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장. 종말이 찾아올 땅으로(2)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서둘러야 한다는 바리공주를 따라 소용돌이가 일어난 곳으로 갔다.
동서해의 용왕, 왕족들, 그림 리퍼를 포함한 일행 모두와 함께.
“어우, 저것들 여전히 끝내주게 불길해 보이네.”
이곳저곳 흩어진 소용돌이를 흘겨보며 호구별성이 혀를 찼다.
“이렇게 보니 꼭 허공에 곰팡이 낀 것 같지 않냐?”
남해의 용신들이 우주퇴적물로 녹아내리면서 발생한 기묘한 소용돌이는 삽시간에 바다 전체로 번졌다.
수백, 어쩌면 수천에 이르는 소용돌이들은 어떤 것은 겨우 손바닥 크기에 이를 만큼 작았고, 어떤 것은 또 용궁을 다 뒤덮을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산호나 바위, 땅바닥에 자리를 잡은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둥둥 떠 있어서 언뜻 커다란 곰팡이같이 보이기도 했다.
“소용돌이에 휩쓸리면 어디로 갈지 모른다지.”
소용돌이들을 돌아보며 사라가 말했다.
“용신들의 불안이 크겠어.”
소용돌이는 그나마 더 이동하는 일 없이 그 자리에 고정되었지만, 앞으로 용신들은 밖으로 나오면 혹시라도 소용돌이에 닿지 않게 주의해야만 했다.
그 때문에 동서해의 용왕들은 빠른 시일 내에 소용돌이가 발생한 구역을 지도로 만들어 배포할 예정이라고 하니까.
“저 소용돌이를 타고 유럽에 간다니, 생각도 못 한 방식이야.”
그 와중에 그림 리퍼는 다소 명랑하게 말했다.
어디로 이동시킬지 모르는 소용돌이는 용신들의 새로운 불안이 되었지만, 바리공주의 계획은 도리어 대상을 어디론가 이동시키는 소용돌이의 힘을 이용해 북유럽에 가는 것이었다.
재앙처럼 발생한 정체불명의 소용돌이를 조율할 수 있다니.
새삼 무조신의 주술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
일행들이 한 마디씩 던지는 사이 강림 형은 내 옆에 묵묵히 선 채 짙푸른 눈으로 소용돌이를 주시했다.
소용돌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내가 휩쓸릴까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다.
바리공주가 주술을 준비한 소용돌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하면 느낌이 많이 달라졌네요.”
바리공주가 고른 소용돌이는 허공이 아니라 바닥에 자리 잡은 것이었는데, 언뜻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블루홀, 청공과도 흡사했다.
막 생겨난 당시에는 다른 소용돌이와 다를 바 없었지만, 지금은 붉은 문자들이 소용돌이를 둘러싸고 빼곡하게 진을 그리고 있었다.
바리공주가 두 도사와 함께 준비한 이동 주술의 흔적일 터였다.
“그리고…….”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소용돌이의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리공주가 준비한 소용돌이 주변은 유독 본래 남해의 용신이었던 우주퇴적물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어쩌면 애당초 주술을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 이 소용돌이를 고른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
그것들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바위라도 내려앉은 것처럼 불편해졌다.
유해교반에서 승리하고 용신들과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바다의 신화를 얻었지만, 결국 남해의 용신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을 실감하자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실제 유해교반의 신화에서는 세상을 멸망시킬 독을 삼키는 구원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나는 이 바다의 한 축이 무너지고 마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내가 치른 유해교반은 발생할 수 없는 사건을 불러오는 독이 되어 이 바다에 남겨지고 말았다.
……용신들의 혼이라도 되돌려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아쉬움을 곱씹는 도중, 귀목 던전에서 우주퇴적물을 혼으로 되돌렸던 풍문이 불현듯 떠올랐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불러왔던 풍문.
그리하여 삭제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뇌리를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는 쓸 수 없는 걸까.”
무심결에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파직!
일순 심장에 전기가 관통하는 듯한 섬뜩한 감각에 멈칫했다.
“……?”
그러나 감각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나는 당황스러운 심정으로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파직!
한데 거듭 손끝에서 희미하게 스파크가 일었다.
이번에는 똑똑히 보았다.
“자, 이제 다들 이쪽으로 오시오.”
그때 소용돌이에 주술을 시전하던 바리공주가 우리를 불렀다.
나는 스파크가 일었던 손을 몇 번 까딱거리다가, 다시 또 평소와 다름없어진 손에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옮겼다.
