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장. 물이 걷히고 드러난(5)
촤아아아악!
초승달을 닮은 거대한 대낫이 검은 반원을 그렸다.
죽음의 신성이 일으킨 광풍.
그에 휩쓸린 뱀 인간들이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 (!) 모든 적을 격퇴했습니다. ]
[ (!) 첫 번째 휘젓기가 종료됩니다. ]
우리가 승리했다는 판정이 떨어졌으나 분위기는 그리 밝지 못했다.
“하아…… 어떻게든 넘기긴 했는데 큰일이군.”
죽음의 무도 효과가 끝났다.
악마의 모습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그림 리퍼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기회는 이제 두 번뿐이야. 다음 판은 죽음의 무도 없이 넘겨야 해.”
마찬가지로 안개와도 같은 역병의 형상에서 본래의 모습이 된 호구별성이 인상을 썼다.
“다행히 진영을 정비할 시간은 있군요.”
열두 마리로 늘어난 육해공 사이에서 단군이 인과를 읽으며 말했다.
시스템상으론 별다른 안내가 없었지만, 그는 인과를 통해 다음 휘젓기까지 남은 시간을 예측한 모양이었다.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염라.”
깊은 먹빛을 띤 눈이 나를 돌아보았다.
“필요한 보상에 맞춰 던전을 고른 전략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아군의 전력은 최대치에 가깝게 상승했지요.”
단군이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이었다.
“그렇기에 락슈미의 상에서 무기들을 얻지 못한 것과 웃차이쉬바라스 던전이 비어 있었다는 변수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본래 계획했던 것의 절반만 손에 넣었음에도 전력이 크게 늘어났다.
그러니 얻지 못한 것까지 제대로 거두었을 경우와 비교하면, 우리는 도리어 승산을 잃은 셈이었다.
“다만 말씀드렸듯 던전을 조작한 것은 결국 우리에게 득이 될 것입니다.”
단군은 첫 번째 휘젓기 전에 했던 말을 다시 입에 담았다.
그때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더니, 지금은 뭔가 달라진 걸까.
“이 싸움의 승리 조건을 다시 확인해 보죠.”
단군이 지도를 펼쳤다.
물에 잠긴 도시 위에 열 칸으로 나뉜 원.
본래 한 칸뿐이었던 파란색 칸은 두 칸으로 늘어났으며, 새로이 파란색으로 칠해진 칸이 바로 맞붙어 있는 빨간색 칸과 함께 반짝이고 있었다.
“근접한 칸끼리 전투를 치르면서 차차 모든 칸을 점령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우리가 처음부터 차지하고 있던 파란색 칸과 그 왼쪽에 위치한 빨간색 칸을 하나씩 가리켰다.
첫 번째 휘젓기에 따르면 우리는 원을 오른쪽으로 돌면서 모든 칸을 점령해야 한다.
한데 단군이 가리킨 곳은 그 반대, 다시 말해 가장 마지막에나 맞닥뜨리는 칸이었다.
“사실은 왕이 있는 이 마지막 칸을 점령하는 것이 진짜 승리 조건입니다.”
진영마다 하나씩 있는 조그만 원이 뭘 뜻하는 걸까 했더니.
왕의 표식이었구나.
“아하…… 의미가 좀 다르긴 하네.”
호구별성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차피 걔는 맨 끝에 있잖아. 해야 하는 일은 똑같은 거 아냐?”
“정해진 방향으로 돈다면 그렇겠지요.”
단군이 가볍게 긍정했으나 되레 진중한 침묵이 깔렸다.
모두가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즉, 왼쪽으로 돌아서 바로 왕이 있는 칸을 치자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그래서 당신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염라.”
단군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지금 우리의 왕은 당신이니까요.”
내가 저승의 왕인 것을 두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느낌이 들어서 잠자코 있었다.
“바즈라와 칼파브릭샤의 묘목. 당신이 지닌 그 두 가지는 인드라의 표식입니다.”
단군이 덧붙인 말에 비로소 이해했다.
유해교반은 아수라와 데바의 싸움이다.
내게 데바의 왕 인드라의 보물, 바즈라와 칼파브릭샤가 있기 때문에 시스템이 나를 왕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두 아이템을 얻을 때 내가 그것을 챙겨야 한다고 말한 이가 단군이었음을 상기하면서도, 나는 구태여 언급하지 않고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머지않아 두 번째 휘젓기가 시작됩니다. 칸이 하나뿐일 때는 당신도 함께 이동해야만 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다르다면?”
“왕은 마지막 칸에 머물 수 있거든요.”
그럼 첫 번째 휘젓기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파란색 칸이 곧 마지막 칸이었기 때문에 왕까지 싸워야 했다는 뜻일 터.
“유해교반 퀘스트는 처음부터 어그러져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완벽히 깨달았다.
마지막 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아수라의 왕.
정해진 방향으로 돌지 않아도 된다면 답은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러분이 두 번째 휘젓기를 치르는 동안 제가 아수라의 왕을 쓰러트리는 것. 그것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거군요.”
“대왕님,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말이 떨어진 순간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강림 형이었다.
