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장. 마검의 시험(1)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사신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그림 리퍼.
나는 투명하게 반짝이는 영혼의 조각들 사이 우뚝 선 그를 눈에 담았다.
망자를 가야 할 곳으로 이끄는 것.
내게 주어진 사신의 천명 또한 다르지 않을진대.
“제게도 사후세계의 권능이 있어요, 그림 리퍼.”
그림 리퍼는 왜 그런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잠시 지었으나, 금세 말뜻을 이해하고 장난스럽게 눈썹을 으쓱였다.
“좋아! 그럼 한번 해 보겠어, 킹?”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안내를 따라 허공에 흩뿌려진 얼음 파편들 사이에 섰다.
“자, 이렇게 조각들을 손에 담고 권능을 불어넣으면 돼.”
그림 리퍼가 내 손에 사금처럼 반짝이는 얼음 파편을 모아주었다.
“네, 해 볼게요.”
손안에 담긴 영혼의 조각에 조심스럽게 사후세계의 권능을 불어넣었다.
파아앙!
검푸른 신성이 번쩍였다.
손바닥에서 하얀빛을 발한 나비가 꽃이 만개하듯 날개를 폈다.
그림 리퍼의 말마따나 평생의 시간이 빚어낸 알곡이며, 평생의 소중한 순간들이 담긴 날갯짓이었다.
팔랑이는 나비의 날갯짓을 따라 내게도 더는 생자(生者)가 아니게 된 이의 평생이 밀려들었다.
내 것처럼 마음을 적시는 삶.
부디 그가 오롯이 평온하기를 바랐다.
파아아아-앙!
그 순간, 검푸른 신성이 드넓게 흩어진 얼음 파편을 전부 감싸며 다시 한번 번쩍였다.
희게 빛나는 날개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듯 수없이 펼쳐졌다.
흐드러지도록 만발한 꽃비 같은 광경이었다.
날아오른 나비 떼는 봄바람에 휘몰아치는 꽃잎처럼 나를 한 번 감싸고는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얼어붙었던 땅에는 나비를 따라 찾아온 봄이 따뜻한 녹색 빛으로 아른거리고 있었다.
“아…….”
생각지 못한 모습에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이들을 구하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효과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오잉, 권능을 얼마나 불어넣은 거야, 킹?”
그림 리퍼가 놀란 눈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그보다 마력은 괜찮아? 부족하지 않았어?”
“아뇨, 마력은…… 문제없어요.”
나는 다소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나비가 앉았던 손을 꼼지락거렸다.
애초에 마력은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다.
앞서 그림 리퍼가 나비 한 마리를 보내주는 데만도 많은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 데다, 나로서도 처음 시도해 보는 일인지라 신중해야 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저승의 대왕님께서 일개 서방 사신과 같을 리 없지.”
팔짱을 낀 강림 형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역시 그런가? 우리 킹이 자그맣고 귀엽다 보니 대왕님이신 걸 자꾸 잊지 뭐야.”
그림 리퍼가 짓궂게 웃으며 내 머리칼을 헝클었다.
그 행동에 형이 한껏 미간을 좁혔지만, 나는 형이 나를 그림 리퍼와 비교하며 치켜세우는 게 훨씬 부담스러워서 그냥 그의 손길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당신의 권능에 감탄합니다. ]
그때 불현듯 처음 보는 팝업창이 떴다.
[ (!) ‘1,000’ 드라실을 후원받았습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화폐 드라실을 이런 식으로 얻는다고?
“어라……?”
깜짝 놀라서 곧장 인벤토리를 열었다.
[ 드라실(M) ]
- 세계수가 찬사의 의미로 건네는 황금 조각
- 보유량 : ‘1,000’ 드라실
M은 처음 보는 등급이었고, 당장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어쨌든 드라실이란 세계수의 후원을 통해 얻을 수 있음에 주목했다.
하긴, 애초에 세계수의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지하철이 아닌가.
세계를 넘나드는 조건이 세계수의 인정이라는 것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조건이었다.
물론 ‘여덟 번째 뿌리’의 의미가 모호해서 조금 난감하긴 하다만.
“이야, 킹은 1천 드라실이나 주는구만?”
지켜보던 그림 리퍼의 눈이 한층 커졌다.
“나는 고작해야 1백 드라실 쥐여준 게 끝이었는데.”
“리퍼도 후원을 받으셨군요?”
“응, 처음 한 번뿐이었지만.”
처음 한 번이라.
한 번 보여준 권능에는 세계수가 반응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턱을 문질렀다.