지금 집중해야 할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말했듯 북유럽으로 가는 주술을 준비하던 중에 문제가 생겼소.”
소용돌이 앞에 모두가 모이자 바리공주가 차분한 어투로 설명했다.
그녀의 옆에는 함께 주술을 준비했던 단군과 바리가 몹시도 닮은 표정을 짓고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인데? 길이 안 열려?”
호구별성이 나서서 영문을 물었다.
“아니, 문을 여는 데는 성공했소. 다만 생각보다 규모가 작아.”
바리공주가 대답했다.
“이 소용돌이로는 일곱 명밖에 갈 수 없소.”
“아…….”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자마자 무심코 탄식했다.
본래 북유럽에 가려던 것은 나와 차사 셋, 소용돌이로 길을 연 바리와 단군, 바리공주,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그림 리퍼까지 모두 여덟이었다.
……그래서 의논이 필요했던 거구나.
이대로는 한 명이 빠져야만 하니까.
“우선 나는 양보할 수 없소.”
바리공주가 말했다.
“나는 그 땅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래서 직접 길을 연 것이니 이해해주길 바라오.”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바리공주가 아니었으면 길을 열지 못했을 테니 당연히 그녀는 제외해야 했다.
그럼 대체 여기서 과연 누가 빠져야 할까.
나는 난감하게 모두를 돌아보았다.
일단 길을 연 단군과 바리공주는 제외할 수 없다.
겨우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찾은 그림 리퍼는 말할 것도 없고.
나도 단군을 도와주기로 했으니 빠지는 것은 곤란한데…… 그렇다면 아직 어린 바리가 저승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까?
“흠, 그럼 이번에는 내가 양보하도록 하지.”
한데 먼저 나선 뜻밖의 목소리에 생각이 엉켜버렸다.
“네? 리퍼가요?”
나는 황급히 그를 돌아보았다.
“줄곧 유럽으로 돌아가실 방법을 찾으셨잖아요?”
“음, 그렇긴 하지만 떠날 자리가 부족하다니까.”
그림 리퍼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레이디 퍼스트.”
익살스러운 얼굴의 그가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호구별성과 바리, 바리공주를 가리켰다.
“레이디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힐러가 필요할 테고.”
이어서 사라를 가리켰고,
“이백 년이나 우정을 쌓아 온 나의 친우 강림한테는 그냥 양보하고.”
다음으로는 느릿하게 강림 형을 지나쳤으며,
“킹이 빠질 수는 없잖아?”
나 역시도 장난스럽게 짚었다.
“그리고 저 친구는…….”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손끝이 단군에서 멈췄을 때, 그는 묘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역시 싸워도 못 이길 것 같아.”
……싸워서 자리를 만들 생각이었어?
나는 뭐라 반응하지 못하고 말없이 그림 리퍼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선의는 무척 고마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군이 처음 내게 북유럽행을 제안했을 때, 그는 유럽이 종말을 맞이하기 전에 세계수의 신화를 얻어 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그림 리퍼는 이미 종말을 맞이했던 그림 리퍼였다.
즉 그가 우리와 함께 북유럽으로 간다면, 종말 전의 북유럽에 그림 리퍼가 둘이 되는 모순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신화적 존재인 그림 리퍼는 설령 모르고 있을지라도, 무의식적으로나마 그런 모순을 감지하고 피하려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 우주에는 이미 인간 바리와 무조신 바리공주가 함께 공존하는 모순이 존재한다만…….
“양보해주어 고맙소, 서방의 사신이여.”
바리공주가 먼저 그림 리퍼에게 답했다.
“모든 것은 결국 순리대로 돌아갈지니, 그대도 결국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그림 리퍼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큰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레이디.”
그는 정말로 길을 양보할 셈이었다.
그림 리퍼가 이대로 북유럽에 넘어가면 큰 모순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겨우 찾은 길을 포기하고 다시 한반도에 남는다는 게 못내 신경 쓰였다.
심지어는 신화적 존재임에도 연고 없는 곳에서 무일푼이나 다름없이 인간처럼 고되게 일해 오지 않았나.
“저…… 그림 리퍼, 그러면 유럽으로 돌아갈 다른 길을 찾을 때까지 저승에서 머무는 건 어떠세요?”
짧게 머뭇거린 끝에 물었다.
“저승? 킹의 나라?”
그림 리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침 저승 신화에 소속되신 상태이기도 하니, 저승에 계시는 다른 분들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실 거예요.”
