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73화 (173/187)

49장. 마침내 한자리에(1)

한반도의 밑바닥.

북해라고 불리는 극음의 바다.

죽음의 왕 야마는 심드렁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코끼리 머리를 단 배불뚝이 신이 맞은편에서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저러고 있는 게 대충 엿새 전부터인가.】

선명한 호박색을 띤 아름다운 금안에 따분함이 가득했다.

【어이, 코쟁이.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슬슬 일어나지?】

한 손에 턱을 괸 야마가 투덜거렸다.

그는 다른 세 개의 팔로 혼자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는데, 번번이 셋 다 다른 것을 내는 바람에 계속 비기는 중이었다.

가네샤가 알 수 없는 작업에 들어간 이후, 야마는 세 손으로 하는 가위바위보를 벌써 1만 번 가까이 치렀다.

만약 1만 번을 다 채웠는데도 가네샤가 눈을 뜨지 않는다면 녀석의 기다란 코로 리본을 묶어볼 셈이었다.

“정말이지 단 한 순간도 얌전히 있지를 않으시는군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1만 번까지 200여 판을 남겨 두었을 즈음, 가네샤가 눈을 떴다.

【오, 우리 코쟁이 이제 일어났어?】

엿새 만에 듣는 가네샤의 목소리에 야마가 네 개의 팔로 만세를 했다.

“정신 사납습니다. 팔 좀 가만히 내버려 두시죠.”

가네샤는 짜증스럽게 코를 떨며 핀잔했다.

“신언도 이제 그만 쓰시고요.”

【신언?】

신언이라면 신성을 담은 특별한 목소리를 말함이다.

가네샤의 조언에 야마가 불만스럽게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신이 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왜?】

“뭐, 듣는 제 귀가 따가운 거야 별문제 아닙니다만, 지금 그 쥐꼬리만 한 신성으로 자꾸 신언을 쓰시면 삼천 우주 최초로 말하다가 소멸하는 신이 되실 겁니다.”

【쥐꼬리만 하다고?】

그제야 야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안에 검은 신성을 발했다.

파앙!

그의 손바닥 위로 검은 연꽃이 피는가 싶더니, 불이라도 붙은 듯 삽시간에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이게 뭐야! 내 신성이 왜 이것밖에 안 돼?】

연꽃이 사라진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야마가 황당한 얼굴로 어깨를 떨었다.

“소환 제물로 암무트나 겨우 쓰는 바람에 그렇게 됐습니다.”

가네샤가 코로 제단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한반도의 염라를 포획하는 데 실패했거든요.”

【염라?】

실망한 기색은 간데없이 야마가 금세 재밌다는 듯 보석 같은 눈을 휘었다.

【아하, 그래서 우리 강박증 코쟁이 심기가 이리 불편했구만.】

“불편하기만 하겠습니까? 이대로면 무려 2만 4천년을 공들인 판이 그냥 날아갈 지경입니다.”

진중함이라곤 없는 가벼운 반응에 가네샤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2만 4천년?】

야마가 낄낄거렸다.

【그래, 이 땅에서는 2만 4천년이 제법 크긴 한가 보군.】

다만 그 웃음기 가득한 황금빛 눈동자에서는 영겁의 세월이 번뜩였다.

【우리 코쟁이가 그 정도로 앓는 소리를 내다니 말이야.】

“……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기에 가네샤는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화제를 마무리했다.

“그보다 빨리 현신이나 하시죠.”

그러고는 인벤토리에서 반영구빙의체라 불리는 가짜 몸을 꺼내어 야마에게 내밀었다.

“정말로 삼천 우주 최초로 말하다가 소멸하는 신이 되기 전에.”

그만 쓰라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신언을 쓰는 야마를 핀잔하면서.

“계획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가네샤는 제 몫의 반영구빙의체도 꺼내며 말을 이었다.

“우선 북유럽부터 갈 생각입니다.”

【북유럽?】

의외라는 듯이 야마가 눈을 끔뻑였다.

【그 지랄 맞은 땅은 왜?】

“마침 그쪽에 길이 열렸거든요.”

【흐음…….】

단지 길이 열렸다는 것만으로는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아마 한반도의 염라도 곧 그쪽으로 넘어갈 겁니다.”

