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동인형 오토마톤-88화 (88/329)

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모험가! 88

나른한 정오, 새로 생긴 마법 상점 마녀공방 앞으로 한 사내가 멈춰 섰다. 허리의 롱소드는 물론 몸 곳곳에 잡동사니가 잔뜩 매달려 있는 것이 아무리 봐도 모험가였다.

파티 체리보이즈의 로이였다.

“실례합니다.”

“어머나! 어서 오세요!”

가게의 판매 창문으로 안경을 쓴 메이드가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좀 당황한 로이였지만 그는 용건을 말했다.

“저, 여기 마법 상점이죠? 스크롤 있습니까?”

“예, 무슨 스크롤을 찾으시죠?”

모험가 생활 갓 3년 차를 맞이한 로이였지만 혼자서 스크롤을 사보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저희들 오크 토벌을 나갈 참인데 조금 비싸도 좋으니 몰려오는 적들을 한 번에 저지 시킬 수 있는 그런 마법 있을까요? 저번에 쫓아오는 놈들 때문에 죽을 뻔해서요.”

창틀에 두 손을 올리고 턱을 괸 여주인이 히죽 웃었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찬장으로 걸어가 예쁜 무늬가 조각된 대나무 원통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광역 마법은 역시 파이어 볼이 최고죠.”

“이거 쎄요?”

“물론이죠. 엄청 쎄요.”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것을 어쨌든 외모다. 깔끔한 차림새에 비싼 안경까지 착용한 그녀를 로이는 뜬금없이 덜컥 믿어버렸다.

“어, 얼마죠?”

개업 후 첫 매출을 올린 고르곤의 입가가 귀 밑까지 찢어졌다.

“800만?! 너 미쳤냐! 800만이라고!”

길드 건물 앞, 화가 잔뜩 난 허쉬가 스크롤을 사온 로이를 다그쳤다. 로이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가라는 데는 안가고 왜 이상한데 찾아가서 어휴···!”

같은 파티의 파핀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도리어 화가 난 로이는 로이대로 소리를 쳤다.

“뭐! 어차피 내 몫에서 빼면 되잖아! 그럼 상관없잖아! 그리고 저번에 그 뒷골목 할망구에게 산 스크롤은 별 도움도 안됐잖아! 내 목숨을 그런 싸구려에 걸 수는 없었어!”

“그래서 등신아! 시세에 배가 넘는 가격을 주고 사온 게 겨우 파이어 볼 스크롤 한 장이냐!? 허 참! 800만이면 정품 4장은 살 수 있겠다!”

근처에서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신관 이미스가 코를 좀 벌렁 거렸다.

“아직 인가요? 우린 언제 출발하죠?”

로이의 멱살을 잡고 상점의 주소를 캐묻던 허쉬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거창한 한숨을 내쉬었다.

파티 체리보이즈는 원래 5명이었다. 하지만 이번 남부 출장에서 꽤 큰돈을 손에 넣게 되자 2명이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들의 선택을 비난 할 수는 없었다.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니까.

그래서 선발대 구출 옵션까지 붙어있는 오크 부락 토벌은 이제 3명밖에 남지 않은 체리보이즈에겐 위험도가 높은 큰 건수였다.

모험가니까 모험을 하자!

모험가로 벌어먹기로 작정한 파티 리더 허쉬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부족한 파티 멤버를 대신해서 신관은 물론 오토마톤까지 섭외했다.

“실례합니다. 파티 체리보이즈 여러분들이십니까?”

허쉬와 그에게 멱살을 잡혀있던 로이, 그리고 파핀, 거기에 신관 이미스까지도 고개를 돌렸다.

다들 표정에 묘한 변화가 생겼다. 뿌듯함, 안도감, 대체로 긍정에 속한 감정이었다.

곳곳에 바느질 자국이 가득한 전투복에 롱소드를 4자루나 허리에 찬 긴 노란머리 오토마톤이 메모장 하나를 들고 길드 입구에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베누스 입니다. 오크 토벌을 나가신다고요.”