꽤 오랫동안 보지 못한 바리의 조부모와 도깨비들을 떠올리며 그의 검은 로브 자락을 붙잡았다.
“안 그래도 여기 올 때 왕자님을 집에 모셔다드린다는 이야기만 해서, 식구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저희를 기다릴 게 걱정이었거든요.”
물론 떠나기 전에 바리가 생각보다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는 언질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으니까.
“저승으로 가셔서 우리가 북유럽에 다녀오느라 늦는다고 말씀 좀 전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그다음에는 쉬고 싶으신 만큼 편히 쉬세요. 저희 로봇들도 요리 잘하거든요.”
“흐음.”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그림 리퍼는 곧 씨익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아! 그럼 킹, 집에 올 때는 내 향수병을 달래줄 기념품도 부탁해.”
다행히 그는 내 제안을 수락했다.
나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슬슬 출발하는 것이 좋겠소.”
그림 리퍼의 임시 거처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바리공주가 말했다.
“어, 지금 바로요?”
“주술의 유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소.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더는 지체할 필요가 없지.”
살짝 난감한 기색을 비추며 다른 일행들을 돌아봤다.
필요한 것은 전부 인벤토리에 있으니 당장 떠나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도 막내 왕자님과 서해 용왕님 수염에서 놀기로 했는데…….”
수염에서 놀고 싶어서 아침부터 나를 찾아왔던 고등어를 떠올리자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내가 갑자기 떠나버렸다고 하면 얼마나 실망할까.
-나는 괜찮소, 염라!
그 순간 소년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다녀오시오. 그러다 길이 막히면 안 되니까!
목소리는 서해 용왕의 풍성한 수염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 왕자님. 거기 계셨군요.”
서해 용왕의 수염을 가만히 응시했다.
왕자가 숨어 있는 부분이 불룩하게 꿈틀거릴 뿐, 그는 수염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작게 튀어나온 꼬리지느러미가 가늘게 떨리는 것만은 볼 수 있었다.
“…….”
그 꼬리의 흔들림에서, 그리고 업경의 권능을 통해서 작은 고등어가 느끼는 아쉬움과 슬픔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약속했던 숨바꼭질을 못 하게 되어서가 아니다.
이제 그는 정말로 집에 돌아왔고, 나 역시 북유럽에서의 일이 끝나면 바로 저승으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거 갔다 와서 또 놀면 되지, 뭘!”
서해 용왕이 별것 아니라는 듯 고등어가 숨은 풍성한 수염을 툭툭 치며 말했다.
“형님, 옛날에 그거 있잖아. 육지에서 용궁으로 통하는 보패. 그거 저승의 광천못에 하나 두면 어때?”
“아아, 그거? 괜찮네.”
동해 용왕이 곧바로 수긍했다.
“짐승의 시대에는 용궁에서 육지로 바로 통하는 보패가 있었네, 염라. 그걸 쓰면 시간을 들여 이동할 것 없이 용궁에 올 수 있어.”
그가 말했다.
“우리가 인간과 길을 달리하고 바다로 내려오면서 봉해 두었지만, 이제 그대가 우리 바다의 왕이 되었으니 다시 쓸 때가 온 것이지.”
바다의 왕.
그의 말에 내가 얻은 바다의 신화를 떠올렸다.
“그대는 이제 우리의 가족이니까. 언제든 만날 수 있네.”
그래, 구태여 그런 시스템이 없어도 나는 용신들과 뜻을 함께할 수 있음을.
“들으셨죠, 왕자님?”
나는 부러 더욱 밝은 목소리로 서해 용왕의 수염 속 고등어에게 말했다.
“언제든 광천못으로 놀러 오세요.”
용왕의 수염이 그새 봄바람이라도 부는 양 살랑거리는 것에 웃음 지으며.
“저도 언제든 용궁으로 놀러 올게요.”
-으응, 알았소! 염라!
마침내 고등어가 수염 속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어서 다녀오시오. 그리고 용궁에 꼭 놀러 오시오!
그새 진심으로 밝아진 고등어의 목소리에 안심하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동서해의 용왕들과 용왕비들, 오휼과 오혜 남매.
탈해와 도깨비들, 바리네 조부모가 기다리는 저승으로 갈 그림 리퍼까지.
그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한 뒤, 천천히 우리를 북유럽으로 데려다줄 소용돌이 앞에 섰다.
48장. 종말이 찾아올 땅으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