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장. 종말의 전조(1)
“설령 제가 세 번째 방법을 썼다 한들.”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히 미소 지은 그가 입을 열었다.
“업을 치르는 것은 그것을 우주에게 청했던 저입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
당장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네,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되겠죠.”
지켜보던 바리가 다시 끼어들었다.
항상 초연하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하지만 만물은 결국 이어져 있어요.”
단군이 모든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그걸 짚은 말에 차사들이 한층 날이 선 눈으로 단군을 주시했다.
나는 강림 형이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들 것처럼 신성을 끌어 올린 것에 미약한 피로감을 느끼며 단군에게 재차 물었다.
“당신은 세 번째 방법을 쓰지 않았다는 건가요?”
일부러 도발하듯이 말하는 것치고는 ‘세 번째 방법을 썼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그가 긍정하지 않았으므로.
“네, 제가 청한 것이 아닙니다.”
단군은 비로소 대답했다.
“헬이 먼저 당신을 원했습니다. 염라.”
나는 조금 허탈하게 웃었다.
단군이 설계한 미래는 아니라지만, 결국 같은 방식이 사용된 것은 맞다는 뜻 아닌가.
나보다 먼저 내가 그리 행동하기를 바랐다.
이로써 내가 야마와 벽하원군 앞에서 헬의 이름을 입에 담은 것이 정말로 내 의지였는지, 아니면 나를 만나려는 헬의 의지였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당신을 원할 수밖에 없었겠죠.”
단군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다른 두 신보다 그녀를 해칠 가능성이 적으니까요.”
다른 의미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꼭 지구의 모든 신화를 하나로 통합한다는 전쟁을 내가 아직도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다른 두 저승왕은 또 다른 죽음의 신화를 손에 넣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음에도, 나는 아직 헬의 신화를 취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다시 단군과 눈을 맞추었다.
“앞으로는 오해하기 전에 제대로 말해주세요, 단군.”
용궁에서부터 함께 움직이고 있지만 다른 차사들은 아직 그에게 경계를 풀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짚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는 빙긋 웃었다.
“곧바로 세 번째 방법을 염두에 두고 물어보실 줄은 몰랐거든요.”
흘끗 바리를 돌아보는 그의 모습은 다소 장난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세 번째 방법은 굉장히 위험한 방법입니다. 그런 만큼 아무나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아무나 쓸 수 없다고요?”
한반도 최고의 도사가 본인에게도 어렵다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는데, 그럼 대체 누가 쓸 수 있다는 거지?
“그 방법은 주술 실력보다는 온전히 청하는 이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단군이 친절한 어투로 설명했다.
“어떤 결과를 초래해도 좋으니 이것만은 이루어달라고 청하는 것인데, 진심으로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이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 정도의 마음을 갖추지 못할 시엔 통하지 않는다는 거군요.”
“그렇죠.”
“그게 가능하다면 굉장히 위험한 사람이겠네요.”
한숨을 쉬며 그의 말을 받았다.
“다른 것은 어떻게 되든 좋으니 자기 욕망만 이루게 해달라니.”
내 말에 단군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만 자기 자신마저 해를 입을 걸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조금 다릅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람.
무슨 결과를 초래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든 원하는 것을 이루겠다는 마음가짐이라.
나는 그런 게 가능한 존재를 그려보았다.
“위험한 사람 맞는 것 같은데요. 정말로 미친 사람만 가능하지 않나.”
“하긴 그렇죠. 당신 말씀이 맞습니다.”
다소 섬뜩함을 느끼며 중얼거리자 단군이 빙긋 웃어 보였다.
“저는 세 번째 방법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당신에게 말하지 않고 함부로 쓰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무고함을 주장하는 사람 좋은 얼굴이었다.
업경의 권능 또한 그의 말이 진심이라고 전해 왔기 때문에 나 역시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일행들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는지라 분위기를 환기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당신이 헬과 제가 만나는 장면을 봤다는 건, 우리가 먼저 헬이 머무는 니플헤임에 잘 도착한다는 뜻이겠네요.”
“음,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그런데 화제를 바꾸기 위해 꺼낸 말에 나를 보는 단군의 눈이 깊어졌다.
“제가 본 것은 당신뿐이었습니다, 염라.”
“나뿐이라니요?”
“현재로선 헬이 당신을 부른 방식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요컨대 다른 분들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건가요?”
심상치 않은 말에 절로 입매가 굳어졌다.
“극단적으로는 다른 이들을 모두 배제하고 당신만을 자신의 궁전으로 데려가는 경우도 가능하겠지요.”
“야, 너 오늘따라 되게 재수 없게 말한다?”
단군이 여상한 태도로 긍정하자 결국 호구별성이 인상을 쓰며 끼어들었다.
“우리 왕한테 세계수 얻게 도와달라고 부탁한 입장 아니었냐? 위기인지 뭔지 간 보듯 애매하게 굴지 말고 핵심만 말해.”
이전과 달리 단군이 본인이 본 미래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몹시 거슬린다는 투였다.
다만 뒤에 선 강림 형이 아직도 신성을 가라앉히지 않은 상태였기에, 진심으로 그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형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나섰을 가능성이 컸다.
……형이 나선다면 아마 말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신뢰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호구별성의 지적에 단군이 멋쩍게 사과했다.
“헬과 염라가 만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만, 그 외에는 보이지 않아서 말씀드릴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 미래를 설계한 헬이 원치 않았을지도 모르죠.”
설명하던 그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은 이 가문비나무 숲을 나가 봐야, 이 땅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다.”
