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장. 마침내 한자리에(2)
단군의 기도가 계속되었다.
근처에 있는 날벌레 모두를 멀리 보낸 후에야 그의 기도를 지켜볼 수 있었다.
무슨 조화가 따로 있는 건가?
기도가 계속될수록 단군을 중심으로 공간이 변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 광경은 여느 숲과 다를 바 없는데도 그는 마치 투명한 벽으로 둘러싸인 차원에 분리된 것처럼 보였다.
굳이 지키지 않아도 벌레고 산짐승이고 접근하지 못할 것 같았다.
단적으로 말하면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기이함 때문에 기도를 올리는 그는 마치 인간을 대신해 기도하도록 깎아내린 성스러운 조각상 같은 인상을 풍겼다.
문득 27년 전 그의 명부를 처음 보았던 때를 떠올렸다.
‘주도혁(呪道焱)’
빌 주(呪)라니.
그날 내가 받은 수많은 명부 중에서도 그의 이름은 유독 눈에 띄었다.
한반도에 그런 성씨가 존재한다는 건 처음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집안에서 천부인의 단군과 적탑의 탑주라는 뛰어난 도사를 배출했다는 건데.
무언가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으려나.
애초에 불을 다루는 도사인 그의 이름이 빌 주(呪)와 불꽃 혁(焱)으로 이루어진 것에는 주술적인 의미가 담겼을지도 모르지.
18,827명의 사람들과 함께 죽을 운명이었던 스물일곱 살 청년.
그에게 처음 시선을 빼앗긴 이유는 이름 때문이다.
그러나 주도혁이라는 인간을 주목하게 된 것은, 활활 타오르는 불의 이름을 가진 그가 이름과는 너무도 다른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수천 명이 죽어가는 재앙 속에서 그는 기이하리만치 초연했다.
마치 그 혼자만 참사에서 유리된 것만 같았다.
만 명이 넘는 이들을 들불처럼 덮쳤던 죽음의 공포조차 비껴간 남자.
그는 불꽃의 이름을 가졌음에도 어떤 불로도 달굴 수 없을 듯 보였다.
한데 한순간 그가 하늘까지 치솟은 화염처럼 격렬하게 타올랐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는 대가로, 본래 함께 죽어야 했던 열두 명을 살리는 순간이었다.
그러한 최후를 앞에 두고, 나는 명부를 다시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도혁(呪道焱)
-생(生) 임인년(壬寅年) 임자월(壬子月) 병신일(丙申日)
-사(死) 무진년(戊辰年) 병진월(丙辰月) 을사일(乙巳日)
-향년(享年) 이십칠세(二十七歲)
2022년 12월 9일.
그래, 하필이면 내가 죽던 날에 태어난 남자의 명부를.
“…….”
그의 명부를 들추던 때를 곱씹으며 심경이 복잡해졌다.
내가 그의 명부를 찢은 것은 지극히 사적인 감상 때문이었다.
신조차 손쓰지 못한 운명을 바꾼 인간에 대한 경애.
그리고…… 내가 죽은 날에 태어난 남자가 나처럼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어쩌면 그때 나는 내가 이승에서 누리지 못한 27년의 세월을 그에게 투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순간의 비통을 참지 못하고 끊어낸 세월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열두 명을 위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영웅으로 자라나는 세월이었다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아.”
나를 바라보며 반원을 그리는 검은 눈동자를 깨닫고 살짝 몸을 떨었다.
언제부터 눈을 뜨고 있던 것일까.
내가 쓸데없는 단상에 잠기는 사이 기도는 이미 끝나 있었다.
“모두 멀지 않은 곳에 계십니다.”
빙긋 웃은 단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도의 효력 때문인지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음에도 그의 옷은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했다.
그런 사소한 요소 하나하나가 그의 기도가 범상치 않았음을 방증하는 기분이었다.
“음, 그분들과 접촉하는 사이 다른 자들의 눈에도 띄고 말았습니다만.”
“다른 자들이요?”
나는 그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북유럽에 온 우리를 주시하게 된 자들이 있다는 뜻인가?
가벼이 넘길 이야기가 아닐 터인데도, 단군은 고요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화제를 돌렸다.
