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장. 종말의 전조(3)
북유럽에서 만난 과거의 그림 리퍼.
강림 형과 반갑게 악수를 나눈 그가 빨간 파라솔이 달린 선글라스를 머리띠처럼 넘기며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쪽은 다 조선의 사신들인가?”
우리를 스치듯 눈에 담던 그가 문득 눈을 반달처럼 휘며 누군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 레이디는 누구시지?”
그래, 그 레이디란 호구별성이었다.
“아까부터 몹시 감미로운 페스트가 느껴지는데, 그대의 것이 맞으신지요?”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인 그림 리퍼가 호구별성에게 다가가서 하얀 손을 맞잡았다.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는 장면에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림 리퍼의 취향은 한결같았다.
“하여튼 재미있는 녀석이라니까.”
손이 잡힌 호구별성이 뿌리치지 않고 낄낄 웃었다.
“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아름다운 미소에 공헌할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그림 리퍼가 눈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로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끔찍한 걸 본 양 인상을 찌푸린 강림 형이 짓씹듯 한마디 했다.
“강림 형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림 리퍼.”
나는 그림 리퍼와 호구별성이 인사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다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두 번째 염라대왕 이제연이라고 합니다.”
“염라?”
내 말에 그림 리퍼가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오, 그럼 이쪽이 My friend 강림이 모신다던 조선의 사신 왕인가?”
이어지는 반응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내가 젊다 못해 어려 보인다며 놀랐고, 대왕님께 예의를 지키라는 강림 형의 일침에 장난스럽게 ‘폐하’라고 부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내가 아는 그림 리퍼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이어서 사라와 단군, 바리까지 소개를 끝낸 뒤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림 리퍼, 왜 이 거리에 아무도 없는 건지 혹시 말해줄 수 있을까요?”
텅 빈 거리.
사건 사고의 흔적 따윈 보이지 않는, 사람만이 사라진 거리.
“으음, 그게……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림 리퍼는 심각한 낯으로 대답했다.
“사실 난 줄곧 서유럽에 머물렀거든. 북유럽으로 놀러 온 건 최근인데 이미 이런 상황이더라고.”
그가 팔짱을 낀 채 안타깝다는 태도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선글라스에 달린 파라솔 모형이 살살 흔들렸다.
“아…… 관광객이었어? 어쩐지 뭔 요상한 걸 꼈다 했네.”
호구별성이 파라솔 모형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파라솔에 선글라스라니, 북유럽의 날씨랑은 조금 거리가 멀지 않나요?”
의아함을 느낀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북유럽이란 게 아무래도 일조량이 적고 척박한 동네라는 이미지인지라, 내심 그의 선글라스가 궁금하던 차였다.
“뭐, 일단 놀러 온 거잖아? 기분 내고 싶었어!”
그림 리퍼는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었던 건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사실 없던 눈이 생기니까 촛불만 봐도 눈부셔서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그가 살짝 짓궂게 웃었다.
본래 뼈밖에 없는 해골 모습이니, 가짜 몸으로 인해 인간처럼 변하게 된 것을 두고 농담을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진짜로 눈이 부실 가능성도 있나?
그럼 가짜 몸을 쓰기 전까진 정말로 눈이 없는 상태였다는 건데.
눈이 없으면 그동안 어떻게 앞을 본 거지?
한 번 떠올린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나, 일단 얌전히 입을 다물고 그림 리퍼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갑자기 불어닥친 한기에 모든 것이 얼어붙었어.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그것뿐이야.”
“지금 이 거리에 덮인 눈과는 다른 얘기인가요?”
“이 정도는 뭐, 그냥 평범한 겨울의 정취지.”
그림 리퍼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풀었다.
“음, 말로 하는 것보단 직접 보여주는 편이 좋겠네.”
“보여준다고요?”
“응, 내가 서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니까.”
설명을 잇던 그가 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얼어붙은 혼들이 전부 변질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되돌려 보내려고.”
얼어붙은 혼, 그리고 변질.
뜻 모를 말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림 리퍼를 따라 도착한 곳은 어느 작은 공원이었다.
나무며 보도블록, 벤치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 꽝꽝 얼어붙은 기묘한 풍경은 앞서 그가 말한 대로였다.
“과연, 이 지경이 되었다면 범상한 겨울로는 볼 수 없겠구나.”
사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그래, 도시를 지나다니다 보면 간혹 이렇게 꽁꽁 얼어붙은 지점이 있단 말이지.”
그림 리퍼가 공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깊이 들어가면…….”
그림 리퍼를 따라가던 나는 그의 등 너머로 보이는 것을 인식한 순간 멈춰 섰다.
“우주퇴적물…….”
한기에 집어 삼켜진 공원.
그 한가운데에 검은 덩어리가 불길함을 풍기며 둥둥 떠 있었다.
주위로는 하얗게 결빙된 조각들이 허공에 흩뿌려진 채였는데, 나는 그것이 우주퇴적물에 섞여 들기 직전의 영혼 조각임을 알아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몰라. 그렇지만 이 불쌍한 친구들을 가야 할 곳으로 보내주고 싶었거든.”
걸음을 멈춘 그림 리퍼가 얼음 조각들을 향해 손을 뻗고는 다른 손바닥에 쓸어 담았다.
나는 그의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보내준다고요?”
“사후세계 권능을 살짝 비틀어 봤더니 어느 정도 뭉쳐지더라고.”
그가 대답과 함께 얼음 조각을 거둔 손에 죽음의 신성을 발했다.
파앙!
얼음 조각들이 검은 신성 한가운데서 희게 빛났다.
