지직! 지직!
허공에서 파란 스파크가 일더니 거친 불기운이 나타나 휘몰아치다가 6개의 빛 덩어리로 나뉘어 합쳐졌다.
“6발이라고?!”
빛 구슬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얼굴로 격한 환호가 번졌다.
“으하하학! 대박이구나! 그래! 이 정도면 800만 인정이지!”
모두의 응원을 받은 6연발 파이어 볼은 곧바로 하늘로 솟구쳤다가 오크 마을을 향해 혜성처럼 직격으로 떨어져 내렸다.
연출은 둘째 치고 그 위력은 하나하나가 마력수정폭탄 급이었다.
쿠콰콰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