“우선 다른 분들을 기다리죠.”
“여기서요?”
“네, 지금 오고 계실 겁니다.”
바리와 바리공주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알아서 찾아온다는 말 같았다.
무슨 원리인지 궁금했지만 딱히 더 묻지 않고 가만히 주의만 기울였다.
구름에 해가 가려진 하늘.
축축한 공기.
사방에 드리운 가문비나무들.
날이 그리 화창하지 않다는 것쯤은 눈을 떴을 때부터 알았지만, 머지않아 종말이 찾아올 땅이라서 그런지 인기척 하나 없는 숲이 점점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 적막 속에서 익숙한 기척이 다가왔다.
“……형이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죽음.
감지하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검푸른 신성이 번쩍이고, 크고 검은 것이 내 앞에 멈춰 섰다.
“대왕님.”
누구보다 빨리 곁에 돌아온 강림 형이 나를 바라보며 짙푸른 눈을 빛냈다.
“불쾌한 일은 없으셨습니까.”
늘 그래왔듯이 형은 그와 떨어진 사이에 별일이 없었는지부터 물었다.
반장갑을 낀 손이 금방이라도 나를 붙들 기세로 뻗어왔다.
나는 그보다 앞서 그의 팔뚝을 가볍게 잡았다 떼며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요. 단군 덕에 형도 빨리 만났고요.”
내 단언에 형은 내게 닿지 못한 손을 거두었다.
대신 내 얼굴이며 몸을 세밀하게 살피고는 옆에 선 단군을 돌아보았다.
“…….”
형과 눈이 마주친 단군은 평소와 다름없는 웃음을 짓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으나, 형은 딱히 반응하지 않은 채 내 곁을 지키듯 섰다.
“누나랑 바리는요?”
그러고 보니 같이 있다면서 형만 온 것이 다소 의아했다.
형은 특별할 건 없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고 있을 겁니다.”
……내가 어딨는지 듣자마자 다 버리고 뛰어왔구나.
이거 전에도 똑같은 일 있지 않았나?
형이 괜찮아지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한 걸 알지만 난감한 웃음이 새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염병, 저놈 저거, 또 혼자 뛰어갔네!”
침묵 속에서 얼마간을 더 기다리자 바리와 호구별성이 나란히 걸어 나왔다.
죽음과 더불어 한반도에서 가장 발이 빠른 역신은 형과 달리 어린 바리의 발에 속도를 맞춘 것이다.
“어휴, 이놈은 그냥 멍군한테 배워야 해.”
마침내 얼굴을 마주한 호구별성이 신랄하게 강림 형을 삿대질했다.
“진작 멍군처럼 왕의 가슴에 쏙 수납될 수 있는 방법을 배워 뒀어야 한다고!”
그 핀잔만으로도 나와 떨어진 사이 형이 바리와 호구별성을 얼마나 닦달했는지 알 것 같았다.
괜히 멋쩍어진 나는 작게 헛기침만 했다.
“이제 영감이랑 바리공주만 오면 되나?”
강림 형을 마지막까지 흘겨본 호구별성이 모여 있는 일행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수상한 소용돌이를 타고 가야 한다고 해서 좀 찝찝했는데, 생각보다 별거 없네?”
그녀는 팔짱을 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포털이랑 똑같았어. 눈 떠보니 풍경이 바뀌었더라.”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 짙은 위화감을 느꼈다.
나는 잠깐 정신을 잃고 꿈까지 꿨었는데, 호구별성은 그런 일 따윈 없었다는 듯 말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형이 있는 앞에서 굳이 그것을 들추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잠자코 사라와 바리공주를 마저 기다렸다.
어쩌면 내가 잠시 꿈을 꾸는 사이에 다른 일행들이 움직여서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된 것일지도 모르고.
“흐음, 벌써 다 모여 있었구나.”
조금 더 기다리자 이윽고 사라도 도착했다.
여느 때처럼 무심한 얼굴에 느릿한 걸음걸이였다.
한데 어째서인지 바리공주와 함께 떨어졌다던 단군의 말과는 달리 그는 혼자뿐이었다.
