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개척민 마을! 21
별로 즐길 거리가 없어서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와 수리와 몸단장을 마친 봄바를 반기고 구경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는 봄바를 보고 누군가가 물었다.
“말은? 여전히 못하는 거야?”
뒤따라 나온 캐롯이 대답했다.
“아, 그거. 발성기관은 의외로 멀쩡하더라고? 머리 안에 담겨 있는 스펠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은데 거기서 부터는 마법사의 영역이라서 우리는 손을 못 대. 그래도 뭐, 이 정도만 되도 충분하지 않겠어?”
캐롯은 봄바를 올려다보았다. 봄바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였고, 캐롯도 씩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봄바의 몸짓이나 행동양식은 만났을 때부터 거의 인간과 같았다. 그 말은 연산능력이 높다는 것인데, 그 머리를 열어보고 나서야 확실히 알았다.
“동네 사람들! 다들 여기 봄바를 아끼도록 해. 사정상 자세히 말은 못해주지만 의외로 과거가 있는 친구더라고.”
“어? 과거가 있는 여자야?”
“가발 올리니까 진짜 여자 같아.”
“너희들은 왜 여자 모양이야?”
사방에서 방향성 없는 질문이 던져졌다. 귀를 좀 막아보려던 캐롯이 대답했다.
“옛날에 전쟁 할 때 적국 병사들이 여자의 손에 죽으면 천국으로 가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었대. 그래서 오토마톤을 여성형에 가깝게 만든 거라더라.”
“우와! 그런 거야? 신기하다!”
“처음 알았어!”
“상식 정도는 알아야 사는데 편리하지. 다음에 올 때는 책도 좀 가져와야겠네.”
“어, 우리들 글 읽을 줄 모르는데.”
“그런 건 내가 가르쳐 줄게, 읽고 쓰기 정도야 오토마톤도 할 줄 알···! 어! 잠깐만! 봄바!”
봄바가 뒤를 돌아본다.
“너 혹시 글 알아?”
봄바가 놀랍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놀라운 표정을 했다. 캐롯이 입을 헤 벌리고 올려다보다가 바닥을 가리켰다.
“네 이름 써볼레?”
주변을 두리번거려 어떤 노인의 나무 지팡이를 빌려온 봄바는 그것으로 바닥에 글자를 적었다.
봄바.
캐롯이 이맛살을 좀 구겼다가 다시 말했다.
“그거 말고 네 본명 말이야.”
?
“아, 기억 안나니?”
예, 기억이 안 납니다.
“봄바가 글을 적어!”
“뭐라고 쓴 거야?”
“기억이 나지 않는데.”
캐롯은 몇 가지 질문을 더 했고, 봄바는 바닥에 필담으로 대답했다.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캐롯이 설명했다.
“애들이 와서 숲속에서 깨어난 것부터 기억한데, 그 이전의 기억은 없다는데?”
“우와! 나도 봄바랑 이야기 하고 싶어!”
“그 전에 글부터 배워야겠네. 이 동네에 글 아는 사람은 없어?”
모두가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
“벨 아줌마가 계셨는데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
“지금은 촌장님 밖에 몰라.”
“촌장님이 안 가르쳐줘?”
“어, 매일 아이들 불러놓고 알려는 주시는데 그게 잘···.”
캐롯이 작은 콧구멍을 좀 벌렁거리더니 팔짱을 했다.
“뭐, 공부는 동기 부여가 제일 중요하지. 호랑이 캐롯 선생님의 글자 수업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모여라! 이 바보천치들아! 피조물인 내가 조물주인 너희들에게 문자를 알려주마! 나무판자! 그리고 목탄 연필이 필요해!”
캐롯은 사람들을 앉혀놓고 글자와 읽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단어를 나열했다.
“전부 26개 문자가 이리저리 붙어서 문장을 만들어. 여기서 발음이 중요하지, 자! 이게 안녕하세요! 따라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제 똑같이 적어! 적으면서 문자가 만들어낸 문장을 외워! 크랭크가 깨기까지 12시간! 그 안에 26개 문자의 발음기호를 머릿속에 박아 넣는다! 너희 마을을 지켜주는 경비대장 봄바와 간단하게 필담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머리가 나쁜 건 다들 똑같아! 너희들이 배워서 마을의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줘! 글 모른다고 당해온 바보 취급이 억울하지도 않냐?!”
캐롯의 외침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12시간 후, 크랭크가 잠에서 깨었을 때 5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캐롯에게 철야로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빨리 되는 건 아닌데.”
“조금이나마 깨우치면 그 다음 부터는 봄바와 필담으로 배우면 돼.”
“봄바와 필담?”
캐롯은 크랭크가 자고 있는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크랭크는 나무작대기를 주워서 바닥에 글을 적었다.
반갑다. 봄바. 나는 크랭크,
순찰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와 있던 봄바가 크랭크에게 나무 막대기를 받아들더니 그 밑에 글자를 적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마이스터 크랭크,
크랭크는 씩 웃었다. 투구 때문에 보일 리는 없을 테지만, 그는 이제 육성으로 질문 했다.
“몸에 이상은 없나? 조정 할 곳은?”
왼쪽 무릎, 가동각 10도 오차가 있습니다. 오른쪽 첫번째, 세번째, 다섯번째, 왼쪽 첫번째, 손가락이 완전히 굽혀지지 않습니다.
