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87화 (187/187)

53장. 어둠의 시험(5)

나를 포함해 단군, 호구별성, 강림 형까지 시험을 통과한 인원은 총 넷.

그들과 함께 다섯 번째 알에 들어섰을 때였다.

긴장을 가라앉히며 길게 숨을 들이켜자마자 낯설지 않은 꽃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이곳은 오색 꽃잎이 만발한 서천의 꽃밭이었다.

바람에 실린 향기는 의식할수록 선명해졌다.

색색의 꽃이 흐드러지는 가운데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은 모자가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는 게 보였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한 신이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입은 검은 옷은 곱고 아름다운 꽃밭과는 어울리지 않아 조금은 이질적이었다.

미려한 손가락에 걸쳐진 곰방대에서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문득 떠올렸다.

서천꽃밭에서 그와 재회했던 순간을.

희생을 대가로 되살아난 이의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깊고 공허한 눈을.

“영감탱이 청승은…….”

뒤에서 호구별성이 낮게 혀를 찼다.

“……도령님.”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로 그를 불렀다.

사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날 알아보고 있음을 전해 왔다.

그러나 곰방대를 무는 그의 시선은 다시금 두 모자신의 환상에게로 돌아갔다.

파아아악!

사라의 가슴께에서 붉은 피가 터졌다.

어둠의 환상에 고인 독이 그의 틈을 파고들었다는 의미였다.

깜짝 놀라 발을 떼었으나,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그는 올 필요 없다는 듯 곰방대를 한 번 흔들었다.

파아앙!

새하얀 신성이 일었다.

가슴에 터진 상처 위로 자그마한 꽃이 피어났다.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상처를 회복한 사라가 담담히 말했다.

“이게 마지막 꽃이야.”

마지막 꽃.

그 말에 줄곧 연명하듯 저 자신에게 꽃을 피워 왔음을 눈치챘다.

색이 어두워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그의 옷이 평소보다 검붉은 빛을 띠고 있다는 사실 또한.

사라는 태연히 상처를 고치고는 미동 없이 가족들의 환상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애틋한 눈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건조하다면 건조한 시선이었다.

그럼에도 사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힌 순간.

파아아악!

그의 가슴을 가르고 다시 한번 크게 피가 터졌다.

“……이까짓 것, 그리 아프지도 않건만.”

나직한 목소리였다.

사라는 무감각한 태도로 상처를 일별하고는 느릿하게 걸음을 움직였다.

긴 팔이 곧게 뻗어지고, 곰방대를 쥔 손이 칼처럼 두 모자의 환상을 그었다.

촤아아아악.

종이가 거칠게 찢기는 소리가 울렸다.

오색 꽃이 만발하던 꽃밭은 눈 깜짝할 사이 새하얀 빛에 휩싸였다.

[ (!) 어둠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

빛이 환상을 잠식한 직후 시야는 재차 칠흑에 잠겨 들었다.

다만 그 위로 선명히 떠오른 팝업창은 다소 생경했다.

[ (!) 대상의 카르마에 따라 ‘무용담(E)’이 완성되었습니다. ]

호구별성이나 강림 형의 경우와는 달리 사라에게 새로운 힘이 생긴 모양이었다.

“아니, 영감.”

호구별성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이렇게 금방 나올 수 있으면서 왜 죽치고 있었어?”

그녀를 한 번 돌아본 사라가 시선을 내리곤 한숨처럼 대답했다.

“꽃을 피울 힘이 있었으니까.”

독을 품은 환상인 것을 알면서도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어 했던 깊은 그리움이 업경을 통해 밀려들었다.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사라는 가슴을 일직선으로 갈라낸 상처가 치명상으로 이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꽃을 피웠다.

머무는 것만으로도 독이 퍼지는 환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티기 위해서.

[ ‘시들지 않는 꽃.’ ]

- 분류 : 무용담(E)

- 권능 : 생명

- 내용 : 그 꽃이 피면 절대 쓰러지지 않을지니.

- 효과 : 대상의 심장이 멎지 않게 한다. 꽃이 피어 있는 한 대상의 육체는 기능을 잃지 않는다.

사라의 새로운 무용담은 그렇게 비롯되었다.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치명상을 입더라도 가능한 한 길게 숨을 붙잡아 두는 힘.

마력을 아끼며 최대한 오래 버텨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아마 무척 요긴하게 쓰이겠지.