“어, 그래. 반갑다.”

대충 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린 허쉬는 입을 쭉 내밀고 어디 한번 쳐보라는 투로 씩씩 거리는 로이를 보았다.

“너 임마! 그거 쓰지 말고 놔둬! 돌아와서 환불 할 거니까!”

“됐어! 내꺼야! 내꺼!”

“놀구있네! 너 그럼 집에는 무슨 돈으로 생활비 부쳐 줄 거냐!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하자! 자! 다 모였지?! 일단 가자! 마차 빌려놨어!”

파티 멤버가 800만 리즈짜리 사고를 치는 바람에 좀 씩씩 거렸지만 일은 일이기 때문에 허쉬는 모두를 이끌고 길드 옆 건물로 가서 마차를 수령한 다음 서둘러 출발했다.

“와···! 우리도 이제 마차 타고 가는 구나. 흐흐, 좋다.”

마부석에 앉은 로이가 씰룩이는 말 엉덩이를 보면서 실실 웃었다. 짐칸에 다리를 펴고 앉은 허쉬는 기가 찼지만 신경 끄기로 했다.

“자, 잘 부탁합니다. 신관님. 날씨가 참 좋죠? 봄이네요.”

파핀은 이 와중에 신관 옆에 앉아서 어쭙잖게 작업을 걸어보려고 하고 있고, 그나마 그의 신경을 긁지 않은 존재는 짐칸의 맨 뒤에 앉아서 멀어지는 길을 돌아보고 있는 오토마톤 베누스였다.

자켓 주머니를 뒤적여 지도를 꺼낸 허쉬가 말했다.

“출발이 좀 늦었지만 상관없어. 오후 5시까지 이동 후 야영하자.”

“그보다 괜찮은 작전 있어? 선발대 구출도 신경 써야 하잖아?”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허쉬가 대답했다.

“나는 우리 파티가 더 중요해. 일단 도착하고 나서 상황을 살펴보자.”

전에 본 것이 있기 때문에 정의의 신관 이미스가 또 버럭 하지 않을까 슬쩍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무릎을 세워 앉은 채 가만히 시집을 읽고 있었다.

별 탈 없이 반나절을 이동한 체리보이즈는 5시가 딱 되자마자 그 자리에 마차를 멈추고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베누스는 주변 정찰을 내보냈다.

다들 너무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통에 섣불리 끼어들지 못하고 지팡이를 안은 채 오도카니 서 있던 이미스가 말했다.

“저기, 저도 뭔가 도울게 없을까요?”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파핀이 웃었다.

“아냐, 이미스는 거기 앉아있으면 돼.”

“바쁘니까 말 걸지 말고 얌전히 있어!”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기에 이미스는 그냥 그들이 준비 하는 걸 구경하기로 했다.

돌을 잔뜩 주워 와서 바닥에 쌓아놓은 세 남자들은 이제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 말라 죽은 나무를 끌고 나오더니 그 자리에서 때려 부셔 땔감을 만들었다.

“아무튼 불을 많이 피워야해!”

야영지 주변으로 4군데 더 모닥불을 설치하는 허쉬를 보고 이미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토마톤도 있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요?”

어느새 로이를 도와 나무에 톱질을 하던 허쉬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외쳤다.

“저것만 덜컥 믿고 있을 수는 없어! 인생을 포함한 모든 계획표에는 항상 플랜B가 있어야 한다고! 넌 어떤데?!”

그의 외침을 듣고 이미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인생의 플랜B

해가 완전히 떨어졌을 때 쯤 야영준비가 끝났고 다들 지쳐 쓰러졌다. 때마침 주변순찰을 나갔던 베누스도 돌아왔다.

“떠돌이 고블린과 그램린, 기타 소형 야생 동물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크게 위협적이거나 적대적인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에게 물과 먹이를 봐주고 있던 파핀이 웃었다.

“덤비지만 않으면 싸울 필요는 없지.”

보글보글···!