1천 드라실로 구할 수 있는 티켓은 단 한 장뿐.
차사들과 바리, 단군 몫까지 구하려면 5천 드라실이 더 필요했다.
“혹시 드라실을 더 얻을 방법을 아세요, 리퍼?”
“흐음, 글쎄.”
내 물음에 그림 리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 드라실을 받을 때 뭐가 이어서 더 뜨긴 했어. 관심 없어서 대충 보고 껐지만.”
“혹시 연계성 팝업창이었나요?”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당신이 좀 더 멋진 권능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
내가 의문을 표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팝업창이 떴다.
“야, 얘 우리 얘기 다 듣고 있는 것 같지 않냐?”
호구별성이 잔뜩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팝업창을 가리켰다.
“으음,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우리는 지금 세계수 안에 있잖아요. 우리의 움직임은 전부 인식하지 않을까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추측했다.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당신을 늑대의 시대로 초대합니다. ]
“늑대의 시대는 또 뭐야!”
잇따른 팝업창에 호구별성이 더욱 짜증 넘치는 태도로 삿대질했다.
“초대고 뭐고 그딴 이름이 붙은 곳에 퍽이나 가고 싶겠다!”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옛날부터 쓰던 이름이라 어쩔 수 없다며 변명합니다. ]
“이놈, 진짜 듣고 있는 것 맞잖아!”
호구별성은 잔뜩 질린 얼굴로 인상을 썼다.
“늑대의 시대라면 라그나로크의 전조. 혹한의 핌불베트르 이후에 찾아왔다는 혼란한 세상을 말하는 거였죠.”
팝업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당신의 박식함에 감탄합니다. ]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당신이 늑대의 시대에서 살아남는다면 ‘6,000’ 드라실을 후원하겠다고 제안합니다. ]
“6천이라. 이번에도 어째 애매한 액수구나.”
지켜보던 사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니, 교묘하다고 해야 할까.”
“그림 리퍼를 포함한 나머지 여섯의 푯값이로군.”
단번에 이해한 강림 형이 사라의 말을 받았다.
[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염라. ]
찰나 단군이 같은 신화에 소속된 이들만 들을 수 있는 전음을 걸어 왔다.
세계수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 이 세계수는 북유럽을 양분하고 있는 세력 중 하나가 새로이 구성한 신화입니다. ]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이미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 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우리를 시험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
[ 세계수의 주인이 용병을 찾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내 대답에 단군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 마지막 싸움이 길어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두 세력의 힘이 비등하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
[ 그렇죠. 싸움을 끝내기 위해 추가적인 힘이 필요할 테고요. ]
즉 세계수의 제안을 받으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티켓뿐 아니라, 북유럽을 양분한 거대 세력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 사실 답은 간단해요. ]
길게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 세계수의 제안을 무시한 뒤로 드라실을 얻을 기회가 없었다는 그림 리퍼만 봐도 그렇잖아요. ]
[ 흠, 여기까지 온 이상 먼저 주도권을 쥔 놈들한테 어느 정도 숙이고 들어가긴 해야 한다는 거네. ]
내 말에 호구별성은 영 못마땅한지 불퉁하게 투덜거렸다.
[ 거대 신화전을 벌이는 세력과 정식으로 동맹을 맺는다면 앞서 지불해야 했던 114만 카르마 포인트를 상회하는 보상을 얻어낼 수도 있어요. 그쪽에 집중하기로 해요, 누나. ]
나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타이르고는 다시 팝업창을 마주했다.
“좋아요. 초대에 응하겠어요.”
[ (!) 세계수의 여덟 번째 뿌리가 당신을 늑대의 시대로 이끕니다. ]
기다렸다는 듯 팝업창이 떠올랐다.
그 내용을 확인한 직후 던전에 진입할 때처럼 공간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음? 여기는 뭐야?”
함께 이동된 그림 리퍼가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갈 데 없는 다리 위인가. 꽤나 안정적인 시작이구나.”
사라도 얼굴을 굳히며 한마디 했다.
우리는 절벽과 절벽을 잇는 거대한 다리 한가운데에 있었다.
양쪽 절벽에는 각각 커다란 성이 자리 잡았으며, 저 아래로는 너무 깊어 숫제 검게 보이는 바닷물이 거칠게 물결쳤다.
성벽 주변과 다리에는 짙은 핏자국과 더불어 부서진 무기의 잔해들이 널려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끔찍한 살육의 흔적이었다.
“야, 잠깐만. 이거 좀 불길한데?”
