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마톤과 함께 하는 이웃들! 10
“이런 일이 있었지.”
집으로 돌아온 캐롯이 여전히 같은 차림으로 그린의 몸 이곳저곳을 분해 시켜놓고 신중하게 작업 중인 크랭크를 바라보았다. 크랭크는 다리의 인공관절을 연결하며 중얼거렸다.
“돈 생길 때마다 조금씩 낡은 부품을 교환하고, 수리하고, 증설하는 동안 이렇게 됐지. 오히려 나는 네게 사과해야 한다. 네 몸을 가지고 실험을 한 셈이니까.”
“결과가 좋으면 모든 건 용서가 돼. 진리지.”
고개를 돌린 크랭크가 눈웃음을 지었다.
크랭크는 그대로 철야를 해서 작업에 매진했다. 그렇게 다음 날 점심시간 쯤 캐롯이 식사를 준비하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안녕.”
“오와! 플루이드 왔어?”
“그래. 크랭크는?”
“있어. 아, 잠깐만.”
문 앞에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던 캐롯이 안에 대고 소리를 지르자 급하게 투구를 뒤집어쓰고 앞치마를 한 근육덩이가 나왔다.
“플루이드.”
“크랭크, 넌 볼 때마다 몸이 커지는 것 같아.”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군. 그래서 머리카락 팔 사람은?”
“나야. 내 머리카락 팔아서 남은 빚 전부 청산 하려고.”
“오, 큰 결심했네.”
몸을 돌린 크랭크가 손짓하자 캐롯이 그녀를 공방으로 안내했다.
“지금 작업 중이니까. 저 작업대는 손대지마.”
“그 오토마톤이야? 그린?”
“그래. 지금 거의 다됐어.”
“얼굴 한번 보여 줄 수 있어?”
크랭크가 뒤를 돌아보았다가 깜빡했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작업대에 누운 오토마톤 그린을 쳐다보았다.
“아, 그린? 그래. 이리 와봐.”
하얀 천을 들추자 평범한 오토마톤의 얼굴이 보였다.
“별거 없네.”
“뭔가 심오한 감정이라도 생길 것 같았어?”
“글쎄. 멜리사는 네 자는 얼굴을 봤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한번 봐본 것뿐이야.”
“와! 멜리사가? 그런 일이 있었어?”
크랭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린의 얼굴은 바뀔 거야. 이걸 덧씌울 거거든.”
크랭크는 나무상자 안에서 하얀 마스크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의도적으로 커다랗게 만든 눈구멍 덕분에 첫눈에 귀엽다는 인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와, 예뻐! 뭐야 그거?!”
“원래 캐롯의 얼굴에 덧씌울 예정이었던 물건이야. 소프트 스킨으로 노선을 갈아타면서 필요 없어져서 보관해두고 있던 거지.”
크랭크는 그렇게 말하며 그것을 플루이드에게 내밀었다.
“써봐.”
마스크를 얼굴에 대어본 플루이드의 손을 캐롯이 잡아끌었다.
“저쪽! 전신 거울이 있어!”
플루이드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화려한 금발을 산발한 하얀 얼굴의 오토마톤이 서 있었다. 묘한 기분이 든다고 생각한 플루이드는 마스크를 돌려주고 크랭크를 보았다.
“좋아. 확실히 마음 정했어. 이제 자르자.”
캐롯이 하얀 천을 가져와 바닥에 깔았다. 크랭크가 의자를 들고 중앙으로 가서 섰고, 플루이드가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머리카락이 굉장히 기네.”
“배가 아파서 계속 길렀었어. 네가 크랭크와 함께 조금씩 유명해질 때마다 멜리사에게 쏟아지는 관심도 덩달아 커졌거든?”
“오토마톤이 유명해지면 그에 관련된 모든 것이 관심을 받게 되지. 그리고 캐롯에게 금발은 어울리지 않아.”
크랭크의 말이었고, 캐롯은 그런가? 하는 표정이었으며, 플루이드는 쓰게 웃어버렸다.
“알았으니 어서 잘라!”
서걱!
촤라락.
장딴지까지 들어지던 긴 장발은 이제 산뜻한 단발이 되어버렸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만져보며 플루이드는 한숨을 폭 내쉬며 물었다.
“끝이야?”
“그래. 좀 다듬어 줄까?”
거울에 머리를 비춰보던 플루이드가 말했다.
“아니, 됐어. 이것도 마음에 들어.”
“그래.”
머리카락을 가죽 끈으로 묶어 조심스럽게 천에 감싸서 갈무리한 크랭크는 휑한 공방 안의 가구를 뒤적여 돈 자루를 가지고 와서 내밀었다.
“시세의 2배.”
“그거 내 머리카락인거 꼭 광고해줘!”
“광고랄 것 까지도 없지. 이 녀석이 유명해지면 돼.”
