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장. 어둠의 시험(3)
어둠이 만들어 낸 환상에 맞서 늑대가 삼킨 빛을 찾는 시험.
나는 시험에서 통과한 단군과 함께 천천히 권능에 집중하며 걸었다.
“업경으로 다른 분들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
이곳에는 일행을 가둔 알이 네 개 더 존재했다.
단군을 제외하고 남은 일행은 다섯이었으니 하나가 부족한 수인데, 인지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는 건지 스스로 통과한 것인지는 아직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걸로 두 개째예요.”
익숙한 기운을 품은 구체 앞에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걸음을 멈췄다.
알에 손을 올리고 권능을 집중하자, 그와 동시에 일행을 가두고 있는 어둠이 내게 전해져 왔다.
살아 있는 것들의 숨통을 죄고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만드는 힘.
“독기…….”
역병의 신을 품은 알이었다.
갇힌 이를 깨닫자 그 안에 펼쳐진 어둠도 더욱 선명하게 그려졌다.
자욱한 독기.
사방이 널린 시신들.
비탄에 젖은 통곡.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이 덮친 광경.
“과거의 어느 순간을 그대로 풀어놓은 인과입니다. 시간의 깊이를 보건대 삼천 년쯤 되었군요.”
단군이 문자열을 살피며 말했다.
“어둠이 남긴 흔적은 시험을 통과하면 사라지게 됩니다만, 그것과 별개로 내부의 상황은 녹록지 않을 겁니다.”
즉, 이대로 알에 들어가면 어둠이 만들어 낸 독기와 맞닥뜨린다.
대신 호구별성이 무사히 시험을 통과한다면 중독되었다 해도 말끔히 낫겠지.
형들의 환상으로 인해 영혼에 독이 퍼졌던 내 상처가 시험을 통과하자마자 모두 사라진 것과 같이.
“들어가시겠습니까, 염라?”
그가 부드러운 미소로 물었다.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발을 내디뎠다.
구체를 이룬 표면이 물처럼 출렁였다.
온몸이 서늘한 기운에 감싸이며 한순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
불현듯 코를 찌르는 악취에 숨을 삼켰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무언가가 발에 챘다.
밑을 내려다보자 엎드린 등과 굽은 팔이 시야에 들어왔다.
병들어 죽은 이의 시신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드러난 손등과 목덜미가 검게 썩어 가고 있었다.
“분위기가 꽤 살벌합니다.”
단군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을 입구에 곧게 허리를 편 장승 부부.
형형하게 눈을 치켜뜬 수호신 아래 머리가 희끗한 사내와 여인이 손을 겹친 채로 쓰러진 것이 눈에 띄었다.
사지가 뒤틀린 와중에도 맞잡은 두 손이 그들의 사정을 짐작하게 하여 더욱 처참하게 느껴졌다.
“다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안타까운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정돈되지 않은 길에 드문드문 널린 시신들.
그 가운데 짙은 독기가 안개처럼 흘러넘치고 있었다.
어떤 치명적인 역병도 이토록 순식간에 마을 하나를 몰살시킬 수는 없다.
재앙의 신이 지닌 참혹한 권능이 아닌 이상에는.
“누나는 아직 안에 있어요.”
마을을 뒤덮은 신성을 업경으로 꿰뚫어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는 친숙하게까지 느껴지는 역병의 신성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단군.”
단군은 내 말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끄덕했다.
조심스럽게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인세에 강림한 재앙신과 마주한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유난히 흰 소복에 검은 머리를 풀어헤친 조그만 소녀.
어째서인지 일고여덟 살가량의 모습이었지만, 나는 한눈에 그 아이가 내가 찾던 신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이 앞에는 알록달록 화려한 옷을 걸친 누군가가 비틀린 사지를 늘어뜨린 채 쓰러져 있었다.
드러난 살갗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문드러졌지만 머리카락에 꽂힌 비녀로 성별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주위로 방울이며 가위 따위의 무구가 널린 것을 보면 역신을 달래려던 무당인 듯했다.