나는 구태여 묻지 않고 그렇게만 마무리했다.

“도령님까지 나오셨으니 이제 바리와 리퍼만 남았네요.”

화제를 돌리며 남은 일행을 찾기 위해 업경에 집중했다.

“……으음, 역시 하나밖에 안 느껴지는데.”

남은 일행은 둘.

한데 이만큼 이동했어도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알은 여전히 하나뿐이었다.

“누군가 먼저 빠져나온 건가?”

단군과 사라는 스스로 빠져나올 방법을 알고 있었다.

혼자서 시험을 통과한 이가 더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어둠에서 벗어났다 한들 사방은 여전히 칠흑 같은지라, 서로를 발견하지 못한 채 길이 엇갈리는 중일지도 몰랐다.

“일단 마지막 알 쪽으로 가 볼게요.”

그런 거라면 차라리 마음이 놓이지만, 어쨌든 환상 속에서 구출해야 할 이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업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일행들을 안내하며 알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늑대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당신에게 감탄합니다. ]

뜻밖에도 팝업창이 뜨면서 온통 검기만 하던 공간이 한순간에 본래 우리가 있던 곳으로 바뀌었다.

모든 것이 하얗게 꽁꽁 얼어붙은 와중, 사후세계의 권능으로 영혼들을 나비로 돌려보낸 흔적만이 희미한 녹색 빛으로 일렁이는 공원이었다.

[ (!) ‘6,000’ 드라실을 후원받았습니다.]

“응?”

예상치 못한 팝업창의 연속에 눈을 깜박였다.

깨닫고 보니 단군과 삼차사를 제외한 남은 일행들, 바리와 그림 리퍼까지 어느새 곁에 함께 있었다.

“음? 갑자기 밝아졌네?”

그림 리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늑대의 시대가 종료된 것을 보면 우리가 알에 들어가기 직전 마지막 일행이 스스로 빠져나온 게 맞는 듯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갑자기 아무것도 안 보여서 이게 대체 무슨 시험인가 했네.”

그럼 그 일행은 바리와 리퍼 중 누구였을지에 대해 작은 의문을 품자마자,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리퍼, 환상을 직접 깨트리신 건가요?”

“환상?”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환상?”

영 영문을 모르겠다는 태도에 자연히 생각이 복잡해졌다.

업경으로 인지할 수 있는 어둠의 알은 처음부터 한 개가 부족했다.

인지 범위 바깥에 있거나 혹은 누군가 홀로 시험을 통과했을 거라 여겼지, 둘 다 아닐 경우는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약점……이라고 해야 할까요. 마음속 상처를 건드리는 환상이에요. 혹시 못 보셨어요?”

“흐음, 글쎄. 그런 건 없었는데.”

그림 리퍼는 짐작되는 바가 전혀 없는지 태평하게 턱밑을 긁었다.

“내 마음의 약점이라니, 나도 궁금한걸?”

햇살같이 환한 금발과 아이처럼 둥글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을 바라보면서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면에 딱히 그늘이랄 게 없으면 어둠도 환상을 피워 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이야, 알면 알수록 재밌는 놈이야.”

똑같은 생각을 한 듯 호구별성이 그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제가 당신에게 즐거움을 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Honey.”

그림 리퍼는 그런 그녀를 향해 유럽의 신사다운 인사를 했다.

환상을 경험하지 못한 그는 아마 호구별성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테지만.

“그럼 조금 전에 시험을 통과한 것은 바리였겠구나.”

그림 리퍼에게서 바리로 시선을 옮겼다.

“……네, 제가 그런 것을 두려워하는지 몰랐어요.”

나를 차분히 응시하던 바리는 이내 더욱 깊어진 눈빛으로 나지막이 답했다.

검은 눈동자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으나, 대답 후 조용히 입을 다문 그녀에게선 평소 잔잔하게나마 읽히던 감정이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면 이걸로 티켓이 다 모였네요.”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기에 더 묻지 않고 상황을 정리했다.

세계수가 후원한 금액은 총 10,500 드라실.

어느 세계든 원하는 대로 골라서 이동할 수 있는 액수였다.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헬이 있는 니플헤임으로 갈까요?”

우리에게 시험을 권한 세계수의 뿌리가 헬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말했다.

