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장. 종말의 전조(2)
[ (!) 이동하실 지역을 선택해 주십시오. ]
팝업창의 내용을 확인하며 나무 형태를 띤 지하철 노선도를 훑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이곳이네요. 바나헤임.”
바나헤임.
북유럽 신화의 실질적 주인공들인 에시르 신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바니르 신족의 땅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국에서 온 우리가 바니르 신족의 땅에 떨어진 것은 우연이라기엔 다소 공교로운 일이었다.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헬이 있는 곳은 여기 니플헤임이고요.”
노선도의 뿌리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 (!) 해당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니플헤임행 티켓이 필요합니다. ]
그런데 니플헤임을 손끝으로 짚자 또 다른 팝업창이 떴다.
“뭐야, 따로 표가 있어야 해?”
인상을 찌푸린 호구별성이 투덜거렸다.
“저쪽에 매표소가 있어요.”
주변을 살피던 바리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한 층 위 유리창 너머로 작은 매표소가 보였다.
역무원 제복을 입은 청설모가 티켓을 팔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위그드라실의 뿌리와 가지를 분주하게 오간다는 청설모 라타토스크인 것 같았다.
“음, 이게 요금표인가?”
계단을 타고 올라간 우리는 라타토스크의 안내에 따라 요금표를 살폈다.
[ 아스가르드 : 1,000 드라실 ]
[ 알브헤임 : 1,000 드라실 ]
[ 바나헤임 : 현 위치 ]
나무의 가지 영역에 있는 세계는 1천 드라실.
[ 미드가르드 : 190,000 카르마 포인트 ]
[ 요툰헤임 : 500 드라실 ]
[ 스바르트알파헤임 : 500 드라실 ]
나무의 줄기 영역에 있는 세계는 5백 드라실이었고, 액수가 조금 애매하지만 유일하게 카르마 포인트로 값을 치러야 이동 가능한 세계도 존재했다.
[ 무스펠헤임 : 1,000 드라실 ]
[ 니플헤임 : 1,000 드라실 ]
마지막으로 나무의 뿌리 영역에 있는 세계는 가지 위 세계와 같이 1천 드라실이었다.
“이건 뭐야? 드라실은 처음 보는 단위인데?”
팔짱을 낀 호구별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북유럽은 이미 최종 단계에 돌입했군요.”
요금표를 살피던 단군이 둥둥 떠다니는 문자열 사이에서 말했다.
“현재 한반도에선 흑탑을 제외한 아홉 개의 세력이 대치 중입니다만, 북유럽에 남은 세력은 단 둘뿐입니다. 이긴 쪽이 북유럽의 패자가 되겠지요.”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거대 신화전이라고 보면 됩니다. 북유럽의 전설로 새로운 법칙을 만들어 상대 세력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싸움이거든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으나 직접 겪어 보지 않아서인지 아직 제대로 실감하기 어려웠다.
“이 지하철 노선은 위그드라실의 전설을 가진 세력이 새로운 법칙을 만들어 구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화전은 필드의 설계자가 가지고 있는 풍문을 바탕으로 새로운 법칙을 만든다.
북유럽 전체가 신화전의 필드가 되었으니, 누군가 위그드라실의 전설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선 지하철을 이용해야 한다’는 법칙을 만들어 낸 것이다.
“드라실이란 새로운 위그드라실의 법칙을 구현한 자가 통용한 화폐겠죠.”
즉, 드라실 또한 거대 신화전의 새로운 법칙이라는 뜻.
거대 신화전에 전개된 법칙에 따라 활동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겠지.
“그럼 당장의 선택지는 미드가르드뿐이네요. 다른 세계로 가려면 그곳에서 드라실을 얻어야 해요.”
미드가르드는 인간들이 사는 세계다.
그곳에서 자격을 얻어야만 신이나 요정이 사는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법칙은 꽤 그럴듯했다.
“맞습니다. 그와 관련해 조금 흥미로운 부분도 있고요.”
단군이 요금표를 가리켰다.
“19만 카르마 포인트는 다소 애매한 액수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염라.”
바로 언급하진 않았으나 나 역시 위화감을 느낀 부분이었다.
