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장. 어둠의 시험(4)
시왕이 부재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염라와 그의 아홉 형제들은 이 땅을 찾은 정체불명의 색목인들을 벌하기 위해 직접 궁궐 밖으로 나섰다.
적의 수는 모두 아홉이었다.
시왕보다 하나가 적었으나, 저승의 지배자들은 모두 눈에 어린 현기가 더없이 깊어진 채로 신성을 갑주처럼 휘감았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러한 용태를 목도한 것은 충신으로서도 처음이었다.
그는 삼백의 형제들과 함께 주군을 기다렸다.
차사로서 모시는 왕의 생사를 본능적으로 느낄 수 없었다면 더욱 끔찍한 시간이었을 터였다.
기다리던 주군 대신 염라의 궁에 다다른 것은 두 모자(母子)신이었다.
-맙소사,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기르던 독사들의 심술 때문에 평소에도 꽃밭을 제집인 양 들렀던 독사지옥의 차사들이 가장 먼저 달려가 물었다.
그들 뒤로 다른 지옥의 차사들도 심각한 낯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항상 단정하기만 했던 꽃밭의 신들이 초췌해진 얼굴로 차사들을 돌아보았다.
-인간들이…… 꽃밭에 왔습니다.
지학 즈음의 외모를 한 소년신이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대답했다.
고운 동자옷은 넝마가 되어 군데군데 붉게 물들어 있었고, 옆에 선 그의 모친은 비녀로 곱게 틀어 올렸던 머리가 엉망으로 흘러내린 채였다.
-많았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소년신은 그렇게 말하며 입가를 감싸 쥐었다.
-너무 많아서, 아버지께서…….
소년신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차사들도 더는 묻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는 와중 누군가 저 위에서 말했다.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부채를 든 풍도지옥의 차사였다.
다른 손에는 수천 년 전 어느 왕도깨비가 남겼다는 쌍안경을 쥐고 있었다.
풍도지옥의 바람으로 높이 날아오른 그는 천 리를 본다는 쌍안경으로 이 땅의 전체를 살피는 중이었다.
-대왕님들께서 찾던 놈들인가?
안경을 쓴 차사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부정하게 재물을 모은 자들을 벌하는 거해지옥에 소속된 이였다.
죄인의 삿된 행각을 냉정히 꿰뚫어 보던 그네들 특유의 눈빛이 유독 날카로웠다.
-아닙니다, 대왕님들께서는 아직 전장에 계십니다.
상황을 살피던 풍도지옥의 차사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놈들의 수가 얼마나 되오?
한빙지옥의 차사가 싸늘한 한기를 흘리며 물었다.
평소 실없는 농을 즐겨 하던 얼굴에는 일말의 웃음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수…….
그의 물음에 풍도지옥의 차사가 짐짓 말꼬리를 흐렸다.
-제 인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족히 수천은 되는군요.
대답하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수천?
-그것이 정녕 참인가?
-말도 안 돼. 어째서 그렇게나…….
시왕의 차사들이 저마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형님.
지켜보던 충신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우리 차례가 온 것 같소만.
충신에 비할 만큼 큰 키에 대검을 든 그는 도산지옥의 차사였다.
-적을 막아내는 것은 우리가 제일이지 않소.
그 뒤로 스물아홉의 차사들이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었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눈에서 물러서지 않는 강단이 묻어났다.
-그것이 도산지옥의 권능이니까.
도산지옥의 차사는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가장 강하다.
제일 먼저 나서고자 하는 그들의 뜻을 충신은 모르지 않았다.
-저도, 저도 가겠습니다……!
그때 도산지옥의 차사들 사이로 누군가 끼어들었다.
-저 역시 도산지옥의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저도 함께……!
몸도 마음도 이 땅에서 제일 앳된 막내 차사였다.
그가 나서자 단단한 기세를 피워 올리던 도산지옥 차사들의 얼굴에 불쑥 짓궂은 웃음이 나타났다.
-뭔 소리냐, 네가 왜 와!
-제연아, 너 잘못되면 우리 큰일 나!
-안 그래도 너 검 배우러 올 때마다 발설 놈들이 얼마나 염병을 떨었는데!
가벼운 어투였으나 막내 차사의 얼굴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었을 때는 되레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제발.
