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장. 어둠의 시험(2)
-제연아.
-막내야, 이리 와라.
귀를 파고드는 형들의 목소리.
나는 희미하게 울렁이는 속을 다스리며 그들을 마주했다.
색이 선명한 단청 아래로 반듯하게 쓴 갓이 보였다.
내게 미소 짓는 그리운 얼굴들이 눈에 들어오자 항거할 수 없이 웃고 말았다.
“환상인 것을 아는데…….”
혀끝이 아려 왔다.
파아아악.
검을 쥔 팔뚝에서 금세 피가 터졌다.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흑암지옥의 독.
내 마음이 동요할 때마다 흔들리는 영혼의 상처.
그러나 주저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환상을 향해 진짜 형들에게는 닿지 못할 말을 건넸다.
“내 가장 큰 약점이 형들이라는 건 역시 좀 괴롭네요.”
파아아아악.
동요하지 않으려 애써도 독은 다시금 빠르게 퍼져 나갔다.
번져 가는 통증을 무시하고 나를 둘러싼 가짜 형제들에게 검을 겨누었다.
-막내야, 무슨 일이냐.
-흉흉하게 그 쇠꼬챙이는 또 왜?
-하여튼 검수지옥 놈들한테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그들은 겨누어진 검첨 앞에서 능청스럽게 농을 쳤다.
정말이지 기억 속 형제들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재차 핏물이 터지며 어쩔 수 없이 몸이 떨렸다.
무심코 씹어버린 혀에서 쇠 맛이 번졌으나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상황에 집중했다.
나를 이곳에 묶은 어둠과 흑암지옥의 독은 본질이 같다.
어둠에 잠식될수록 독 또한 나를 좀먹어 갈 것이다.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
혼자뿐인 이곳에서 또다시 중독되어 정신을 잃고 싶지 않다면.
“상처가 전부 도지기 전에 도령님을 만나야 해.”
애써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감정꽃을 엮어주며 걱정을 표하던 얼굴을 떠올렸다.
흑암지옥의 독에 당한 나를 지키던 크고 작은 등을 떠올렸고,
더 이상 상실을 곱씹게 하고 싶지 않은 흉터투성이 손을 떠올렸다.
형들을 잃어버린 자리에 남아 준 이들이었다.
“같은 꼴로 또 쓰러져서는 안 돼. 다시는…….”
그렇게 다짐하는 와중에도 거듭 살갗이 찢어지고 곳곳이 붉게 젖어 들던 때였다.
[ (!) 무용담(E) ‘흘린 피는 흐르는 피로’가 당신이 흘리는 피를 감지합니다. ]
뜻밖에도 팝업창이 떴다.
마검을 쓰러트리면서 얻었던 무용담.
적에게 입은 공격에 따라 최대 1,000%까지 공격력이 상승하는 힘이 반응했다.
[ (!) 무용담(E) ‘흘린 피는 흐르는 피로’의 효과로 공격력이 ‘400%’ 상승합니다. ]
벌써 꽤 많은 피를 흘린 탓일까.
검자루를 움켜쥔 손아귀에서 이때껏 없던 힘이 느껴졌다.
-아이고! 제연아, 그거 내려놔. 그러다 또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우리 막내, 오늘따라 이상한데?
-검수지옥 놈들이 순진한 막내에게 또 이상한 걸 시킨 게 분명하다.
가짜 형제들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 어깨와 등을 토닥였다.
지독할 만큼 다정한 손길이었다.
쩌저적.
그 익숙함에 목이 메는 순간, 독은 찰나를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영혼에 균열을 일으켰다.
[ (!) 무용담(E) ‘흘린 피는 흐르는 피로’의 효과로 공격력이 ‘500%’ 상승합니다. ]
영혼의 균열과 함께 갈라진 육체의 상처는 그만큼 내게 강한 힘으로 되돌아왔다.
“하하…….”
알기 쉬운 규칙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 형제들을 흉내 내는 환상을 돌아보았다.
“웃기지 않아요?”
이 자리에 없는 형들을 향해, 끝내 닿지 못할 말을 건네면서.
“형들이 내 약점이라는 사실이 너무 아픈데, 지금은 그게 나를 강하게 해주고 있네요.”
묘한 기분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상승한 힘을 고스란히 품은 팔로 검을 내리그었다.
촤아아아악!
거칠 것 없는 검로.
환상은 단번에 베여 나갔다.
-제연, 제연아…….!
-막내야, 어째서!
-어찌 이토록 모질게 구는 것이냐, 제연아…….!
눈을 가린 어둠은 형제들의 모습으로 피 흘리며 내게 팔을 뻗었다.
자꾸만 나를 잡아채 과거로, 더 깊은 과거로 끌고 가려 들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계속해서,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나의 약점을 스스로 찢어발겼다.
