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장. 마침내 한자리에(3)
야마라자.
망자의 왕이라는 천명을 가진 또 하나의 사신.
타오르듯 붉은 장발 아래 황금빛 눈동자가 보석같이 빛났다.
피처럼 붉은 비단을 대충 걸친 상체는 조각 같은 윤곽을 훤히 드러냈고, 귀와 목을 치장한 수많은 장신구는 별가루라도 뿌린 양 반짝였다.
그 손에 들린 것은 정의를 판결하고 악인을 벌한다는 위엄을 풍기는 짙은 핏빛 곤봉이었으니,
그에 맞서 검을 쥔 손에 더하며 그를 새기듯이 눈에 담았다.
파아앙!
그 순간 검푸른 신성이 나와 야마를 갈라놓을 기세로 난폭하게 떨어져 내렸다.
【성질이 급하군.】
다만 야마는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검은 신성을 끌어 올리며 신언을 내뱉었다.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신성은 어쩐지 만개하지 않은 꽃봉오리 같은 느낌을 풍겼다.
금방이라도 눈에 띄는 모든 것을 으깨버릴 듯 격렬한 기세를 띤 형과 달리 몹시도 잔잔했다.
【왕과 왕이 만났는데 인사를 나눌 시간은 줘야 하지 않나?】
입꼬리를 히죽 올린 야마가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반면 신성이 담긴 목소리는 실체를 지닌 양 묵직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쥐새끼처럼 습격해 놓고 잘도 지껄이는군.”
강림 형은 야마의 신언에도 아랑곳 않고 팔을 내뻗었다.
파아아앙!
발설지옥의 신성이 거칠게 나를 스쳐 간 직후, 내 검을 짓누르던 힘이 떨어져 나갔다.
파앙!
파아아앙!
파아앙!
형은 내게서 야마를 완전히 떨어뜨리자마자 쉴 새 없이 신성을 터트리며 그를 몰아붙였다.
【이야, 아주 훌륭한 충견이로구나.】
하나 맹렬하게 이어지는 공격 속에서도 야마는 태연했다.
【한반도의 야마한테도 사라메야가 있었어.】
사라메야.
네 개의 눈을 가지고 악인을 물어뜯는 신성한 개.
야마는 자신의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개에 형을 빗댄 것이다.
파아아아앙!
형은 도발 따윈 들은 척도 않고 막대한 신성이 담긴 일격을 날렸다.
촤아아아악!
제자리에서 버티던 야마의 몸이 순간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마른 흙 위로 붉은 피가 흩뿌려졌고, 바닥에는 두 죽음의 신성이 뒤섞이며 그을린 자국이 선명했다.
“흐음…….”
자욱한 먼지 속에서 일어선 야마가 피투성이가 된 몸을 내려다봤다.
“한반도의 사라메야도 제법 사납구나.”
분명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을 텐데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마음에 들어. 아무렴, 주인을 지키는 개는 사나워야지.”
피가 터진 입술을 핥으며 야마가 씩 웃었다.
“예를 갖추지 못한 것은 사과하겠다.”
그는 곤봉을 아무렇지 않게 뒤로 팽개치고는,
“자, 보이지? 나는 네 주인을 해치지 않아.”
과장된 몸짓으로 양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구경값은 치렀지 않냐. 이제 왕과 왕끼리 인사를 나눌 수 있게 해주겠어, 사라메야?】
“말귀를 못 알아먹는 놈이군.”
형은 거두지 않은 신성을 더욱 묵직하게 벼리며 야마를 노려보았다.
“좋다, 다시 바닥을 구르게 해 주마.”
무장을 해제하고 말고는 상관없었다.
사라메야고 뭐고 내 안위에만 신경을 곤두세운 형은 그냥 야마의 접근 자체를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형, 괜찮아요.”
그런 두 신을 잠시 지켜보다가 형을 멈춰 세웠다.
“그는, 그다지 강하지 않아요.”
분명 한차례 치명상을 입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야마에게 당혹감을, 나아가 묘한 섬뜩함까지 느끼면서.