【오, 그놈이랑 똑같은 곳으로 가는 거야?】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네샤가 툭 덧붙이자, 야마는 그제야 노랗게 눈을 빛냈다.

【그러면 내가 가서 그놈을 날름 먹어 치우면 되나?】

“……뭐, 그럴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만.”

가네샤가 네 개의 팔로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곳에는 더 취하기 쉬운 죽음도 있지요.”

【아~ 그 반만 뒤진 애?】

누구를 지칭하는지 바로 알아들은 야마가 히죽 웃었다.

【이름이 뭐였지? 헤…… 헤, 햄이던가?】

“헬.”

【아, 그래, 헬!】

절반은 아름다운 여인, 절반은 썩어버린 시체의 몸을 가진 북유럽의 저승왕.

가네샤의 정정에 야마가 가려운 곳을 긁은 양 시원하게 맞장구쳤다.

【이야, 나 그래도 제법 잘 기억하고 있지 않아? 거의 비슷했잖아.】

“네, 그새 몰라보게 총명해지셨군요. 저 대신 지혜의 신 하시죠.”

뿌듯하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콧대까지 세우는 태도에 가네샤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크으~~.】

야마는 그저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코를 훔쳤다.

【우리 코쟁이가 사포처럼 까칠해도 가끔씩 말을 아주 예쁘게 한단 말이야.】

물론 가네샤는 예쁘게 말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하나 지혜의 신다운 현명함으로 굳이 제 뜻을 정정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기나긴 세월을 함께하는 동안 야마의 머릿속이 얼마나 천진한지는 이미 충분히 되새겼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가보도록 하죠.”

가네샤가 손에서 붉은 문자열을 피워 내며 일어섰다.

“이 별의 종말이 가장 먼저 시작된 땅으로.”

***

2021년 1월 1일.

나는 멍하니 핸드폰에 뜬 날짜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이 열리고 온갖 괴물이 튀어나왔던 서울.

그러나 어째서인지 눈에 보이는 거리는 깨끗하고 조용했다.

평범한 차림새와 여유로운 걸음걸이에서 낯선 평화가 느껴질 뿐, 신화나 재앙 따위는 하등 상관없는 세상처럼 보였다.

“다들…….”

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네?”

차가운 겨울 바람 때문일까.

길을 걷는 이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을 조금 낯설다고 느끼는 순간.

살갗에 닿는 축축한 공기에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아…….”

눈을 깜빡이자 잎이 뾰족하게 솟은 가문비나무가 점차 선명해졌다.

사람들로 가득 찬 서울의 거리와는 전혀 다른 적막한 풍경이었다.

2021년 1월 1일.

나는 조금 전에 보았던 50년 전의 광경을 다시금 떠올렸다.

“꿈……인가?”

꿈이라서 내가 기억하는 과거와 다른 모습이었던 걸까.

“깨어나셨군요, 염라.”

불현듯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부드럽게 휘어 있는 검은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 내가 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다는 걸 알아챘다.

주변은 가문비나무로 가득한 숲이었다.

구름 낀 하늘에 해는 보이지 않았고, 간간이 부는 바람은 습하고 서늘했다.

내 몸 위로 단군의 하얀 두루마기 코트가 덮여 있었다.

코트를 벗은 그는 검은 터틀넥 차림이었는데, 골격에 비해 말랐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얇은 옷감 아래로 탄탄하게 단련된 근육이 드러났다.

하긴 한반도 최강의 각성자가 아닌가.

주술에만 능한 게 아닐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라그나로크가 시작되면 혹한의 핌불베트르가 불어 닥칠 가능성이 큽니다. 용왕비께서 주신 패물을 미리 착용하시길 추천드립니다.”

단군은 화기를 품은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핌불베트르라면 신들의 몰락이 시작되기 전에 3년 동안 이어졌다는 재앙의 겨울이었다.

숲의 풍경이 아직 겨울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단군의 조언에 따라 서해 용왕비가 준 반지를 낀 뒤 몸을 덮고 있던 코트를 건넸다.

“지금 이곳에는 저와 당신뿐입니다. 이동의 여파로 흩어졌거든요.”

아까부터 문자열에 둘러싸여 있던 그는 코트를 받으며 살짝 시선을 돌렸다.