어린아이가 애원하듯 기어드는 목소리에 소매가 붙잡힌 차사는 그의 손등을 다정히 어루만졌다.
-그야 칼은 우리 막내가 제일 잘 쓰긴 하지.
하나 차사는 곧 단호히 그 손을 떼어놓았다.
-그래도 이건 우리 도산지옥의 몫이야.
서른 명의 차사가 막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막내야, 그렇다고 네가 도산지옥의 검사가 아니라는 건 아니다.
-살아라, 제연아.
-계속해서 살아서, 우리 ……의 유지를 이어줘.
-넌 이제 ……의 마지막 ……니까.
선봉으로 나선 도산지옥의 판단은 옳았다.
그들은 파죽지세였다.
서른의 수로 삼천의 적을 쓰러트렸다.
도산지옥의 차사들이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결코 승기를 잡지 못했으리라.
충신은 긴 숨을 토해 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끊임없이 잿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죽음이 스러질 때 이토록 선명한 냄새가 퍼진다는 사실을 전에는 알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검푸른 신성이 휘감긴 손등은 황혼에 잠긴 하늘과 똑같은 색으로 젖어 있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붉지 않은 곳이 없었고, 겹겹이 쌓인 적들의 주검 위로 두루마기 자락이 깃발처럼 펄럭였다.
콰득.
불현듯 무언가 밟히는 감각에 땅을 내려다보았다.
테가 둥근 안경이 그의 발밑에 산산조각 나 있었다.
거해지옥 누군가의 안경일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부서진 신분패가 있었지만 그는 굳이 살피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걸었다.
걸음이 멈춘 것은 바닥을 나뒹구는 부채와 갓 사이에서 숨을 고르는 색목인들을 발견했을 때였다.
풍도지옥의 칼바람에 살갗이며 옷이 갈기갈기 찢어진 모습이었다.
-빌어먹을, 또 왔잖아.
-다 뒤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이번엔 하나뿐이야.
몇 마디 주고받은 놈들이 팔다리를 덜덜 떨며 무기를 겨누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이미 전의나 긍지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고요히 나부끼는 두루마기 자락을 보는 눈에서 하나같이 두려움이 읽혔다.
죄인을 용서하지 않는 살벌한 풍도지옥의 바람이 그리 만들었을 터였다.
파아아앙.
검푸른 신성이 놈들을 덮쳤다.
끝이었다.
충신은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으깨진 곤죽이 질척하게 밑창을 적셨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걸었다.
깨진 안경, 또 거해지옥의 차사다.
녹지 않은 얼음 조각, 한빙지옥의 한기는 매섭다.
불붙은 신분패, 화탕지옥의 분노는 지옥불처럼 뜨거운 법이다.
독하게 시신을 물어뜯는 뱀들, 저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독사지옥의 원한은 사지 않는 게 좋다.
망치와 못들, 손속이 사납기로는 철상지옥도 만만치 않다.
지옥의 흔적들 사이로 충신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걷고, 또 걷다가.
어느새 익숙한 터에 이르렀다.
검수지옥의 차사들이 검술을 연마하는 연무장이었다.
다른 지옥의 형제들과 함께 가르침을 받던 막내를 이곳에서 데리고 나온 적도 여러 번이었다.
……여기에 있을까.
문득 그런 기대를 떠올렸을 때, 그는 느릿하게 자신의 생각을 곱씹었다.
꼭 누군가를 찾고 있던 것 같은 기분에 그는 천천히 연무장의 터를 돌아보았다.
보기 좋게 뻗었던 처마가 볼품없이 깨진 채로 흙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무너진 돌담 밑으로 부러진 검도 여럿 보였다.
부러진 검.
충신의 시선이 멈추었다.
그는 검의 생김새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렇다 할 장식이 없는 평범한 검들이었다.
그곳에 있는 검 전부가 검수지옥 차사의 것이라고 확신할 때까지 그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끈질기게 그것들을 응시했다.
-형.
어느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보이지 않아요.
옷자락을 붙드는 손길이 느껴져서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기 올 때까지…… 아무도 없었어요.
도산지옥의 차사들과 함께 싸우겠다던 막내였다.
색이 옅은 머리칼이 그새 군데군데 붉게 얼룩져 있었다.