【아, 맞아! 나 지금 더럽게 약해!】
곧장 긍정하며 야마가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신성이 담겨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자꾸 깜빡하고 신언으로 말해버리는데, 이러다 자기 소개하는 도중에 꼴까닥 뒤지면 어떡하지?”
그 태연자약한 태도에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착각은 아닐 것이다.
야마의 신성은 정말로 그리 깊지 않았다.
단순히 신성만 따진다면 차사들만으로 간단히 압도할 정도였다.
그러나 야마는 제 얕은 신성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 당당한 태도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금세 알았다.
어떤 외부의 힘도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믿음.
나아가 영겁의 세월을 죽음의 왕으로서 군림해 왔기에 스스로의 죽음마저 온전히 제 손에 달렸다는 확신이었다.
따라서 그가 나보다 훨씬 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쉬이 긴장을 풀지 못했다.
죽일 듯 몰아붙였던 강림 형을 가벼이 웃어넘기는 야마에게서는 신성과 관계없이 나를 압도하는 연륜이 느껴졌다.
“정말 시끄럽고 찝찝한 녀석이구만.”
나와 같은 것을 느꼈는지 호구별성이 한소리 했다.
그 옆에서 사라도 수천 년의 세월이 담긴 눈으로 야마를 주시했는데, 자신보다 더욱 오래 살아온 존재를 경계하는 눈이었다.
나란히 선 바리와 단군 역시 굳이 말을 보태지 않고 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놈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강림 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경박한 자에게 대왕님의 곁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듯 크고 두꺼운 몸 위로 검푸른 신성이 휘감겼다.
“이것 참.”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형의 태도에 야마가 턱을 매만졌다.
“충심도 좋지만 왕끼리 대화 좀 하겠다는데 이렇게 자꾸 끼어들어서야.”
그러더니 내게 시선을 돌리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이봐, 한반도의 야마. 사라메야 교육에 좀 더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
보석처럼 빛나는 눈이 도발적으로 휘어졌다.
인상을 찌푸렸다.
나를 의도적으로 부추기는 태도 때문은 아니었다.
내게 호기심을 표하는 야마가 꺼림칙하면서도, 나 또한 그가 궁금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아니, 애초에 그와 마주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형, 괜찮으니까 잠깐만 상대할 시간을 주세요.”
끝내 나는 그 불길한 끌림을 끊어내지 못했다.
“좋아, 그래야지.”
야마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서로 동의했으니…….”
피에 젖은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그가 말했다.
【이제 그 비싼 얼굴을 제대로 감상해 보실까.】
거리를 두고 내뱉어진 신언이 꼭 속삭이는 것처럼 귀에 닿은 순간이었다.
“……!”
어느새 그의 손에 턱 끝이 잡혀 있었다.
살기는 없었다.
손을 들어 반사적으로 달려들려는 형을 제지했다.
“음?”
다만 대처할 새 없이 가까워진 거리에 뒤늦게 몸을 물리려는데, 그보다 먼저 야마가 눈을 부릅떴다.
【이게 뭐야!】
그가 빽 소리치며 내 얼굴을 당겼다.
【왜 이렇게 젊어!】
그러고는 다른 손으로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는 강아지가 냄새를 맡듯 이곳저곳에 바짝 코를 들이밀며 나를 살폈다.
【거기다 나랑 하나도 안 닮았잖아!】
“……?”
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야마를 올려다봤다.
다시 마주한 그는 기이하게도 우리 대왕님을 연상케 했다.
인종, 연령대, 차림새 하나까지 모든 게 달랐음에도 분명 한반도의 염라대왕이 느껴졌다.
자연스레 그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얼추 이해했다.
지금 내가 그의 얼굴에서 우리 대왕님을 연상하는 것처럼.
야마 역시 나를 우리 대왕님으로, 정확히는 저와 어딘가 닮은 존재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분은 제가 아닙니다.”
천천히 대답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 대왕님의 부재를 되새기면서, 내가 누군지 정확하게 말했다.
“그분은 제 아버지이십니다.”
이미 부릅떠진 야마의 눈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내가 네 아빠라고?!】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는,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야마는 내 턱을 놓은 손으로 반대편 어깨마저 잡고서 나를 짤짤 흔들었다.