물론 이걸 눈치챈 건 아직 나뿐이었다.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당신의 행방을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

그러고 보니 헬에게도 직접 언급한 적은 없었던가?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렸단 걸 아는지 모르겠으나, 헬은 딱히 스스로 밝힐 생각은 없는지 뻔뻔한 팝업창을 띄웠다.

“네 뜻을 따르마, 대왕.”

내 물음에 사라가 대답했다.

“너는 곧바로 이 땅의 죽음을 찾아갈 생각인 게냐?”

“글쎄요.”

나는 이 대화를 듣고 있을 헬을 의식하며 대답했다.

“어차피 헬과 제일 먼저 만나는 상대는 저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니플헤임은 제일 나중에 가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내내 헬이 유도하는 대로 끌려갔다.

이번에는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쪽은 빨리 나를 만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예정된 이상 시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걸까.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당신에게 자벨깰겨귿떠렉길빎 찾아올 법멉꿋긍뒨흐흐흐 기대벴녁띄받등렷륑빎. ]

그때였다.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당신에게 법멎믹력띱룩놉독딩궁흐흐다. ]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베블몃벋력렉걍빎 베깸띈귁띱뢍뎐꽤뢨꺄흐흐 경고합니다.]

불현듯 오류창이 뜨더니.

파아아앙!

원인 모를 붉은빛이 삽시간에 얼어붙은 공원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문자?”

붉은빛을 이루던 것은 피로 쓴 듯 새빨간 문자열이었다.

문자들은 딱히 작다고는 할 수 없었던 공원 전체를 빽빽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허.”

“뭐야?!”

“Oh, 또 무슨 시험인가?”

깜짝 놀란 이들이 주변을 둘러봤다.

“룬 문자군요. 누군가 주술을 전개했습니다.”

새로이 떠오른 문자열 사이에서 금빛을 흠뻑 머금은 단군이 말했다.

그를 중심으로 형상화된 인과였다.

“아니, 이곳에서는 마법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네요.”

주술로 공간의 법칙을 바꾸는 도사들처럼, 마법사들이 무언가 조화를 부렸다는 뜻일까.

심상치 않은 일에 경계를 높이며 주변을 살폈다.

까아악.

까아아악.

붉은 문자들 사이로 까마귀 울음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왔다.

황금색 갑옷으로 무장한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난 것은 그 직후였다.

【이국의 신들이여, 나는 프레이야라고 한다.】

프레이야.

풍요와 행운의 신이며 오딘의 전사 발키리의 수장이었다.

그녀는 묵직한 신성이 실린 신언으로 말을 이었다.

【지하의 눈을 피해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용서하길.】

“눈을 피해서 접근했다고?”

호구별성이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독기를 흘렸다.

“깽판 치고 들어오는 거 세계수는 이미 다 봤을 텐데?”

“…….”

하긴 팝업창으로 대화를 하던 중에 난입한 마당이 아닌가.

‘눈을 피해서’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대신 지금 이 대화는 들을 수 없다. 정확한 표현을 좋아한다면 정정하지. 귀를 피해 접근하는 것을 용서하길.】

호구별성의 핀잔에도 프레이야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우리에겐 무슨 볼일이시죠?”

나는 북유럽 신화 속 그녀의 역할을 헤아리며 물었다.

라그나로크는 자식들과 함께 유폐되었던 로키와 그를 유폐시킨 오딘의 전쟁이었다.

프레이야는 오딘의 편에 서 있었으니, 그녀가 헬의 눈을 피해 접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헬과는 상반된 목적을 가졌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대들이 라그나로크를 막아줬으면 해.】

그러니 그녀의 요청은 딱히 이상하지 않았지만,

【헬은 북유럽의 모든 인간들을 학살해서 만든 우주퇴적물로 끔찍한 종말을 준비하고 있어.】

덧붙여진 말은 우리 모두를 정색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무도 남지 않게 된 북유럽.

그 배후에는 헬이 있었으며, 프레이야가 언급한 그 끔찍한 종말까지 기어이 이루어낸다는 뜻이었으니.

【헬을 제거하고 라그나로크를 막아줘. 그리하면 그대에게 이 땅의 사후세계를 넘겨주겠다.】

하나 그 사실을 모르는 프레이야는 더없이 진중한 눈으로 제안했다.

이미 헬과의 독대가 예정된 나에게.

53장. 어둠의 시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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