“바리공주님과 사라도령님이 함께이시고, 다른 세 분이 함께 계십니다.”

그래, 그럼 우리는 지금 세 팀으로 나뉘어 있구나.

머릿속으로 다른 일행들을 그려보았다.

바리공주와 사라 쪽은 걱정이 덜했다.

나와 떨어졌다고 쓸데없이 불안해할 형을 떠올리니 어쩔 수 없이 불안이 뒤따랐지만, 그래도 그의 곁에 있는 게 호구별성과 바리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호구별성은 늘 그랬듯이 강림 형을 핀잔하면서 가볍게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겠지.

“금방 다시 만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바리도 이렇게 형을 안심시킬 테고.

형은 바리에게 조금 유한 편이니 묵묵히 수긍할 확률이 높다.

“지금쯤 그분들도 우리를 찾고 있겠지요. 당신이 깨어나셨으니 저도 집중하겠습니다.”

도로 코트를 걸친 단군이 가문비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

무릎을 꿇는 것을 보니 기도를 하려는 모양인데, 원리는 모르겠지만 두 바리와 접촉할 수 있는 듯했다.

“그동안 저를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염라.”

눈을 감은 그가 말했다.

“지켜달라고요?”

“어떤 위험이 닥쳐도 제대로 방어할 수 없을 만큼 무방비해질 겁니다.”

단군에게서 듣게 될 거라곤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에 무심코 되묻자 그가 차분히 설명을 이었다.

말을 한 사람이 단군이라서 놀랐을 뿐,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는 북유럽의 낯선 숲속.

유럽의 각성자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산짐승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으니 누군가는 경계를 서야 했다.

나는 바로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가볍게 대답한 그가 꿇어앉은 무릎 위로 공손히 손을 모았다.

잠이 든 것처럼 편안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세상 모든 것에 초탈한 얼굴.

기도가 시작되자 나는 주변 경계도 잊고 일순 시선을 빼앗겼다.

평생을 도사로 살아온 단군.

단지 두 눈을 감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는 것만으로, 존재 자체가 누군가 치밀하게 공들여 준비한 제단처럼 느껴졌다.

문득 섬세한 곡선을 그리는 그의 목에 작은 벌레 하나가 살며시 날아와 날개를 접는 것이 보였다.

단군은 미동 없이 기도를 이어 갔다.

그는 마치 오랜 시간 곧게 자리를 지킨 고목 같았고, 목에 붙은 벌레마저도 긴 세월을 함께한 자연의 일부 같았다.

신적 존재도 아닌 인간이 그런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해서 단군을 빤히 바라볼 때였다.

“염라.”

문득 단군이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뭘 하고 계십니까.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어…… 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였다.

“지금 제 목이 낯선 존재에게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낯선…… 뭐요?”

그제야 눈을 끔뻑이며 단군의 목을 살폈다.

그러니까…… 작은 벌레가 붙어 있는 그의 수려한 목선을.

“혹시 벌레 싫어하세요?”

설마 하는 생각에 물었다.

물론 인간이 벌레를 싫어하는 것쯤 흔한 일이었다.

그렇다 한들 모든 것에 초연한 그가 벌레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조금, 상상하기 어려웠다.

“네, 싫습니다.”

하지만 단군은 평온하게 눈을 감은 단정한 얼굴로 짓씹듯이 답했다.

“무서워요.”

……무섭기까지?

“징그럽습니다.”

그야…… 그런 관점을 가진 사람이 많기는 한데.

어쨌든 지켜달라는 말을 들었으니 지켜줘야 했다.

그의 목에 앉은 벌레를 향해 조심스레 손끝을 갖다 댔다.

“사실 방금 우주에 소행성 충돌을 청할 뻔했습니다.”

“소행성이요?”

손톱 위로 올라온 벌레를 살살 날려 보내고선 되물었다.

“우주 역사와 모순되지 않게 지구의 모든 벌레를 박멸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는 신을 위해 기도하는 성자 같은 모습으로 단호히 말했다.

“……내가 미안합니다.”

하마터면 모르는 사이 지구에 큰 위기가 닥칠 뻔했다.

그제야 막중한 책임감을 실감한 나는 열과 성을 다해 단군과 지구를 위협하는 벌레들을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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