무슨 할인 서비스도 아니고, 20만에서 1만이 깎인 어중간한 숫자였으니까.
“19만 포인트에 이 자리에 모인 여섯 명을 곱하면, 총 114만 포인트가 됩니다.”
“아…….”
다만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지점을 그가 짚어주면서 한발 늦게 ‘19만’의 의미를 이해했다.
“제가 가진 115만 포인트에 근접하게 떨어지는군요.”
“애초에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운용되었다면 우리는 북유럽의 최종 결전에 참여하지 못했을 겁니다.”
단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설명했다.
“북유럽의 패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줄 테니, 본래 속해 있던 지역에서 얻은 카르마 포인트는 모두 내놓고 오라는 의미지요.”
납득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세 번째 천벌을 통해 얻은 카르마 포인트가 사라진다는 건 살짝 부담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카르마 포인트를 지불하는 것이 반드시 손해로 연결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단군이 눈을 휘었다.
“현재 카르마 포인트의 용도는 크게 두 가지죠. 하나는 풍문의 성장, 다른 하나는 신화전의 자원.”
“이 전쟁이 신화전과 같다면. 승리를 통해 소모한 카르마 포인트를 도로 되찾겠다는 뜻인가요?”
보통의 신화전은 승리한 쪽이 신화전을 전개한 카르마 포인트를 전부 독식하는 시스템이니까.
그런 뜻에서 손해가 아니라는 걸까 짐작했으나 턱을 매만졌다.
“음, 그쪽은 또 다른 계산이 필요합니다.”
“다른 계산이라면?”
“최종 결전을 치르고 있는 두 세력 중 어느 하나와 동맹을 맺는 것이 아닌, 새로운 세력으로 참전해 승리하는 것은 쉽지 않으니까요.”
맞는 말이었기에 나도 앞서 떠올린 가능성을 치워버렸다.
북유럽을 양분한 두 세력 중 하나와 동맹을 맺고 신화전에서 승리한 뒤, 승리에 대한 지분을 따져서 카르마 포인트를 배분받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한 건, 이곳에서는 새로운 풍문을 얻는 것이 한반도보다 월등히 수월하리란 점입니다.”
“……!”
생각지도 못한 관점에 눈을 크게 떴다.
각성자든 신이든, 육체가 가지는 스탯의 최대치는 예외 없이 100에 고정된다.
스탯을 최대로 찍은 후에는 가지고 있는 풍문으로 능력치를 증폭시켜야 한다.
그렇지만 던전을 여럿 돌더라도 풍문이 만들어지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 우리는 아직까지도 별다른 풍문이 없는 상태였다.
한데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풍문을 보다 쉽게 얻을 기회라고?
“현재 북유럽은 신화를 완전히 새로 쓰고 있습니다. 즉, 진행 중인 신화에 참가해 활약하면 그대로 업적이 되는 셈이지요.”
“이야, 그러니까 대충 피버 타임이라는 거지?”
바로 알아들은 호구별성이 씩 웃었다.
“흐응, 안 그래도 마력과 스킬이 부족해 계속 아쉬웠던 참이다. 이참에 보충할 수 있다면 좋겠구나.”
사라가 나쁘지 않다는 투로 말을 보탰고, 옆에 선 강림 형은 말없이 푸른 안광을 빛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좋아요. 그러면 혹한과 폭염의 신화만이 아니라, 이 기회에 모두 새로운 풍문을 얻는 걸 목표로 하죠.”
나는 상황을 정리한 다음 다시 단군을 보았다.
“그런데 단군, 당신이 여기까지 온 건 위그드라실의 신화 때문이잖아요.”
“네, 그렇습니다만.”
“이렇게 지하철 노선으로 구현해 놓았다는 건 누군가 이미 손에 넣었다는 뜻인데, 괜찮은 거예요?”
그것도 북유럽의 패자를 두고 싸우는 거대 세력 중 하나가 쥐고 있는 상황이다.
과연 단군은 목표한 대로 신화를 얻을 수 있는 걸까?
한데 내 걱정스러운 질문에도 그는 그저 수려한 미소를 띨 뿐이었다.
