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76화 (176/187)

50장. 제안(1)

힌두교의 저승왕, 야마라자.

도교의 저승왕, 태산부군.

그리고 나, 한반도의 염라대왕 이제연.

저승의 왕 셋이 모인 주변으로는 내 차사들과 단군, 바리, 그리고 야마를 따라온 가네샤가 흩어져 있었다.

나는 나와 같은 왕의 천명을 가진 두 신을 마주하며 가느다란 숨을 토해 냈다.

한쪽은 젊은 얼굴에 갈기처럼 붉은 머리칼을 늘어트렸다.

다른 한쪽은 나이 든 얼굴에 거친 백발을 휘날리는 채였다.

인종과 연령대가 달랐음에도 나는 두 신에게서 똑같이 내가 기억하는 우리 대왕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나 대륙의 저승왕 태산부군은 산처럼 거대한 풍채에 몸을 감싼 예복이 더욱더 우리 대왕님을 떠올리게 했다.

다만 그는 양 손목에 죄인을 연상시키는 무거운 추를 매달고 있었으며, 기이하게도 두 눈은 하얗게 뒤집혀 있어 다소 섬뜩한 인상이었다.

【흐음, 잠깐.】

태산부군을 살피던 야마가 턱을 매만졌다.

【가만 보자니 뭔가 이상한데?】

나와 마찬가지로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듯 태산부군을 응시하던 야마가 삐딱하게 양쪽으로 번갈아 가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떡할까, 전하. 같이 싸울까?”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호구별성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같은 천명을 가진 신이 셋이나 있으니 그 사이에 섣불리 끼어들면 안 된다고 느끼면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불안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옆에 선 강림 형은 이미 신성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 상태였다.

업경은 여전히 형을 상대로 기능하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발설지옥의 신성만으로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사라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손가락이 길고 곧은 손은 언제라도 꽃을 피울 수 있게 새하얀 신성을 발하고 있었다.

내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다른 두 왕에게 달려들 태세였다.

“이야, 사라메야만이 아니네. 부하들의 충심이 대단한데?”

내 차사들을 돌아본 야마가 낄낄거렸다.

【새로 즉위한 아드님이라서 그런가? 부하인지 보호자들인지 모르겠군.】

“…….”

형을 모욕하는 것으로는 안 통하니 도발의 방향이 나로 바뀌었다.

구태여 반응하지 않고 마저 두 신을 살폈다.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현재 야마의 신성은 깊지 않다.

힘과는 별개로 그가 야마라자이기 때문에 경계는 풀지 않고 있었지만, 뜻밖에도 신성이 깊지 않은 것은 태산부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업경이 틀리지 않았다면 태산부군마저도 큰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한데 그에게서 느껴지는 얕은 신성은 야마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야마는 본래 가져야 할 것을 극히 일부만 들고 있는 느낌인데, 태산부군은 본래 가졌던 것을 아예 도려내버린 수준이었으니까.

“…….”

내가 대놓고 살피고 있음에도 태산부군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아무런 말도, 행동도 없다.

폭격하듯이 나와 야마 사이에 뛰어든 것치고는 이상하리만치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는…… 정지.

그래, 멈춰 있는 것 같았다.

【하핫, 이것 봐라.】

태산부군을 둘러싼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챈 걸까.

야마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어째 이상하다 했더니. 이거 그냥 껍데기였구만?】

껍데기.

비로소 깨달은 내가 작게 입을 벌렸다.

정정해야겠다.

야마가 약한 상태인 것은 단순히 제 그릇의 크기만큼 신성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산부군의 경우에는 신성을 담을 그릇 자체가 사라진 것과 같았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의 신성을 가져갔다는 말인가.

휘이이익.

“……!”

그때 가문비나무 사이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전에 없던 기척이 느껴졌다.

“뭐야, 자꾸!”

가뜩이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호구별성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그쪽을 향해 독기를 뿜었다.

“또 이국의 신인가.”

