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77화 (177/187)

50장. 제안(2)

두 이국 신의 동맹 제안.

껄끄러움을 느끼며 팝업창을 닫았다.

애초에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능청스럽게 내민 손이었다.

안 그래도 쉽게 받을 수 없는 제안인데, 시스템에 의해 없던 연결고리까지 만들어졌다면 더욱 받을 이유가 없다.

다만 문제는 이대로 동맹을 거절할 경우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것.

말이야 나머지 하나가 싫어서 손을 내민다지만, 금세 아무렇지 않게 서로 손을 잡고 내게 덤벼도 이상하지 않다.

한쪽과 손을 잡더라도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어떻게 뒤통수를 맞을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지금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두 세력이 한자리에 모인 이 상황을 빠르게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

“……꼭 우리끼리 치고박을 필요는 없겠죠.”

결론이 났으니 지체 없이 입을 열었다.

“이 땅에 머무는 죽음이 우리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둘이 손을 잡고 남은 하나를 치자는 작금의 고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화두를 제시했다.

【뭐야, 그 반만 뒤진 애부터 잡자고?】

먼저 반응한 것은 야마였다.

【여기 군침 도는 죽음이 셋이나 있는데 딴 놈은 또 왜 찾아?】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팔짱을 꼈다.

“흐음, 굳이?”

벽하원군 또한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변검 가면은 그새 노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화가 났을 때처럼 알기 쉬운 표정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당황스럽거나 황당하다는 감정 같았다.

“그냥 여기서 저 녀석을 잡는 게 더 간단한데.”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 벌거숭이, 신성도 코딱지 수준이니까 그냥 너 다 줄게.”

인심 쓴다는 태도에 나는 되레 얼굴을 굳혔다.

업경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신성은 분명 깊었다.

내가 아는 이들 중에 그녀를 홀로 상대할 수 있겠다 싶은 것은 생불왕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이 자리에는 한반도의 최강자인 단군이 함께였지만, 그는 내게 감추는 것이 많아 정확한 실력을 알지 못하므로 제외했다.

다만 그런 식으로 그녀가 가진 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해도, 딱히 뭐 하나 마음이 놓이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으니까.

내게 야마의 신성을 내어 준다 한들 그 호의를 순순히 받지 못할 정도로.

아니, 애초에 야마든 벽하원군이든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

그들과 말을 섞을수록 그 예감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게 누가 됐건 동맹을 맺을 생각은 없다.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거듭하며 다시 말했다.

“어차피 여기서 서로 동맹을 약속해 봤자 상대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잖아요.”

벽하원군의 변검 가면이 초록색을 띤 웃는 표정으로 바뀌며 가벼운 웃음소리가 났다.

동맹을 맺자던 말은 진심이 아니다, 라는 명제를 아닌 척 긍정한 것이다.

“적어도 누군가 헬의 힘을 손에 넣으면, 나머지 둘이 다른 하나를 견제할 확실한 이유가 되겠죠.”

【크, 듣고 보니 정말 그렇네!】

내 말에 야마가 과장된 몸짓으로 딱 소리 나게 손가락을 부딪쳤다.

【역시 내 아들이야. 아주 똘똘해!】

……근데 저쪽은 나를 언제까지 아들이라고 부를 셈이지?

들을수록 기분이 이상해지는 호칭이었지만, 일단 지금은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흐응, 셋이서 손 잡고 놀아 보자니까, 셋 중 누가 또 다른 하나를 잡느냐는 내기로 바꿔버리네?”

벽하원군이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뭐, 나쁘지 않아. 어차피 라그나로크에 끼어들 생각이었고. 생각지 못한 보너스 게임까지 챙긴 기분인걸.”

야마에 이어 그녀의 반응 또한 긍정적이었다.

헬을 잡기 위해 흩어지면, 각자에게 추가로 계획을 세울 시간이 생기니 그 영향도 있겠지.

【그럼 결론이 났군.】

야마가 먼저 몸을 물렸다.

【들었지, 코쟁이? 첫 번째 목표는 헬이다!】

명랑하게 외친 그가 터벅터벅 가네샤에게 걸어갔다.

이때껏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가네샤는 몹시 피로해 보이는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잊으셨을까 봐 말씀드리지만 지금은 그 헬도 당신 정도는 코딱지로 여길 겁니다.”

【뭐! 걔가 그렇게 강했어?】

“뭐, 그것보다는 당신이 지금 더럽게 약하죠.”

【크으, 그렇구만!】

야마가 낄낄거리며 발을 내디뎠다.

【한데 내가 언제 그런 걸 신경 썼던가?】

그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좋아, 그러면 나도 물러가지.”

야마와 가네샤가 등을 돌리자, 벽하원군도 변검 가면을 흰색을 띤 보통 상태로 되돌렸다.

“또 보자고, 형제!”

유쾌하게 인사를 남긴 그녀는 탁탑천왕과 태산부군에게 손짓하며 뒤를 돌았다.

아들에 이어 형제라니.

야마의 호칭을 따라하는 건가?

상황이 정리되면서 긴장이 풀리자 그제야 황당한 웃음이 샜다.

“저 두 놈은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하네.”

이국의 신들이 마침내 모두 물러갔다.

호구별성은 점처럼 멀어져 가는 벽하원군의 일행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태산부군은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걸 거예요.”

나는 하얗게 눈을 뒤집고 있던 그의 상태를 곱씹으며 대답했다.

“정말로…… 빈껍데기나 다름없었거든요.”

벽하원군이 아버지 태산부군을 잡아먹었다는 야마의 말이 재차 떠올랐지만, 그 이상 깊이 파고들지는 않으면서.