입을 좀 오므린 플루이드는 돈 주머니를 가방에 쑤셔 넣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살풍경한 곳이네. 왜 하필 이런···, 그래. 크랭크라면 어쩔 수 없나. 하여튼 좀 꾸며놓고 살아. 청소도 좀 하고.”
“원정 끝나면 좀 해볼 참이야.”
“캐롯, 나 큰 길까지만 바래 다 줘. 글쎄 이 근처에 속옷 바람으로 뛰어다니는 사람이 있다더라고? 엄청 근육질 변태···.”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는 플루이드의 시선에 크랭크가 투구를 좀 만지다가 말했다.
“아, 그거 나인가 본데.”
“그러고 다녔어?”
“여긴 사람이 자주 안 오니까.”
“제발! 크랭크! 사람들이 이상성욕자인 줄 알잖아!”
“아니, 강도는 변태로 잡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그 증거로 요즘 이 근처에서 강력범죄는 퍽 줄었다고 들었어. 창고 소개시켜 준 시청 직원이 좋아하더군.”
플루이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캐롯. 이 머리카락과 도면을 2번가의 가넷여사께 전해드려. 급행 추가금 낼 테니 3일 안에 부탁드린다고 말이야. 그리고 가는 김에 플루이드도 바래다 줘.”
“크랭크 이걸 봐.”
크랭크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가면을 쓴 캐롯이 있었다. 귀여운 가면이지만 1가지 인상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싸움터에서 만났다면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턱 부분을 매만지며 캐롯을 쳐다보던 크랭크가 말했다.
“역시 꽤 괜찮군. 이대로도 좋을 뻔 했다.”
가면을 벗으며 캐롯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이 소프트 스킨으로 된 얼굴 덕분에 인간친구들이 많이 생겼어. 지금은 이쪽이 더 좋아. 가자, 플루이드 바래다줄게.”
“그래. 크랭크, 몸조심해.”
“걱정 마.”
둘을 보내고 가면을 내려다보던 크랭크가 낮게 중얼거렸다.
“반 정도는 네 노력이라고 나는 생각해.”
플루이드를 바래다주고 2번가의 가넷여사를 찾아간 캐롯은, 가게 안에 진열된 가발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 했더니 캐롯이 왔구나.”
“가넷여사!”
60먹은 할머니 가넷이 흐뭇하게 손짓했다.
“무슨 일이니?”
“여사님 보러 왔지요. 이거 크랭크가 보내는 거예요.”
커다란 주머니와 편지를 받은 가넷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토마톤 가발 주문 제작이구나. 오랜만이네.”
“응? 요즘은 오토마톤 가발 만드는 일 안 해요?”
“하지, 다만 사람 머리카락으로 만드는 건 별로 없지. 요즘은 방열사를 염색해서 쓰거든?”
“와, 이게 유행이라는 거구나.”
가넷여사는 손녀와 이야기 하는 기분을 느끼며 가게 안을 활보하는 캐롯을 바라보다가 가져온 머리카락을 살펴보았다.
“호오~! 이렇게 예쁜 금발은 또 오랜만이구먼. 누구 거지?”
“플루이드 라고 친구 거예요.”
고개를 돌린 가넷여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난다.
“캐롯, 이리와 보렴.”
캐롯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를 의자에 앉힌 가넷은 서랍에서 가위와 빗을 꺼내더니 캐롯의 머리카락을 다듬기 시작했다.
“몇 군데 좀 탔구나.”
“아, 요전에 오크 잡는다고 불 마법을 썼는데 좀 그을렸어요.”
“저런, 조심하지 않고, 이 머리 만든 지가 거의 5년 다되어 가는 구나. 슬슬 바꿀 때가 된 것 같지 않니? 마음에 드는 거 한번 찾아보련?”
진열장에서 꽤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았지만 캐롯은 애써서 말하지 않았다.
“내 덕에 결혼도 하고 애도 가진 친구가 있어요. 그 애의 아이가 태어나 걸어 다닐 때 까지 만이라도 이 머리는 계속 하고 싶어요.”
“우리 캐롯은 착하구나. 알았다. 자 다됐다. 앞으론 조심하렴, 그리고 저 금발은 내일 저녁쯤 찾으러 오거라.”
“내일요? 하루만에요?”
“이 가넷여사는 아직 현역이란다. 인생은 60부터지.”
“멋져요. 여사님! 그럼 내일 뵐게요!”
가게 앞에서 손을 흔들어준 캐롯은 우다다 달려서 집으로 돌아갔다. 크랭크는 여전히 작업에 열중이었다.
“크랭크 그러다 쓰러지겠어. 잠은 좀 자야하지 않아?”
“이것만 하고.”
크랭크는 그린의 머리를 열어놓은 상태로 내부에 빼곡한 보석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볼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보석상자 같아. 나도 저래?”