냄비를 걸고 스튜를 끓이던 로이가 국자로 맛을 보더니 웃었다.

“음, 좋아! 오늘도 완벽해.”

“또 이상한 거 막 넣은 거 아니지?”

“먹기 싫으면 먹지 마.”

로이가 입을 쭉 내밀자 파핀이 낄낄 웃었다. 그 와중에 일어나 앉은 허쉬는 자켓 주머니에서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 거리를 잡아보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어서 야영지 주변 경계를 계속 하겠습니다.”

“그래, 저기 주변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불을 계속 피우도록 해.”

“알겠습니다.”

“잘 부탁해. 우린 이제 밥 먹자.”

베누스는 가끔씩 모닥불에 나무를 던져 넣으며 주변을 서성이기 시작했고, 일행들은 식사를 위해서 불가에 모여 앉았다. 냄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튜를 듬뿍 떠서 그릇에 담은 로이가 그걸 이미스에게 내밀었다.

끔찍한 모양이었지만 먹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이미스는 그걸 감사히 받았다. 육포를 꺼내 질겅질겅 씹고 있던 허쉬가 지도와 수첩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아무 일 없으면 내일 정오쯤이면 도착하겠다.”

“아무 일 없으면 말이지?”

“오토마톤도 있는데 일이 있는 편이 도리어 좋지 않아?”

허쉬가 눈살을 찌푸렸다.

“야, 함부로 막 쓰다가 망가지면 배상청구 감당할 수 있겠어? 그리고 저거 크랭크 아재 거라고 하던데 그 아재한테는 더 이상 신세지고 싶지 않아, 미안하잖아.”

파핀과 로이가 쓰게 웃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스튜를 얌전히 떠먹고 있던 이미스가 귀를 의심했다.

“놀랍네요. 당신들 크랭크와 사이 나쁜 거 아니었나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잖아요? 저 몇 번 봤어요.”

파핀과 로이가 히히 웃었다.

“이제 와서 뭘 더 숨기겠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면 이야기 해줄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미스가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일부러요?”

얼굴을 찌푸린 허쉬가 나무 작대기로 불가를 쑤시며 말했다.

“그래, 지명도를 올리려고 일부러 선배 모험가들에게 까칠하게 거들먹거렸어. 그 덕에 갓 3년차 모험가 파티 주제에 오크 토벌 같은 굵직한 퀘스트도 따고 오토마톤까지 빌릴 수 있었지. 보통은 허가 안 해줘.”

이건 명백한 사기에요! 나는 이 사실을 길드에 보고 하겠어요! 잘못은 바로 잡아야 해요!

라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을 것이다. 작년까지의 그녀였다면,

가만히 스튜 그릇을 내려다보는 이미스를 보고 로이가 국자를 들었다.

“더 드실래요? 신관님.”

“아니요. 괜찮아요.”

허쉬가 그녀를 슬쩍 보면서 말했다

“너도 저번에 그 아재랑 부딪히지 않았냐?”

“그건 정말로 의견충돌이었지요. 그때까지 나는 내가 보는 세상만 믿으면서 살았거든요.”

“호오, 그래서 지금은?”

이미스는 가만히 허쉬를 보다가 로이에게 그릇을 내밀었다.

“역시 좀 더 주세요. 이거 생각보다 맛있네요. 로이.”

“엇? 정말요? 흐흐.”

신이 난 로이가 국자를 냄비에 넣고 휘휘 저었다. 슬쩍 말을 돌리는 그녀의 행동을 보고 허쉬가 소리 없이 웃었다.

나쁜 놈은 아니지만 성격이 좋다고는 못할 허쉬는 그녀를 좀 더 자극해 보기로 했다.

“아냐? 다들 너 싫어해. 말 안 통하는 고집불통 모범생 신관이라고.”

스튜그릇을 받아든 이미스가 눈썹을 세우고 허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로서로 잘 살기위해서 만든 정의와 규범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막상 모험가로 일하면서 보니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그게 마찰로 번진 거였고, 그녀를 외톨이로 만들어놓았다.