촤아아아악!
촤아아아아악!
촤아아악!
언제까지고 형들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있을 것만 같던 환상들은 차츰 진흙 인형 같은 형태로 변했다.
녹아내리기 시작한 덩어리 사이에서 응축된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 여기 있었구나.”
염라궁이나 가짜 형제들과는 다른, 근원적인 힘.
나는 그 짙고 강렬한 기운을 직시하며 검을 내뻗었다.
“늑대들이 삼켰다는 태양과 달이.”
촤아아아악!
한데 엉긴 기운이 갈라졌다.
새하얀 빛이 폭탄 같은 기세로 쏟아지며 모든 것을 뒤덮었다.
이 시험의 끝에서 되찾아야 할 빛이었다.
[ (!) 어둠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
팝업창이 떴다.
“하아…….”
차츰 사그라지는 빛 속에서 주변을 둘러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염라궁의 풍경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이 나타난 것은 모든 것이 새하얗게 얼어붙은 땅이었다.
희디흰 얼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빛만이 투명하게 산개하고 있었다.
몸을 내려다봤다.
“……상처가 사라졌네.”
영혼에 퍼진 독으로 육체까지 번졌던 상처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흑암지옥의 독이 남긴 영혼의 상처는 천계의 감정꽃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다.
한데 어둠의 시험을 치르는 동안 생겨난 영혼의 상처는 시험을 마치자마자 단순한 악몽이었던 것처럼 무(無)로 돌아갔다.
“하긴…… 흑암지옥의 권능과 완전히 같은 힘은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시험에 불과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마지막에 찾은 빛이 어둠을 몰아낸 영향일지도 몰랐다.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늑대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당신에게 감탄합니다. ]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미드가르드로 돌아가는 즉시 약속한 ‘6,000’ 드라실을 지급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때 다시금 팝업창이 떴다.
“……미드가르드로 돌아가는 즉시, 라고요.”
문득 눈에 들어온 문구에 인상을 썼다.
새하얀 얼음의 땅.
이곳은 본래 우리가 있던 장소가 아니었다.
마검의 시험을 치르고, 어둠의 시험을 통과한 나를 세계수가 또 다른 곳으로 전이시킨 것이다.
“제 일행들은 어디에 있죠?”
그럼에도 함께 어둠의 시험에 임했던 차사들과 바리, 단군은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어둠의 시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건가요?”
세계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길어지는 적막에 덩달아 차가워지는 손을 움켜쥐었다.
-제가 본 것은 당신뿐이었습니다, 염라.
단군의 말이 떠올랐다.
-현재로선 헬이 당신을 부른 방식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극단적으로는 다른 이들을 모두 배제하고 당신만을 자신의 궁전으로 데려가는 경우도 가능하겠지요.
눈보라가 흩뿌려진 궁전.
망자들의 손톱을 엮는 죽음의 왕.
그리고 나를 이곳으로 이끈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
비로소 희게 얼어붙은 땅으로부터 지금껏 의식하지 못했던 익숙한 신성을 감지했다.
언젠가 마주하기로 예정된 그녀의 존재를 되새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제 일행들과 함께 늑대의 시대를 빠져나갈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내뱉자마자,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그들이 정말 살아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지 묻습니다. ]
돌아온 질문에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단군의 예언으로 짐작건대 그녀가 대화를 원하는 것은 나였다.
마검의 시험과 어둠의 시험을 모두 통과함으로써 쓸모를 증명한 게 나뿐이라면, 이대로 일행들을 어둠 속에 내버려 둔 채 나만을 궁전으로 데려가는 게 일이 훨씬 간단하지 않은가.
“문제가 있다면 제가 직접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때문에 나는 차게 식은 주먹에 더욱 힘을 실으며 말했다.
“혼자서는 절대 미드가르드로 돌아가지 않아요.”
다만 단호히 말하면서도 내 뜻이 통할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나를 이동시키는 것은 오롯이 세계수의 권한이었으니까.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
그런데 그녀의 반응은 뜻밖에도 긍정적이었다.
“제가 일행들과 돌아오면 함께 나갈 길을 열어주신다는 뜻인가요?”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맹세라.
이 상황에서 말뿐인 맹세에 의미랄 게 있을까.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도 구태여 꺼낸 단어에 쓴웃음이 샜다.
“그럼 절 다시 늑대의 시대로 보내주세요.”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당신에게 행운이 따르기를 바랍니다. ]
팝업창을 끝으로 나는 금세 공허와도 같은 공간으로 전이되었다.
해와 달이 삼켜진 종말의 때였다.