크랭크는 당장 봄바를 집안으로 불러들여 다리의 가동각을 조절하고 손가락의 관절과 근육을 조정해 주었다. 손과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봄바는 오른팔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이게 뭔지 아나?”
크랭크가 수첩에 그려진 문장을 봄바에게 내밀었다.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았지만 봄바는 고개를 저었다.
“네 머릿속에 그려진 문장이다. 돌아가면 한번 찾아보마. 네 과거를 알아내는 단서가 될 지도 모른···.”
봄바는 고개를 저었다. 크랭크의 수첩을 빌린 봄바는 그것에 예쁘장한 글씨로 글자를 적어서 내밀었다.
저는 지금 생활도 괜찮습니다.
크랭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뒤진 그는 여분으로 가져온 새 수첩과 펜을 내밀었다.
“이건 선물이다. 앞으로 거기에 적혀지는 길고 짧은 대화는 네 일생의 일기가 되겠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든 봄바는 감사함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첫 문장을 적어서 보여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이스터 크랭크.
“그래.”
호랑이 캐롯 선생님의 글자 수업 시간이 끝나고 학생들은 기절했다.
“그래서 성과는?”
“뭐, 문자 26개 정도의 발음기호를 어렴풋이 외운 정도지. 일주일 정도 달달 외우고 다니면 적당히 머리에 박힐 거야. 그 다음 부터는 봄바와 필담 하면서 늘리면 되겠지.”
그러면서 몸을 돌린 캐롯이 외쳤다.
“알겠냐! 글자는 반복학습이야! 계약서 글자를 몰라서 사기 당하고 싶지 않으면 글자 정도는 배워둬! 이거 다 배우면 다음은 사칙연산이다! 그리고 다음은 기초 상식!”
인간을 가르치는 행위에 묘한 쾌감을 느낀 캐롯이 녹초가 되어 쓰러진 학생들 앞에서 깔깔거렸다.
해가 중천에 뜬 정오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주위를 두리번거린 크랭크가 바구니를 끼고 걸어가는 처녀에게 물었다.
“촌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마을 입구 쪽 밭에 나가셨어요.”
“감사합니다.”
휘적휘적 걸어서 동네 앞에 펼쳐진 밭으로 향한 크랭크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감자를 캐고 있는 촌장을 만날 수 있었다.
“어! 크랭크 일어났는가?”
“예.”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감자를 주워 살펴보던 크랭크는 그것을 자루에 던져 넣으며 뒤 따라온 봄바를 보았다.
“농사는 잘 모르지만 거름을 제대로 하지 않고 한 곳에서 오래 작물을 재배하면 잘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지.”
봄바는 가만히 크랭크를 보았다. 투구 안 크랭크의 눈에 광기가 스쳤다.
“봄바, 마을에 들어온 몬스터를 처리하면 그 시체는 어떻게 하나?”
슥슥
크랭크에게 선물 받은 수첩으로 글을 적은 봄바가 그것을 내밀었다.
숲에 버립니다.
“그건 좀 아깝군.”
크랭크는 촌장과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뭔가 말을 했다. 그걸 듣고 사람들이 기겁했지만 크랭크는 대수롭지 않은 듯 초연했다.
“몬스터의 시체를 흙에 섞으라고?!”
“안 됩니까?”
“크랭크 이 사람아. 애초에 어떻게 자랄지도 모르고, 대체 그런 끔찍한 걸 누가 먹는가?”
“내가 먹을 겁니다.”
“뭐?”
사람들이 입을 벌렸다. 크랭크는 자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800만 리즈어치의 감자를 가지고 여러분과 계약했습니다. 그런데 이 감자는 너무 볼품없습니다. 크고 영양가 높은 감자를 먹고 싶습니다. 그저께 먹은 감자스튜에 잘 어울리는 그런 감자 말입니다. 제게 주셔야 할 감자는 따로 재배해 주십시오. 거름은 몬스터 시체를 활용하시고요.”
1년 전만해도 몬스터의 습격이 끊이지 않아 멸망직전까지 갈 뻔한 마을을 구해낸 오토마톤을 거의 완전하게 수리해준 마이스터의 제안은 그들도 외면하기 어려웠다.
“알겠네. 그리하지.”
크랭크는 봄바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에게 몬스터를 처분한 장소를 알려줘라.”
필담을 할 것도 없이 봄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볼 일을 마친 크랭크는 밭에 굴러다니는 감자 자루들을 가리켰다.
“이건 이제 마을로 옮기는 겁니까?”
“어, 그러네.”
크랭크는 두 말하지 않고 감자 자루를 쌓아 짊어지고 마을로 향했다. 그걸 뒤에서 쳐다보던 사람들이 한 마디씩 했다.
“와! 몸이 커서 그런지 힘이 굉장히 좋네요. 다섯 자루나 들고 가네.”
“저 투구는 왜 쓰고 있데요?”
“뭔가 사정이 있다는구먼, 그런데 참 골치 아픈 제안이군. 농사지으면서 그렇게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아무렴 어떻습니까? 해달라는 데로 해주면 되죠. 우리가 먹을 것도 아닌데.”
“그래도 마을의 은인인데···.”
“혹시 압니까? 감자가 엄청나게 커질지?”
“몬스터 시체를 섞은 흙에서? 설마?”
마을에서 오고가던 사람들은 감자 자루를 짊어지고 길을 올라오는 크랭크의 모습을 보고 다들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중의 동네 여자들 몇이 주인님을 노리고 있어.”
“내가 투구를 벗으면 다들 생각이 달라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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