말을 마친 단군은 정말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말했다는 듯 평소다운 단정한 얼굴이 되어 나를 응시했다.
그와 마주하며 나는 문득 이전에 그와 나눈 대화를 상기했다.
-단군, 바다 무덤 던전에서 당신은 던전의 오류에 대해 모른다고 말했죠.
유해교반을 끝내고 용궁으로 돌아온 직후의 대화였다.
-우리가 유해교반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결국 당신의 제안대로 바다 무덤 던전에 들른 덕분이었어요.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때도 그는 똑같은 미소로 대답했다.
-당시에는 정말로 몰랐습니다, 염라. 이후 인드라가 나타났을 때 바즈라를 내리꽂는 당신이 보였을 뿐이지요.
-제가 바즈라로 아수라를 쓰러트리는 것을 본 건가요?
-아뇨, 아수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당신만 보였어요.
그러고는 덧붙였다.
-저는 당신이 바다의 신화를 얻길 바랐으니까.
단군은 도사가 미래를 보는 첫 번째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도사는 우주가 이미 선택한 미래를 무작위로 보지만, 사실 그렇게 본 미래는 틀릴 때가 많다고.
그것은 보는 이가 무의식적으로 바라는 미래를 보기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우주가 선택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미래 중에서, 보는 이가 가장 바라는 미래를 보게 된다고.
-당신이 바즈라를 얻는 것을 본 것도, 칼파브릭샤의 묘목을 얻는 것을 본 것도 같은 이유일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거듭 부드러이 웃었다.
-북유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당신이 팔열지옥과 팔한지옥의 신화를 복원할 혹한과 폭염의 신화를 얻길 바랍니다. 그러니 제가 보는 것들을 거짓 없이 고할 생각입니다.
거기까지 곱씹었을 때.
단군이 바리의 물음에 굳이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은, 어쩌면 그 또한 나를 시험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분명 내게 거짓을 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가 과연 그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알고 싶어서.
***
가문비나무 숲을 빠져나가기 위해 한참을 걸었다.
“한기가 점점 짙어지는구나.”
사라는 어느새 하얗게 서리가 내린 나무들을 가리켰다.
“그새 겨울과 다름없어졌어.”
“그러게, 용왕비가 준 패물 미리 끼기를 잘했네.”
호구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핌불베트르는 이미 시작된 모양이군요.”
단군이 주변을 살폈다.
인과를 읽고 있는지 그의 곁을 떠도는 문자열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종말을 예고하는 혹한이 점차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처음 떨어졌던 숲속 안쪽까지 얼어붙겠지요.”
라그나로크의 전조라는 핌불베트르.
그것이 벌써 시작되었다는 건 종말이 머지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림 리퍼는 종말을 피하지 못하고 한 번 죽었다가 깨어났다.
우리도 빨리 목적했던 신화를 얻어 떠나지 못한다면 종말에 휘말릴 위험이 있었다.
“대왕님.”
그때 강림 형이 내 앞을 가리며 멈춰 섰다.
“곳곳에 소용돌이가 있습니다.”
그 말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진짜네! 저 곰팡이들!”
호구별성이 검지를 뻗으며 독기를 뿜었다.
그녀가 가리긴 방향에는 검은 소용돌이들이 여럿 흩어져 있었는데, 겉보기로는 한반도의 바다에서 보았던 것들과 다를 바 없었다.
“저것들이 가득한 것을 보니 이 땅도 온전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사라가 소용돌이를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바다에 퍼진 소용돌이들은 나가로 변한 남해의 용신들이 막대한 양의 우주퇴적물로 변하며 생성된 것이었으니, 북유럽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은 나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바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 또한 단군과 마찬가지로 빛나는 문자열에 둘러싸여 있었다.
“저 앞에서 인과의 흐름이 바뀌어요. 숲을 빠져나가려 하면 그 길로 다른 공간에 진입하게끔 연결된 것 같아요.”
“다른 공간으로 간다고?”
호구별성이 조금 짜증이 섞인 투로 되물었다.
“안 그래도 소용돌이에 닿으면 이상한 곳으로 가잖아. 영 찝찝하네.”
그녀에게 공감하면서도 별다른 수가 없어 계속해서 발걸음을 재촉하는 와중.
“……!”
예고 같은 건 없었다.
어느 순간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가문비나무로 가득하던 숲속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눈앞에 전혀 예상치 못한 공간이 펼쳐졌다.
“어? 뭐야. 이렇게 갑자기 바뀐다고?”
호구별성이 눈을 크게 뜨며 주변을 살폈다.
“지하철역이잖아?”
그래,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역의 승강장이었다.
북유럽인 만큼 한반도에서 봐 왔던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골조가 같아 단번에 알아보았다.
[ (!) 위그드라실에 진입하셨습니다. ]
갑작스러운 공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이 돌연 팝업창이 떴다.
“위그드라실? 여기가?”
가문비나무 숲과 지하철역.
지하철역과 위그드라실.
영 맞물리지 않는 조합에 거듭 어리둥절해질 때였다.
[ (!) 이동하실 지역을 선택해 주십시오. ]
재차 팝업창과 함께 커다란 지하철 노선도가 떴다.
위그드라실이라는 말처럼 나무 형태로 그려진 지하철 노선도에는 각각 아스가르드, 미드가르드, 니플헤임, 무스펠헤임 등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아홉 개의 땅이 지정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가지 끝에 아홉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위그드라실이 지하철로 변한 거야?”
겨우 상황을 이해하자마자 우리를 재촉하듯 팝업창이 반짝였다.
[ (!) 이동하실 지역을 선택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