그녀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닿기만 해도 위험할 만큼 녹슨 작두와 썩은 음식들로 차려진 제사상이 있었다.
【이제 알겠지.】
신을 달래지 못한 굿판을 내려다보며 어린 신이 말했다.
【난 너희들의 말을 듣지 않아.】
심장이 얼어붙을 듯 냉담한 신언이었다.
자그마한 몸에서 일대를 지옥으로 녹여버린 역병의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녹록지 않을 거라던 단군의 말처럼, 독기는 어느새 지켜보는 우리의 숨결마저 거칠게 흐트러트렸다.
평소 호구별성이 뿜는 독은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해치지 않았다.
하나 눈앞의 그녀에게서는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을 멸하겠다는 잔혹한 뜻이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불온한 의지를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빚어낸 것만 같았다.
끔찍한 공포를 내린 이가 저토록 작은 아이라는 사실이 그녀를 보다 두려운 존재로 비추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네요.”
가만히 지켜보던 단군이 입을 열었다.
“어둠이 품은 독과 재앙의 신이 지닌 독이 뒤섞이며 더욱 깊은 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곧은 손가락으로 호구별성이 풍기는 짙은 독기를 가리켰다.
“덕분에 어둠은 그녀에게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만, 해롭지 않으니 빠져나갈 필요성 역시 느끼지 않습니다.”
그건 결국 호구별성이 절 시험하는 어둠을 한 몸처럼 여긴다는 말일까.
생각지 못한 상황에 침음을 삼키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그녀를 해치지 않는 것은 다행이나, 그녀가 어둠을 제 것으로 여긴다면 몰아내려는 시도가 되레 그녀를 자극할지도 몰랐다.
【나한테 애원하고 빌어도 소용없어.】
냉정하게 이어지는 앳된 목소리.
끝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호구별성은 왜 이런 끔찍한 일을 벌였을까.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업경의 권능은 더 이상 호구별성을 읽어 내지 못했다.
환상에 갇힌 걸 구하러 와 놓고, 정작 그녀의 눈을 가린 어둠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니.
【그러니까…….】
자조감에 쓰게 웃는 사이 말을 잇던 어린 신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영감?】
새카만 어둠이 일렁이는 역안으로 나를 담는 순간,
뜻밖에도 자비 없이 싸늘하기만 하던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아니…… 영감은, 이제 없는데.】
재앙의 의인화.
섬뜩하고 불길한 모습 위로 내가 아는 유쾌한 신의 얼굴이 겹쳐졌다.
아이는 언제 그렇게 잔혹한 빛을 띄웠냐는 듯 순진하게 뜬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나 천천히 정신을 차리는 것처럼.
검게 물들었던 흰자위가 조금씩 백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랬지. 너는 영감이 아니라…….】
아이가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다만 그 얼굴에는 기쁨이 아닌 깊은 통한이 서려 있었다.
동시에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었고,
그녀와 내가 처음부터 서로를 신뢰할 수 있게끔 한, 이제는 없는 이와의 유대였다.
파아아앙.
작은 몸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빛은 삽시간에 시야를 물들였고, 눈이 부실 정도로 차오른 끝에 다시금 새카만 칠흑이 되었다.
“아…….”
흙바닥에 쓰러져 있던 시신도, 무구와 차례상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건 그새 눈에 익어버린 어둠뿐.
우리는 무사히 재앙이 덮친 마을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응? 뭐야?”
내가 아는 모습으로 돌아온 호구별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어딘데? 이거 왜 이렇게 시커매?”
그저 더없이 황당한 기색이었다.
“시험을 통과하셨군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호구별성을 바라보며 단군이 차분하게 말했다.
“어둠을 깨뜨릴 빛을 스스로 찾으신 듯합니다.”
빛을 찾았다.
그 말을 곱씹으며 나는 가만히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3천 년쯤 되었나? 시취(屍臭)가 서해까지 이르렀던 것이. 말로만 듣던 재앙신이 저승에 머물고 있을 줄은 몰랐어.