신성을 끌어올린 강림 형도 사납게 눈을 빛냈고,

“흐음, 낯선 땅에 오자마자 줄줄이 낯선 자들과 마주치는구나.”

사라까지 영 껄끄러운 듯 미간을 좁히며 한마디 했다.

“분위기가 제법 살벌하네.”

직후 차사들의 시선이 집중된 길을 따라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몸에는 선녀처럼 하늘하늘한 비단옷을 걸치고서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비녀로 곱게 틀어 올린 신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가려져 있었는데, 대신 흰색 바탕에 화려한 문양이 그려진 변검 가면이 눈에 띄었다.

“미안, 우리 아버지가 인사가 좀 거칠지?”

그녀가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을 한 번씩 돌아보며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벽하원군이야. 내 아버지의 무례를 대신 사과할게.”

태산부군의 딸 벽하원군.

수명과 길흉화복을 관장한다는 도교의 신이었다.

그녀의 뒤에서 똑같이 변검 가면을 쓴 덩치 큰 남성이 한 박자 늦게 걸어 나왔다.

그의 머리에는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피뢰침처럼 길쭉한 탑 모양 장식이 올라가 있었다.

그 머리 장식을 통해 그가 보탑의 신 탁탑천왕임을 알아보았다.

걸음을 멈춘 탁탑천왕은 그 자신이 마치 탑이라도 된 듯 부동자세로 서 있을 뿐,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힌두교의 신들에 이어 도교의 신들이라.

생각지 못한 다른 신들의 등장에 긴장감이 점점 더 높아져 갈 때였다.

【아하, 저거였구만.】

벽하원군을 돌아본 야마가 히죽 웃었다.

그의 금안은 그새 더 형형한 빛을 내고 있었다.

【누가 감히 내 도시락에 손을 댔나 했더니, 저게 먼저 홀라당 까먹은 거였어.】

벽하원군의 시선도 곧바로 야마에게 꽂혔다.

“이런, 초면에 저거라니.”

그러고는 하얀 비단이 휘감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그녀가 쓰고 있던 변검 가면이 빨갛게 달아오른 화난 표정으로 변했다.

“예의 없는 벌거숭이로군.”

벽하원군이 야마를 핀잔하고는 똑같은 동작으로 한 번 더 얼굴을 쓸어내렸다.

분노를 띠었던 가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왔다.

나는 시기적절하게 가면 속 표정을 바꾸는 그녀를 보며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는 대신 변검술로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경우는 또 처음 보았다.

“염병, 이젠 별 희한한 컨셉충이 다 튀어나오네.”

호구별성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흠, 대륙의 신들은 얼굴을 가리는가 보구나.”

사라도 벽하원군과 탁탑천왕을 나란히 훑어보며 말을 보탰다.

“뭐, 저 벌거숭이는 그렇다 치고.”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린 벽하원군이 내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안녕, 염라의 아들.”

염라의 아들.

낯선 신에게서 흘러나오는 호칭에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굳이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녀 역시 저승을 다스리는 왕 태산부군의 딸이어서일 터였다.

【그래, 아들!】

그때 지켜보던 야마가 낄낄거리며 끼어들었다.

【아들, 너도 확연히 느꼈겠지?】

……저쪽도 나를 계속 아들이라고 부를 셈인가?

그에게선 정말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가 보였기 때문에, 나는 도리어 거북함을 느끼며 인상을 썼다.

【아까 장난 좀 친 건 미안했고 말이야.】

야마가 낄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로 아들을 대하듯 목소리에는 난데없이 친근감까지 담겨 있었다.

【사과할 테니까 우리 슬슬 동맹이나 맺자. 어때?】

반대로 벽하원군 쪽으로는 뚜렷한 적의를 보이면서.

【딸이 애비를 잡아먹었다니, 아들이 생각하기에도 아주 끔찍하지 않아?】

“…….”

그 말에 벽하원군과 태산부군을 함께 눈에 담았다.