【그럼 대체 내 마누라는 누구야?!】
“…….”
제일 먼저 묻는 게 그거야?
아니 뭐, 그래.
궁금할 수도 있지.
나도 평행세계의 내 배우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니까.
“그분이 달리 혼인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어느 정도 설명은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제가 그분의 아들입니다.”
한데 덧붙인 설명에 오히려 야마는 더 큰 충격을 받은 듯 숨을 삼켰다.
【세상에, 총각 수태라니!】
내 어깨를 움켜쥔 손이, 아니 그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동아시아 진짜 희한한 동네잖아!】
“…….”
……진짜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진이 빠져 한숨을 내쉬었다.
“염병,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건지 원래 저런 놈인지 영 헷갈리네.”
나만 그가 당혹스러운 것이 아닌지 호구별성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정말이지, 잠시라도 눈을 떼면 꼭 사고를 치시는군요.”
그때 불현듯 사방에 그림자를 드리운 가문비나무 사이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저건 또 뭐야.”
호구별성이 곧바로 독기를 뿜으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주시했다.
“가네샤라고 합니다, 한반도의 신들이시여.”
숲속에서 걸어 나온 소년은 호구별성의 적의를 흘려 넘긴 채 여상하게 인사를 건넸다.
“야마가 저지른 무례는 제 뜻과는 하등 관련이 없으니 그의 목을 치시려거든 부디 저만은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합니다만.”
그는 마른 몸에 흰옷을 걸친 평범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아직 앳된 목소리와 달리 찌푸린 얼굴에서는 몹시 짙은 피로가 느껴졌다.
마치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 같다고나 할까.
“…….”
야마와 마찬가지로 그에게서도 달리 깊은 신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긴장을 놓지 못한 채 새로 나타난 가네샤를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일주일은 밤이 샌 사람처럼 피곤한 얼굴로 야마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업경의 권능은 그의 주변에서 유영하는 무수한 문자열을 읽어냈다.
단군과 바리에게서도 보지 못한 규모였다.
그만한 인과를 해석해서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건지 몰라 점점 더 불안함을 안은 채로 눈앞의 야마보다도 가네샤에게 더 집중할 때였다.
“이런…….”
지금껏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단군이 작게 탄식하며 숲을 돌아보았다.
“역시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군요.”
휘이이이익!
별안간 거센 바람이 숲을 뒤흔들었다.
콰아아아앙!
굉음을 울리며 천지가 진동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숲 한가운데에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육중한 파동이었다.
“대왕님!”
“씨, 갑자기 뭐야!”
“신성이구나!”
힘의 정체를 파악한 삼차사가 제각각 소리치며 파동의 진원을 경계하는 순간.
콰아아악!
거듭 굉음이 울리면서 나와 야마가 있던 자리에 무언가 크고 거대한 것이 폭탄처럼 떨어져 박혔다.
“무슨……!”
【크크크큭!】
나와 야마는 그보다 한발 먼저 뒤로 피해 서서, 그 자리에 우뚝 선 이를 보았다.
그가 서 있는 자리는 폭격을 맞은 양 움푹 패어 있었다.
나와 야마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의 발밑에 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거친 백발이 폭풍같이 휘날리고, 두 팔에는 무거운 추를 매단 노인이었다.
얼굴에 주름이 깊었지만 풍채가 워낙 대단해서 그 자체로 거대한 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
몸이 멋대로 움찔 떨렸다.
처음 마주하는 신이었다.
하나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불길하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그리고 그 거대한 몸에 휘감긴 죽음의 신성에 자연히 그의 신격을 알아보았다.
“태산부군…….”
사후세계를 관장한다는 또 다른 죽음의 왕.
힌두교의 저승왕 야마라자는 도교의 저승왕 태산부군과 만나 불교의 저승왕 염라대왕이 되었으니.
【와하하, 이렇게 셋이 다 모여 버렸네!】
나와 마찬가지로 한눈에 그를 알아본 야마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 그럼 이제 다 같이 펑 터지면 되는 건가?】
49장. 마침내 한자리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