호구별성이 딱 보면 알겠다는 듯 다리의 양 끝에 연결된 성을 번갈아 가리켰다.
“이거 완전 양쪽에서 적들이 우르르 튀어나오는 그거 아니냐고!”
그녀의 말에 맞장구라도 치는 양 팝업창이 떴다.
[ (!) 다인슬라이프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
다인슬라이프.
피를 보기 전에는 갈무리할 수 없다는 북유럽의 마검이었다.
불길한 이름에 긴장을 높이는 순간.
아아아.
아아아아아.
아아아아.
바람에 섞인 귀곡성과 함께 두 성에서 각각 무장한 병사들이 달려 나왔다.
퀭한 눈, 녹슨 검과 피에 젖은 철퇴를 든 모습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닌 전장을 떠도는 망령 그 자체였다.
심지어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넓은 다리를 금세 빼곡히 메울 정도였다.
“저것 봐! 내가 저럴 줄 알았다니까!”
호구별성이 질색하며 독기를 뿜는 것과 동시에,
화르르륵!
불의 벽이 우리를 보호하듯 감쌌다.
“무턱대고 전투를 벌이기엔 수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염라.”
달려드는 병사들을 막아낸 단군이 나를 돌아보았다.
시험의 정확한 조건을 읽기 시작한 그의 주위에서 문자열이 떠다니고 있었다.
“마검이 전개한 인과를 일부 파악했습니다. 우선 광역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단군의 불의 벽이 일순 크게 흔들렸다.
병사들의 기세가 생각 이상으로 상당한 모양이었다.
“알았어! 죽음의 무도 쓰라는 거지?”
단군의 말에 호구별성이 곧장 그림 리퍼를 돌아보았다.
“들었지? 빨리 끝내자!”
“음?”
한데 그녀가 그림 리퍼에게 손을 뻗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제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으신지요, Honey?”
그 말에 그제야 깨달은 일행들이 그림 리퍼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처음 죽음의 무도를 가르쳐준 상대는 다름 아닌 호구별성이었다.
종말을 맞이함으로써 우리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린 그가 강림 형의 차림새를 어렴풋이 기억했던 것처럼, 호구별성과의 춤 역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쎄, 바라는 것이라.”
호구별성이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림 리퍼의 손을 잡아끌었다.
“Oh, 무엇을 바라시든 기꺼이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손에 이끌린 그림 리퍼가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로 눈을 휘며 웃었다.
“혹시 춤은 좀 춰?”
그와 손을 맞잡은 호구별성이 그에게 몸을 밀착하며 물었다.
“난 춤을 잘 추는 남자가 좋거든.”
그림 리퍼는 천천히 리듬을 타며 호구별성의 귓가에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천 년 넘게 춤을 춰 왔던 이유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군요.”
나지막한 그의 속삭임에 지켜보던 강림 형이 조용히 치를 떨었다.
“언제 봐도 새롭게 가관이군.”
본인이 그 가관을 벌였던 것은 기억나지 않느냐고 놀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 들었지만, 절망이 드리운 얼굴로 발설이를 그리워하던 형이 떠올라서 얌전히 마음을 다스렸다.
시공간을 넘어 역신과 사신의 춤사위가 다시금 펼쳐졌다.
불의 벽이 걷혔다.
우리에게 달려들던 병사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 ‘죽음의 무도’ ]
- 분류 : 풍문(E)
- 내용 : 역병이 죽음과 손을 맞잡았으니, 그것이 죽음의 무도였다.
- 효과 : (!) 해당 풍문은 융합 풍문입니다. 역신과 사신의 조화로 일대에 죽음을 내립니다.
팝업창과 동시에 악마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림 리퍼가 검은 신성을 흩뿌렸다.
“이거 굉장히 힘이 넘치는데?”
“중세 유럽에는 죽음의 무도라는 게 있었지.”
연기처럼 퍼지는 역병의 형태로 돌아간 호구별성이 언젠가 그림 리퍼에게 들었던 말을 되돌려주며 그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자, 네 낫을 세상 무엇보다 날카롭게 만들어줄 테니 어디 한번 휘둘러 봐.”
그녀의 말에 그림 리퍼가 기껍게 속삭였다.
“명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Darling.”
촤아아아아악!
그림 리퍼의 대낫이 커다란 호선을 그리면서 우리에게 달려들던 병사들을 베어냈다.
우리가 가진 풍문 중 가장 강력한 광역기에 모든 적이 한 번에 쓰러지며 자연스레 긴장이 풀리는 찰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