-한반도의 서쪽을 뒤덮었던 대역병. 그게 그대의 권능이었지?
이전에 업신을 모시러 갔을 때, 용궁의 왕자 오휼이 했던 말.
-아니, 다 어릴 때 얘기지, 뭘 또 그 얘기를 하고 그래?
그에 멋쩍게 대꾸하던 호구별성까지.
그래, 방금 본 재앙은 그때 들었던 3천 년 전의 일이 맞구나.
-아직 별성의 신성이 여물지 않았을 때였지. 권능을 다루는 게 서툴러 병이 퍼져버린 것을 지난 염라가 나서서 수습을 했다.
사라는 그리 말했지만, 그날의 일을 직접 확인한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실수로 일어난 참사가 아니라 역신의 의지로 일으킨 재앙이었으며,
재앙을 수습하신 우리 대왕님이야말로 역신의 어둠을 깨트린 빛이었음을.
-별건 아니고 그냥…… 영감탱이 죽었다니까, 그 영감네 핏덩이가 눈에 밟히네.
-내가 옛날에 영감한테 빚을 좀 졌거든.
언젠가 그녀가 말했던 빚이었음을.
“잘하셨어요, 누나.”
조용히 확신하면서 나는 말했다.
“누나 혼자서 환상을 벗어나신 거예요.”
“환상에서 벗어났다고?”
호구별성이 주변을 살피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어둠의 시험을 통과하기 직전, 아이가 보였던 것과 빛을 띤 미소였다.
“뭐, 끝났다니까 됐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단군이 그러했듯 호구별성도 제가 맞섰던 어둠을 내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 시험을 통과한 그들이 제 어둠을 감추고자 하는 것에 새삼 되짚게 되었다.
늘 과분할 만큼 도움을 주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아직 내게 온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음을.
관계란 다가갈 수 있는 만큼 다가가고 또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며 쌓아가는 것.
억지로 들출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근데 왜 너랑 얘밖에 없어?”
호구별성이 화제를 돌렸다.
“영감이랑 다른 애들은? 걔들도 환상에 갇혀 있는 거야?”
“맞아요.”
짧게 긍정하고 어둠 속을 가리켰다.
“그래도 업경을 통해서 위치는 알 수 있더라고요.”
“아, 혼자 못 나올까 봐 찾아다니고 있구나?”
바로 이해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아마 너 아니었으면 못 나왔겠지.”
그러고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덧붙인 뒤 앞장서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럼 빨리 가자. 다들 못 볼 거 보고 있을 텐데.”
서두르는 걸 보니 평소엔 투닥거려도 역시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또 누군가 있네요.”
짧은 미소와 함께 수긍하며 업경이 감지한 방향을 향해 막 돌아선 그때였다.
“……!”
발걸음을 떼자마자 돌연 해일과도 같은 어둠이 밀려들었다.
반응할 틈도 없이 이미 의식은 어둠에 잠식되고 있었다.
멋대로 손끝이 떨렸다.
코끝을 맴도는 어느 과거의 기억에 박동이 점차 거칠어졌다.
쓰러뜨린 적의 수만큼 질척해진 두루마기가 사지를 내리눌렀다.
상처 없는 손바닥에서 통증이 올라오고 그 아래서 핏물이 스민 검자루가 만져졌다.
나는 나를 격렬히 끌어당기는 그곳으로 저항 않고 이끌려 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어둠과 함께 몰려오는 풍경이 있었다.
단군이나 호구별성을 품었던 어둠과는 달랐다.
채 닿기도 전부터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뚜렷하게 느껴졌다.
황혼 아래 붉게 젖은 땅.
베일 듯 날카롭던 검은 그믐달.
주인을 잃고 나뒹구는 신분패.
마지막 힘을 다해 깊숙이 박아 넣은 검.
삼백의 형제가 남긴 흔적.
끝내 돌아오지 못한 나의 가족들 앞에 멈춰 서서 눈을 감았다.
곳곳에 피어오르는 잿빛 연기에서 죽음이 스러지는 매캐한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