작년이었다면 격노하며 설전을 벌였겠지만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을 겪기도 했고, 나이도 한 살 더 먹으면서 이제는 좀 성숙해져야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그래서 허쉬의 도발을 우아하게 받아쳤다.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지 못하다 한 것이 뭐가 잘못이죠?”

“앞뒤 꽉 막힌 걸 자랑하다가 좀처럼 팔리지 않아서 내내 길드에 앉아만 있던 주제에 말은,”

성숙은 좀 늦어져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트!”

번쩍!

“우와악!! 내 눈!”

“으억! 눈부셔!”

“신관님! 눈뽕! 눈뽕이! 으아아!”

이미스에게서 쏟아지는 강렬한 후광에 다들 눈과 얼굴을 가리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미스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말을 좀 가려가면서 하세요. 오라버니, 까칠해서 기피 되는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요?”

“알았으니 불 좀 꺼!”

“잘못했다고 하세요!”

“잘못했어! 잘못했습니다!”

이미스는 그제야 라이트를 거뒀다. 눈을 가리고 엎드려 있던 파핀이 그 자세로 중얼거렸다.

“와, 이거 꽤 좋아! 세상에 라이트를 공격용으로 쓸 수 있다니···! 처음 알았어.”

“엄밀히 말하면 방어용이에요. 뭐든 강하면 독이 된다는 말을 뒤집은 거예요. 상상력은 무기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이미스가 박수를 쳤다. 짝짝! 가만히 그들이 하는 꼴을 지켜보던 베누스가 혹시나 싶어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절 부른 겁니까?”

“잠깐 따라와 줘.”

“야! 어디가?”

베누스의 손을 잡고 걸어가던 이미스가 확 붉어진 얼굴을 돌리더니 외쳤다.

“라이트!”

찡···! 다시 한 번 맹렬한 빛이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어찌나 밝은지 그림자가 사라질 지경이었다.

“으갸아악! 내 눈!”

“알았어! 화장실! 화장실이지? 응응! 조심해서 다녀와!”

“신관님! 신관님! 으아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바닥을 나뒹구는 일행들을 뒤로 하고 총총 달려가는 이미스를 적당한 거리에서 베누스가 말렸다.

“화장실이라면 이쯤에서 보도록 하십시오. 분변의 냄새는 야생동물을 쫓을 수 있습니다.”

화들짝 놀라서 머뭇대던 이미스였지만 사실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성격상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을 좀 두리번거린 다음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 쭈그려 앉았다.

슬쩍 고개를 돌린 베누스는 주변을 경계했다.

“베누스 거기 있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응.”

대단히 부끄러운 꼴이었지만 생물인 이상 먹은 게 있으면 나오는 게 있는 법이다. 그래서 파티를 옮기는 일이 많은 신관들은 해당파티에 이런 경우에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가 꽤 중요했다.

오토마톤이나 같은 여성 모험가들이 가장 좋고, 의외로 드워프도 아빠 같아서 괜찮았다.

“시원하냐?”

일을 마치고 돌아온 둘을 보고 모닥불가에 앉아 있던 허쉬가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이마에 핏발이 돋은 이미스는 방긋 웃었다.

“라이트! 서치-! 라이트!”

번쩍!

“으아악! 내 눈! 야! 적당히 하라고!”

“으와아악! 이미스! 이미스! 그만! 저 놈 대신 내가 사과할게! 저 자식 원래 성격이 좀 삐뚤어졌어!”

분노한 신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성스러운 후광을 버티지 못하고 나뒹구는 남자들을 팔짱을 낀 채 지켜보던 베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군요. 시간별로 비춰대면 야행성 몬스터 방제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야! 직사로 비추지마! 뜨거워! 뜨겁다고!”

야영 중 약간의 소동이 있긴 했지만 오토마톤 베누스의 도움으로 불침번 없는 노숙을 마친 체리보이즈는 이튿날 새벽 목적지를 향한 여정을 서두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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