야마의 말마따나 죽음의 신성이 느껴지는 것은 태산부군이 아니라 벽하원군이었다.

잡아먹었다는 표현이 과연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눈에 봐도 딸이 아버지의 신성을 그대로 품었음은 알 수 있었다.

무슨 조화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지금 태산부군을 움직이는 것은 벽하원군의 의지였다.

그렇기에 이곳에 나타난 이후 한마디 말도 없이 멈춰 있는 것이다.

【응? 그러니까 아빠랑 같이 저 패륜아를 치자.】

씨익 웃은 야마가 보석 같은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부자가 사이좋게 저 패륜아를 벌하는 거지!】

농담처럼 이어지는 제안.

동맹을 입에 담는 그의 말투는 한없이 가벼웠지만, 긴장감은 외려 높아졌다.

그의 진짜 속셈이 무엇인지 업경을 통해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자리에 모인 저승왕 중에서 제일 약한 것은 바로 야마였다.

그에 더해 내 착각이 아니라면, 아버지의 신성을 흡수한 벽하원군이야말로 여기 있는 신들 중에 제일 강했다.

나와 삼차사가 동시에 덤벼도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인데, 그녀의 곁에는 탑이 있는 한 절대 지지 않는다는 보탑의 신 탁탑천왕까지 있었다.

야마가 농담인 척 함께 벽하원군을 치자는 것도 그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나와 차사들의 힘으로 벽하원군을 처리하고, 힘이 빠진 나를 마저 상대하기 위해서.

가벼운 어투와 달리 제법 교활한 속셈이었다.

또한 그는 정말로 자기가 제일 약하다는 것에 하등 의미를 두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은 오직 스스로에게 달렸다는 그 광적인 믿음만으로는 전부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자신감이었다.

그 이유 모를 자신감이, 신성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나를 좀처럼 방심하지 못하도록 했다.

“재밌네, 둘이서 나를 치겠다고?”

야마의 말에 벽하원군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의 변검 가면도 그새 웃는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팔짱을 낀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지 말고 나랑 손을 잡는 것은 어때?”

비단으로 곱게 싸인 손이 내게 내밀어졌다.

“함께 저 벌거숭이부터 치자.”

“…….”

어쩌다 보니 두 신이 나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기실 나와 진짜로 손잡겠다는 마음은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부터 먼저 치는 것이 목적일 뿐.

“그냥 두 분이 함께 저를 치셔도 되잖습니까?”

때문에 나는 다소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당장의 상황이 어떻게 풀리든, 우리 셋은 서로 적대할 수밖에 없음을 상기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벽하원군의 가면이 다시금 화난 표정을 띤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건 싫어. 저 벌거숭이가 먼저 날 죽인댔잖아.”

……첫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단 야마부터 죽이겠다는 뜻일까.

대충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자 야마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들었지, 아들? 쟤가 나 싫대.】

그러고는 선명한 황금빛 눈동자에 나를 담으며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저것과 손을 잡는 일은 없을 거야.】

벽하원군도 다시 하얀 가면으로 돌아왔다.

가면 너머로부터 그녀가 나를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선택지는 너에게 있어.】

낄낄 소리를 내며 야마가 저와 벽하원군을 번갈아 가리켰다.

【골라 봐, 아들. 나야, 저 패륜아야?】

흥미를 가득 품고 반원을 그리는 눈.

동맹 이전에 내가 누구를 선택할지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

이걸 어떻게 넘겨야 할지 고민하며 야마와 마주 보던 그때였다.

[ (!) 전설 간의 교류가 감지되었습니다. ]

예기치 못한 팝업창이 떴다.

[ (!) ‘벽하원군’과 전설 동맹을 맺으시겠습니까? ]

-해당 전설은 해당 지역에서 ‘0%’의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 (!) ‘야마라자’와 전설 동맹을 맺으시겠습니까? ]

-해당 전설은 해당 지역에서 ‘0%’의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측의 제안을 그냥 농담으로 넘기기가 힘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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