“당장은 이렇게 넘어가게 되었다만.”

사라가 나를 돌아보았다.

“대왕, 너는 진정 이 땅의 저승왕을 잡을 것이냐?”

예상치 못한 삼자대면을 겪었으나, 그는 본래 얘기하던 주제로 다시 모두의 의식을 돌렸다.

뜻대로 북유럽에 왔으니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는 이야기였다.

“…….”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본래 북유럽에 온 것은 세계수의 신화를 얻는 것을 도와달라는 단군이 부탁, 그리고 그 대가로서 팔한지옥과 팔열지옥을 복원할 혹한과 폭염의 신화를 얻기 위함이었다.

북유럽에 온 이상 이 땅의 신들과의 대면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나와 신격이 겹치는 헬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아까는 상황이 상황이라 미끼처럼 꺼내 쓰기는 했다만, 야마와 벽하원군은 곧바로 기꺼운 반응을 보였지.

언제든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일단은, 그 둘이 헬의 힘을 취하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은 듭니다.”

우선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반도에서만 지낼 때는 쉬이 실감하지 못했던, 신화의 통합이라는 의미가 절로 되새겨졌다.

“그래, 어쨌든 이 땅의 저승을 찾기는 해야겠구나.”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두면 둘 중의 하나는 그 힘을 손에 넣을 테지.”

“왜, 반대로 그쪽이 다른 둘의 힘을 빼앗을 수도 있잖아.”

사라의 말에 호구별성이 끼어들었다.

“확실한 건 죽음의 왕이 넷인 지금이 그나마 적들이 제일 약할 때라는 거야.”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었으나 분명 이 자리의 모두가 알아들었을 터였다.

다른 신들이 서로의 힘을 빼앗고 강해지기 전에 먼저 쳐야 한다고.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결국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괜히 뭔가 무거워진 기분에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

아직 심각한 낯을 풀지 않는 차사들에게 농담이라도 건네야 할 시점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저들보다 먼저 헬을 만나야 하는데…… 어떻게 한담.”

가볍게 웃는 얼굴로 나는 바리와 단군을 가리켰다.

“혹시 바리와 단군이 함께 제가 먼저 헬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되려나요?”

단순히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이었다.

한데 단군은 기다렸다는 듯 깊고 검은 눈을 휘어 웃었다.

“이미 했습니다, 염라.”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조금 전 기도를 드리면서 당신과 헬이 독대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내 굳은 표정을 보면서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두 신이 헬의 힘을 취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그녀를 만나시겠군요.”

“…….”

나를 도와줄 때마다 보였던, 친절하고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이제는 다소 익숙한 미소와 마주하면서도 나는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내가 야마와 벽하원군 사이에 끼어 있다가 헬을 먼저 잡자고 제안한 것은 순간적인 임기응변이었다.

그들과 마주치기 전까지만 해도, 아니 그들의 주위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겠다는 마음을 먹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헬과의 만남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사이 먼저 기도를 올렸다는 사실 앞에서, 한동안 거두었던 의심이 되살아났다.

지금 내가 하는 선택이 과연 나의 의지인지, 아니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단군의 의지인지에 대한.

……그래, 용궁에서 다시 만난 이후 너무도 당연하다시피 이어지는 도움에 무심코 늦추고 말았던 그에 대한 경계심을.

“잠깐만요.”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 먼저 반응한 것은 바리였다.

“누가 먼저 헬을 만나는가는 야마와 벽하원군이 함께 얽혀 있는 문제예요.”

언제나 차분했던 얼굴 위로 드물게도 당혹이 서려 있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 정도의 기도를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끝내는 것은 불가능해요.”

의문을 풀어내는 바리의 눈에 서서히 확신이 들어찼다.

“세 번째 방법을 쓰셨군요.”

“세 번째 방법이라니?”

호구별성이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강림 형과 사라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하나, 평소와 다른 바리의 모습을 보건대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만을 짐작하는 태도였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예요?”

바리는 호구별성의 의문에 대답하기 앞서 단군을 추궁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잖아요.”

그럼에도 단군은 변함없이 차분한 얼굴로 바리를 마주할 뿐이었다.

그가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바리는 이내 우리를 돌아보았다.

“도사가 미래를 보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한숨을 쉰 그녀가 설명했다.

“전에는 두 가지만 말씀드렸지만요.”

세 번째 천벌이 예고되었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보통 도사들은 우주가 이미 선택한 미래를 무작위로 보고, 바리나 단군처럼 뛰어난 도사들은 자신들이 직접 우주 역사와 모순되지 않게 설계한 미래를 우주가 선택해주기를 청한다고.

“세 번째 방법은 두 번째 방법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라요.”

바리가 두 손을 모으며 말을 이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고려 없이, 어떤 결과를 초래해도 좋으니 이것만은 선택해달라고 청하는 거예요.”

모아진 손에 초조한 듯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세 번째는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검고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바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너무 위험하니까.”

그제야 바리가 정색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바리의 말에 따르면, 내가 다른 두 신보다 먼저 헬을 독대하는 대가로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모른다는 뜻이니까.

“처음부터 얽혀선 안 되었거늘.”

강림 형의 낮은 목소리가 끓어오르듯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제대로 설명해라.”

검푸른 신성을 끌어 올린 그가 살벌한 눈으로 단군을 돌아보았다.

다른 두 차사 또한 침묵으로 형에게 동조했다.

“……단군, 정말로 세 번째 방법으로 제가 헬을 독대하도록 청했나요?”

나는 형을 만류하지 못한 채 단군과 눈을 맞추었다.

그는 그저 평소와 같이 부드럽게 눈을 휘어 웃었다.

50장. 제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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