살갗이 워낙 흰 탓에 그 색깔이 더욱 대비되어 보였다.
두 지옥의 검을 익힌 손에는 여태 검이 쥐어진 채였다.
검을 얼마나 휘둘렀는지 찢어진 손바닥에서 줄줄 흐른 피가 자루를 적시다 못해 칠갑해 놓았다.
혈관이 도드라진 팔은 언제든 적을 발견하는 즉시 전장으로 뛰어들 기세였다.
그것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충신은 막내에게 손을 뻗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모두가 쓰러졌다 해도 이 녀석이 싸우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본능과도 같은 강렬한 의지에 막내의 마른 어깨를 움켜쥐었다.
콰아아앙.
그 순간 폭음이 귀청을 때렸다.
충신은 막내를 붙잡은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터무니없이 작은 몸이 제 품을 벗어나려고 바르작거리는 게 느껴졌다.
-형, 다른 형들이…….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말을 끊으며 녀석이 쥔 검을 노려보았다.
앞서 들었던 도산지옥 차사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을 돌았다.
-살아라, 제연아.
-계속해서 살아서, 우리 ……의 유지를 이어줘.
-넌 이제 ……의 마지막 ……니까.
그렇다, 막내는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녀석이 이 땅의…… 새로운 ……니까.
그러니 자신은 새로운 ……을 지켜야 한다.
유일하게 남은 제 형제를, 반드시 지켜 내야만 한다.
그리 되뇐 순간이었다.
파아아악!
돌연 가슴을 가르고 붉게 터진 피에 충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 많은 색목인을 상대하면서도 입은 적 없는 깊은 상처였다.
날카로운 창에 폐부를 깊이 찔린 듯 선연한 고통이 번졌다.
-괜찮아요, 형.
그때 터지는 핏물 너머에서 막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여기 있어요.
자꾸만 그의 품을 벗어나 전장으로 나서려던 녀석이, 단단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형의 곁으로 돌아올 거예요.
충신은 품 안의 막내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돌아오지 못한 밤.
붉게 젖은 머리칼을 한 그날의 막냇동생이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몇 번이든 같이 싸워요.
녀석은 끝내 내려놓지 않은 검을 고쳐 쥐었다.
충신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단단히 붙잡았을 터인데 막내는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아직 혼자서 어둠을 쫓아내지 못해도 돼요.
눈이 마주친 녀석이 미소 띤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내가 할게요.
촤아아악.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갈랐음에도 무언가 베이는 소리가 또렷했다.
검로를 따라 흰 선이 그어지더니 그대로 허공이 거칠게 찢겨 나갔다.
화아아아악.
동시에 막내의 검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빛이 새하얗게 산개했다.
빛은 황혼 아래 모든 것이 붉게 물들었던 땅을 순백으로 뒤덮고는 한순간에 칠흑 같은 어둠을 불러왔다.
눈을 채 깜빡이기도 전이었다
충신은 한없이 어두운 공간에 우뚝 서 있었다.
“아, 됐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그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무심코 숨을 멈추었다.
“형, 괜찮아요?”
익숙한 온기가 팔뚝을 감쌌다.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차분히 저를 올려다보는 앳된 얼굴이 있었다.
그의 왕이었다.
“어둠의 시험은 환상 속에 가두는 시험이었어요.”
환상.
왕의 말에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던 그의 나라를 잔상처럼 떠올릴 때였다.
“거 환상인 줄도 모르고 빌빌대기는. 대왕님께서 구해주셨으니 성은이 망극하다고 절이나 해라, 염병할 놈.”
역신이 심드렁하게 설명을 보탰다.
“…….”
충신은 다시 왕을 바라보았다.
-아직 혼자서 어둠을 쫓아내지 못해도 돼요.
-내가 할게요.
영원히 앳된 얼굴 위로 환상 속에서 들은 목소리가 겹쳐졌다.
“……그렇군요.”
그제야 그는 꽉 막힌 목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자신의 왕을 마주했다.
“대왕님께서, 저를 구해주셨군요.”
……당신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나의 천명일진대.
차마 다하지 못한 말이 혀끝에서 맴돌고, 사방을 뒤덮은 어둠이 그를 질책하듯 일렁였다.
가슴을 갈라 낸 상처는 이미 없건만 폐부를 찌르는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