“엥? 뭐야! 왜 영감 혼자야?”
느긋한 태도로 멈춰 선 사라를 쏘아보며 호구별성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영감보다 바리데기가 훨씬 쓸모 있을 텐데, 왜 영감만 왔냐고!”
“거, 오자마자 아주 대단한 환대로구나, 별성.”
태연히 호구별성의 인사를 받은 사라가 다른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쪽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며 가야 할 방향만 알려주고 먼저 떠났다.”
“벌써 떠났다고?”
호구별성이 의아한 듯 인상을 썼다.
“바리데기는 대체 무슨 볼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건너온 거지?”
바리공주는 꼭 이곳에 와야 한다고만 했을 뿐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물어도 바로 대답해줄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구태여 묻는 이는 없었지만 내심 궁금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아마 이미르의 기를 모으러 가셨을 거예요.”
바리공주를 대신해 차분한 얼굴로 답한 것은 바리였다.
“그런 식으로 지금껏 세상을 이루는 기를 모으고 계셨을 테니까요.”
세상을 이루는 기.
바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눈앞의 소녀는 수천 년의 시간을 거스른 바리공주가 수많은 환생 끝에 이르게 된 존재였으며, 평소에는 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지만 한반도의 창세신 마고할미가 깃들어 있었다.
북유럽의 이미르는 한반도의 마고할미처럼 자신의 모습을 부수어 세상을 이루었다는 창세의 거인이었고.
머지않아 시간을 거스를 거라던 바리공주가 이미르의 기를 찾는 것은 그와 관계가 있을까.
게다가 지금껏 그렇게 기를 모아왔다는 말에선 그녀가 간 곳이 비단 북유럽뿐만은 아니라는 뉘앙스가 묻어났다.
50년 전 세상이 뒤집힌 후로 그녀가 줄곧 한반도에서 모습을 감췄던 것은 혹시 그런 이유였을까?
지구 전역을 돌아다니며 창세 신화를 모아야 해서?
“뭐, 바리데기라면 무언가 뜻이 있겠지.”
바리의 설명에 사라가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두 차사도 굳이 말을 보태지 않는 것에서, 새삼 바리공주가 신들 사이에서도 꽤나 신뢰가 두터운 존재임을 실감했다.
“그러면 이제 어찌할 것이냐, 대왕.”
사라가 나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
“대륙을 건너왔으니, 뜻한 바가 있을 테지.”
“아…… 니플헤임과 무스펠헤임의 신화를 얻을 거예요. 얼어붙은 땅과 불타는 땅의 힘으로 팔한지옥과 팔열지옥을 복원하려고요.”
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리고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신화도 얻어야 하는데…….”
한데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
불현듯 심장을 관통하는 사늘한 한기에 고개를 돌렸다.
“……뭐지?”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암녹색의 나무들뿐.
하나 그 끝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이 반드시 내게 도달하리라는 강렬한 감각이었다.
반사적으로 인벤토리에서 ‘죽음’을 꺼내 쥐었다.
파아아앙!
눈앞에서 새까만 신성이 벼락처럼 번쩍였다.
습격이었다.
상대를 정확히 인지하기도 전에 검을 쥔 손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채애애애앵!
휘두른 검에 무언가 강하게 맞부딪쳐 왔다.
채애앵!
채애애애애앵!
채애애애앵!
나를 찍어 누르려는 듯한 난폭한 힘에 몇 번 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찰나.
파아아아앙!
검은 신성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면서 폭풍과도 같은 힘이 나를 후려쳤다.
“……큭!”
힘에 떠밀리면서도 자세를 무너트리지 않기 위해 팔과 다리에 힘을 실었다.
“대왕님!”
“대왕!”
“전하!”
갑작스러운 습격에 차사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섞여.
“안녕, 짝퉁.”
낯선 목소리가 달라붙듯 선연하게 귓가에 울렸다.
“부하들이 꽤 많네?”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그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나와 검을 맞댄 자의 이름을 읊조렸다.
“……야마라자.”
새빨간 머리를 거칠게 휘날리는 검은 피부의 미남자.
또 다른 죽음의 왕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