보이는 것이라곤 강물처럼 불길하게 넘실거리는 짙은 어둠뿐.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그 어떤 감각도 기능하지 않는 무(無)의 공간이었다.
“아…….”
오감 대신 업경에 집중하며 천천히 주변의 광경을 그려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공터.
공터 곳곳에 놓인 무언가의 덩어리.
업경의 감각을 곤두세울수록 어둠의 형상이 선명해졌다.
“……저기에 갇혀 있구나.”
크고 둥그런 형태를 취한 어둠은 숫제 거대한 괴물이 낳은 알처럼 보였다.
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것 하나하나가 일행들을 품고 있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알을 깨트리고, 모두를 저 안에서 꺼내야 해.”
죽음을 고쳐 쥐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자리한 알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내가 막 손을 뻗는 그때.
촤아아아악.
손끝이 채 닿기도 전에 둑이 터지듯 구체가 갈라지며 강력한 힘이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 자력으로 알을 깨고 나온 것이다.
업경의 감각이 본능적으로 깨진 알의 틈에 집중했다.
직후 예기치 못한 무언가가 전신을 묵직하게 덮쳐 왔다.
“윽, 흐으…….”
일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의 무게감에 나도 모르게 숨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마치 흑탑주의 업이 밀려들던 그때 같았다.
감각을 닫을 생각조차 못 하고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지나치게 선명하며 한없이 질척한…….
챙그랑.
무심코 떨어뜨린 검이 바닥을 굴렀다.
나를 짓누르는 것이 대상의 업인지 혹은 감정인지 더듬으며 떨리는 숨을 의식적으로 크게 들이쉬었다.
날카롭다 못해 매섭기까지 한 냉기가 폐부에 들러붙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세상 전체를 뒤덮을 수 있을 만큼 광대했고, 기이하리만치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증오.
업이 아니라, 대상의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긴 시간 수없이 압축되고 또 압축된 감정이었다.
난생처음 접하는 밀도에 자꾸만 숨이 막혔다.
부러 힘껏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데도 색색거리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귓가를 스쳤다.
이 감정은 분명 증오인데 어째서 이토록 차갑고 정적인 걸까.
일반적인 증오가 뜨거운 분노라면, 이것은 용암 그 자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에 가까웠다.
함에도 그 자리에 멈춰 있는 일 없이 계속해서 고요히 팽창하고 있었다.
인간이 품을 만한 감정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오랫동안, 가장 끔찍한 고통을 감내해 온 자가 아니라면 감히 품을 수 없는 무게였다.
도대체 이것은 누구의…….
“이런.”
그때, 문득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가 빳빳이 굳어진 몸을 어루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내리누르던 증오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꿈처럼,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로.
“역시 무사하셨군요, 염라.”
나는 내 앞에 선 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금빛으로 빛나는 문자열과 함께 하얀 두루마기 자락이 나부꼈다.
남자는 여느 때와 같이 수려하게 웃고 있었다.
무슨 조화인지 그의 주변은 꼭 불을 밝힌 듯 환했고, 어째선지 그 모든 것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빠져나오는 것이 조금 늦었습니다.”
여상한 얼굴.
이제는 익숙해진 그 미소를 마주하면서, 느릿한 사고를 움직였다.
그를 중심으로 흩날리던 수많은 문자가 촛불 꺼지듯 사그라지고 있었다.
저를 가두었던 어둠의 인과를 읽어 스스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인간이 품었다고는 믿기 힘든 감정을 다시금 조심스레 곱씹으며 생각했다.
그 증오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그를 시험하던 어둠?
아니면…….
“공교롭게 되었군요. 당신에게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하나 스스럼없이 그것을 입에 담은 그에게, 나는 목이 꽉 막혀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의 미소는 여전히 친절했고 부드러웠다.
동시에 인고의 세월 끝에 닳아버린 영웅의 얼굴이었다.
그와 같은 얼굴로 늘 그런 지독한 감정을 갈무리하고 있던 것이다.
바리공주가 내게 준 조언을 상기했다.
-그대가 대상의 본질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는 건 두 가지 경우지.
-상대가 감추고 있는 경우, 그리고 그대가 원하지 않는 경우.
-누군가의 업을 안다는 것은 결국 그것을 함께 짊어진다는 뜻이니까.
그녀의 말대로였다.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그 역시 누군가와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내겐 그가 덮어 둔 마음을 파헤칠 자격이 없다.
“당신이 무탈하게 빠져나와서 다행이에요, 단군.”
그렇게 단상을 정리했다.
“시험이 시험인지라 다른 분들이 걱정이었거든요.”
“직접 구할 생각이시군요.”
고작 그 한마디로 내 뜻을 이해한 그가 다시 한번 눈을 휘어 웃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염라.”
언제나처럼 나를 돕는 것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