“네 건 더 예쁘지. 내가 손봤으니까.”
크랭크의 말에 캐롯이 흐뭇하게 웃는다.
작업대의 나무 상자에서 조그만 보라색 보석을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집은 크랭크가 그것을 그린의 머릿속에 신중히 꽂아 넣었다.
“연산 능력을 증설했다. 너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말이나 행동이 좀 부드러워 질 거야.”
“오! 그럼 농담 같은 것도 이해하고 그럴까?”
“깨어나면 들려줄 농담 하나 생각해봐.”
“에~ 뭐가 좋을까?”
캐롯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서성거리는 것을 내버려두고 크랭크는 나머지 작업을 계속했다. 동력선과 신경선을 교환하고 나니 늦은 저녁이 되어 버렸다.
“잠이 와서 쓰러질 것 같군.”
“그럼 어서 자. 인간은 불편하네. 꼬박꼬박 자야해서.”
“아니, 아직.”
크랭크는 고개를 저으며 작업대의 상자에서 붉은 마력석을 집어 들었다. 가슴 판이 열려 있기 때문에 교환은 아주 손쉬웠다.
“다 된 거야?”
“대부분의 교환 작업은 끝났어. 이제부터는 조정 작업이 남았지.”
캐롯에게 교환하고 나온 초록색 마력석을 쥐어준 크랭크는 그린의 몸에 열어놓은 판을 모두 닫고 자리에 와서 앉았다.
“그린.”
칭-!
그린이 눈을 뜨고 주변을 살피다가 고개를 돌린다.
“안녕하세요. 마이스터 크랭크.”
“그래. 정비는 대략 끝났다. 몸을 움직여봐라. 이상 부분을 점검해서 알려줘. 조정해줄게.”
상체를 일으켜 이리저리 움직여보던 그린이 작업대에서 내려와 섰다. 팔을 움직여보고 다리를 들어보던 그린이 고개를 돌린다.
“관절이 걸리던 증상이 없어졌습니다. 본체의 움직임 역시 아주 좋습니다. 마력석의 출력도 기존의 3배 이상입니다.”
“좋네. 그리고?”
그린이 공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주변을 인식하는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그리고 뭔가 기분이 이상합니다. 마력엔진이 울렁거리는 감각이 느껴집니다.”
“뭔가 즐겁고 상쾌하지 않아? 주변 사물이 무척 흥미로워 보이고? 왜? 라는 의문이 든다거나?”
그린이 캐롯을 바라보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예. 그렇습니다. 이걸 기분 좋다고 하는 것 입니까? 그렇다는 저는 지금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궁금합니다. 신경 쓰입니다. 모든 것이.”
방긋 웃은 캐롯이 말했다.
“의문은 지식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데.”
“의문은 지식의 문을 여는 열쇠···.”
가만히 있던 그린이 말을 이었다.
“기억해두었다가 저도 누군가에게 말해보고 싶습니다. 멋진 말이군요.”
입을 헤 벌리고 그린을 쳐다보던 캐롯이 슬쩍 크랭크를 쳐다보았다.
“저기, 연산 수정 몇 개 넣었어?”
“한 개.”
“한 개 정도로 이 정도까지 바뀌는 거야? 나도 오토마톤이지만 참 신기하네.”
“난 좀 잘 테니까 동네 한 바퀴 돌아보면서 이상부분 없는지 점검 해줘.”
“알았어.”
짝짝!
작은 손바닥을 부딪치며 앞으로 걸어간 캐롯이 그린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없어서 이틀 철야로 끝냈기 때문에 조정 작업은 필수야. 나랑 동네 마실 나가자. 걷고, 달리고 움직이면서 어딘가 이상한 곳은 없는지 체크 할 거야.”
“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린은 작업대 위에 올려 있는 자신의 망토를 주워 입으려 했다.
“그린, 그거 말고 이거 가져가라.”
크랭크가 옷장을 열고 후드가 달린 초록색 망토를 내밀었다.
“내일은 길드에 갔다가 와서 마스크 달고 가발도 올려 볼 거야.”
“가발? 제게 머리카락이 생긴다는 말입니까?”
“그래, 마력석을 레드로 교환하면 발열량이 엄청 나니까 방열사를 심은 가발로 열을 방출 시켜야해. 가발 올리기 전까지는 무리하게 움직이지 마. 과열 된다.”
“알았어. 가자! 초록아!”
캐롯의 뒤를 따라 후드를 뒤집어 쓴 그린이 뛰기 시작했다.
“와! 천천히 달려! 새 부품 달고 과격하게 움직이면 안 돼! 오래 쓰려면 길들이기 해야 한다고!”
“알겠습니다.”
총총 어둠속으로 사라진 두 오토마톤을 쳐다보던 크랭크는 몸을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간이침대에 쓰러져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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