“세계수의 신화를 가진 자가 누구인지,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 싸움을 치르고 있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요.”
그리 말하는 것치고는 별다른 초조나 불안이 느껴지지 않았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구태여 내가 걱정할 이유는 없어서 더 말을 잇지 않고 수긍했다.
***
우리는 19만 카르마 포인트씩 여섯 명, 총 114만 포인트를 지불하고 미드가르드행 열차에 탔다.
매표소와 똑같이 청설모 라타토스크가 모는 열차였다.
“금방 도착했네.”
가장 먼저 내린 호구별성이 미드가르드 역을 둘러봤다.
열차를 타고 내리기까지는 고작 몇 분.
세계와 세계를 넘나드는 일이건만, 실제 지하철로 역 한 개를 이동하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생긴 것도 평범하고.”
역사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휑하다는 것만 빼면, 평범한 지하철역이었다.
“우리 외에 이동하는 인원이 없다는 건 조금 의외네요.”
무려 최종 결전이 아닌가.
두 세력에 속한 각성자들이 분주하게 다른 세계를 오갈 것이라 짐작했는데, 왜 다른 이용객은커녕 별다른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걸까.
“일단 나가서 생각하자.”
호구별성이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가서 그 드라실인지 뭔지 하는 돈을 버는 방법도 알아봐야지.”
앞장선 그녀를 따라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완연한 겨울이로군.”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리는 사라에게서 새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잘 정돈된 도로와 멀찍이 보이는 성,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한 지붕들.
겨울이라는 말처럼 보기 좋게 각진 건물에는 희게 눈이 덮여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아름다운 도시였다.
한데 둘러볼수록 앞서 느낀 위화감이 강해졌다.
“아무도 없습니다, 대왕님.”
날카로운 시선으로 거리를 살핀 강림 형이 말했다.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산 자의 기척 자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니, 역은 그렇다 치고 거리에도 아무도 없어?”
호구별성이 의아해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이건 꼭 유령 도시 같은데…….”
텅 빈 거리를 살피며 미간을 좁혔다.
상품이 보기 좋게 진열된 쇼윈도들.
식당이나 카페의 유리창 너머는 고즈넉한 분위기와 함께 언제든 손님을 받을 수 있도록 말끔히 준비된 테이블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쇼윈도를 구경하거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마치 평범한 일상이 펼쳐지던 도시에서 돌연 사람만 사라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드라실이 없는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이유가 뭐지?
다소 막막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또 다른 단서를 찾아 곳곳을 좀 더 신중히 살필 때였다.
“으음? 이게 무슨 일이지?”
불현듯 뒤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웬일로 사람들이 많나 했더니 다들 여기 사람들이 아닌 것 같은데?”
뒤를 돌았다.
검은색 로브를 걸친 금발의 미남자가 빨간색 파라솔로 장식된 선글라스를 치켜올리고 있었다.
“어…… 그림 리퍼?”
곧바로 남자를 알아본 나는 무심결에 이름을 불렀다.
그 즉시 그의 바다색 눈이 동그래졌다.
“으응? Boy, 내가 누군지 아는 거야?”
놀라움이 가득 담긴 어조,
그에 뒤늦게 눈앞의 존재는 아직 우리를 만난 적이 없음을 실감했다.
“Oh, My God! 이게 누구야!”
크게 뜬 눈을 두어 번 끔뻑이던 그림 리퍼가 갑자기 활짝 웃으며 반갑게 두 팔을 벌렸다.
“내 친구 강림 아니야?! 그새 스타일이 달라져서 못 알아봤잖아!”
“오랜만이군, 그림 리퍼.”
그림 리퍼가 넓은 보폭으로 성큼 다가왔다.
형은 말을 아끼며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한 2백 년쯤 됐나? 그래, 조선의 사신이 유럽에는 무슨 일이지?”
그림 리퍼가 맞잡은 손을 쾌활하게 흔들었다.
이미 관계를 맺었음에도 무엇 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이와의 재회.
강림 형을 보며 환히 웃는 그림 리퍼를 마주하며,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지만 애써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그와 마주친 것을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우리와 함께한 기억은 없어도 여전히 유쾌하고 친절한 그는 북유럽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알려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