한데 모이기 시작한 빛 뭉치는 금세 한 마리의 나비가 되었는데, 그림 리퍼의 신성이 사그라지는 것과 동시에 날개를 팔랑이며 어딘가로 날아갔다.
“이렇게 말이야.”
흰 나비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그림 리퍼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손바닥을 매만졌다.
“조금만 힘을 쓰면 보내줄 수 있어. 그냥 방치하면 저렇게 흉물이 되어버리지만.”
우주퇴적물로 완전히 변하기 전에 혼을 성불시키면 사후세계로 보내줄 수 있구나.
이곳은 북유럽이니까 아마 헬이 다스리는 저승으로 가는 걸까?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을 곱씹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원에는 그림 리퍼가 성불시킨 혼을 제외해도 상당수의 얼음 조각들이 덧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내 마력이 많지 않아서 얼마 보내주지도 못했는데 금방 힘이 다 떨어지지 뭐야.”
그림 리퍼가 넓게 퍼져 있는 얼음 조각들을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언제나 유쾌하기만 하던 신의 눈에서 깊은 통한이 묻어나왔다.
그가 무슨 마음인지 알기에 나 또한 얼음 조각들을 하나씩 눈에 담을 때였다.
불현듯 살을 에는 듯 끔찍한 한기가 불어닥쳤다.
“……!”
생생한 칼바람에 눈을 크게 떴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나와 달리 아무렇지 않은 일행들의 모습에 이것이 업경의 권능으로 밀려드는 환상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혹한의 근원은 산산이 조각나고 얼붙은 혼들이었다.
“아…….”
나는 나도 모르게 양팔을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이게 핌불베트르구나…….”
라그나로크가 시작되기 전에 찾아온다는 겨울.
그것이 이곳을 휩쓸어 사람들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인간은 사후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혼은 각자의 우주에 따라 순환하고,
백은 흙으로, 우주로 돌아가는 것이 이치.
한데 그들의 얼어붙은 육신, 백(魄)은 혹한에 담긴 어떠한 조홧속에 우주퇴적물이 되어 무너져 내렸으며,
혼(魂)마저도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한 채 흩어져 있다가 결국 육신이 녹아내리며 생성된 우주퇴적물과 뒤섞였을 터였다.
“그렇다 해도 여기는 내 관할이 아니니까 슬슬 서유럽으로 돌아가긴 해야겠지만.”
얼어붙은 혼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그림 리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
“……서유럽으로 돌아가신다고요.”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 그는 과거의 그림 리퍼.
이 그림 리퍼가 북유럽에서 종말을 맞이하고, 한반도에서 깨어나, 우리를 다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이제 곧 벌어지게 될 미래의 일이다.
한데 종말을 맞이하지 않은 그림 리퍼를 마주하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대로 북유럽과 함께 예정된 종말을 맞도록 내버려 두어야 할까?
“그럼 서둘러 서유럽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곧 종말 신화가 실현될 거예요. 휘말리기 전에 북유럽을 나갈 수 있다면 어서 피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림 리퍼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종말 신화가 실현된다고?”
“네, 머지않았어요.”
그 탓에 당신도 소멸하게 될 거고요.
그 말까지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그의 답을 기다렸다.
“흐음, 그러면 저 친구들은 어떻게 되는데?”
“네?”
“저 친구들, 덩어리가 된 친구들이랑 얼어붙은 친구들.”
하나 그림 리퍼가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은 스스로의 안위가 아니었다.
작게 탄식하며 그들을 둘러봤다.
나는 그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이 땅이 종말을 맞이할 때 우주퇴적물들은, 하나로 얽혀버린 그들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나 역시 들은 바가 없었다.
“흐음, 킹도 잘 모르는구나?”
그림 리퍼가 턱을 매만졌다.
“그러면 나는 그냥 여기 있을래.”
그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허리에 손을 올리며 가슴을 폈다.
“안 그래도 눈에 밟혔는데, 역시 하는 데까지는 해 보는 게 좋겠어.”
“……!”
그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손을 그러쥐었다.
“가엽잖아.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고 이렇게 슬픈 모습으로 고여버린 것이. 내가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어.”
그림 리퍼가 북유럽에 남기로 결심한 이유는, 그가 떠나기를 바랐던 나 때문이었다.
떠나려던 그를 내가 오히려 붙잡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림 리퍼, 이대로 종말 신화가 이루어지면 당신도 위험해질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어떻게든 다시 한번 그를 만류했지만,
“글쎄.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죽음으로 살아 왔는데, 죽음을 두려워하면 좀 우습지 않겠어?”
그는 기어이 그리 선언하고 말았다.
“…….”
모두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충동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으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한 이는 그림 리퍼뿐이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주먹을 쥔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너무 걱정하지 마, 킹.”
스스로를 탓하는 내게 그림 리퍼가 익숙한 웃음을 지었다.
“무릇 죽음이란 평생의 시간이 맺은 알곡을 낫으로 베어 추수하는 것과 같지.”
이미 한 번 들었던 말을 거듭 건네며 그는 장난스럽게 내 머리를 헝클었다.
“저 가엾은 친구들이 맺은 알곡이 눈앞에 있잖아. 나는 알곡을 모아서 그들을 보듬어줄 신의 곁으로 보내야 해. 그게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할 나의 추수니까.”
조금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척 새삼스럽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 금발의 미남자에게서 정말로 내가 아는 그림 리퍼를 보았다.
그림 리퍼가 이곳에서 종말을 맞이한다 한들 한반도로 돌아가면 언제나처럼 유쾌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의 그를 꽤 많이 그리워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언젠가 재회할 것이라 위안하지만, 예정된 이별 앞에서 기원하고 바라게 될 수밖에 없는 저승의 신화처럼.
51장. 종말의 전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