형의 매서운 눈이 곧바로 단군을 향했다.
“왕이 있는 칸으로 갈 수 있는 건 같은 왕뿐인가?”
낮게 깔린 목소리가 단군을 위협하듯 날 서 있었다.
“데바의 왕으로 인식되는 게 아이템 때문이라면 왕을 바꾸는 것은 가능한가?”
“형, 그만. 진정해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바즈라는 귀속 아이템이에요. 양도할 수 없어요.”
천천히 내게 돌아오는 짙푸른 눈동자.
가늘게 흔들리는 시선과 마주한 나는 별일 아닌 듯 웃어 보였다.
“형, 누나랑 또 손 잡고 춤출 수 있어요? 이대로는 아마 세 번째 휘젓기에서 쓰게 되겠죠. 모두가 무사히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하니까.”
한편으로는 형을 놀려 먹는 막내처럼 장난스럽게.
또 한편으로는 아수라의 왕을 처치하는 것쯤 정말로 손쉽다는 태도로.
“형이 죽음의 무도를 쓰기 전에 돌아올게요.”
도통 불안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형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잘 다녀오라는 말도, 혼자 보낼 수 없다며 억지를 부리는 말도 없었다.
그저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정지해 있었다.
단군은 형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지만, 이미 형은 그 답을 알 것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구태여 돌아갈 것 없이 다 함께 브리트라를 치면 그만이니까.
형이 나를 붙잡지 않는 것은 그의 무언가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형, 나는 더 이상…….
-왕을 지키다 스러지는 발설지옥의 차사를 보고 싶지 않아요
그냥, 내가 건드린 상처가 아직 쑤셔서 그러는 것이다.
관성처럼 붙잡아야 할지, 나를 믿어도 될지 결정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마음을 모른 척하면서 나는 차분하게 되새겼다.
말 몇 마디로는 형의 고름을 짜낼 수 없고, 형은 더 커진 통증에도 이내 익숙해질 테지.
서두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앞서 떠나보낸 수백 수천 번의 밤만큼 서로의 곁에 돌아와야 하니까.
오늘을 그 첫걸음으로 만들면 돼.
“이것 참, 나도 우리 왕 혼자 보내는 거 썩 내키지 않거든?”
팔짱을 낀 호구별성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염병, 근데 저놈이 먼저 청승을 떠니까 똑같이 보일까 봐 뭔 말을 할 수가 없네.”
평소보다도 살짝 과장된 말투에서 그녀의 마음이 느껴져 웃음이 샜다.
“다른 차사들이 할 말은 다 했으니 난 굳이 보태지 않겠다.”
파앙!
한숨을 쉰 사라가 손안 가득히 색색의 꽃을 피워 내밀었다.
다발을 이룬 꽃을 보니 마력을 전부 쓴 것 같았다.
“가져가거라. 어차피 두 번째 휘젓기에서 죽음의 무도를 쓰면 딱히 필요도 없는 힘이니까.”
세 번째 휘젓기가 시작되기 전에 내가 돌아올 것을 믿는다는 말이었으니, 나는 언제나처럼 내 편을 들어주는 그가 고마워서 더욱 밝게 웃었다.
“길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염라.”
작전이 마무리되었을 때 단군이 문자열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직접 열 필요는 없었네요. 이미 존재하는 길을 찾았거든요.”
***
[ (!) 곧이어 두 번째 휘젓기가 시작됩니다. ]
팝업창이 떴다.
전투를 준비하고 있을 일행들을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물에 잠긴 도시를 거닐었다.
몇 걸음 앞에서 단군이 불꽃으로 빚어낸 작은 나비 한 마리가 팔랑이며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나는 제법 긴장한 채로 나비를 따라갔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으면 자꾸만 투명한 벽에 어깨나 발끝이 부딪쳤다.
보이지 않는 벽으로 가로막힌 공간에 보이지 않는 길이 뚫려 있는 셈이었다.
자그마한 나비는 아무렇지 않게 길을 나아갔지만, 그보다 수백 배 큰 나로서는 보이지 않는 벽을 더듬어 가며 직접 뚫린 곳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나비를 따라 얼마간 걸었을 때.
화르르륵!
문득 날갯짓을 멈춘 나비가 재로 변해 흩어졌다.
[ (!) 왕의 자리에 도달했습니다. ]
때마침 떠오른 팝업창에 나비가 할 일을 다하고 사라졌음을 알았다.
[ (!) 마지막 벴댔땍긱떼렉딧꽤롤흐흐흐 시작됩니다. ]
[ (!) 마지막 벴댔땍긱떼렉딧꽤롤흐흐흐 시작됩니다. ]
[ (!) 마지막 벴댔땍긱떼렉딧꽤롤흐흐흐 시작됩니다. ]
오류창이 연달아 떴다.
쿠우웅!
쿠우우웅!
첫 번째 휘젓기와 같았다.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
요동치며 세차게 돌아가는 도시.
공간이 바뀌고 있었다.
정상적인 루트가 아니었음에도, 내가 이곳에 들어온 순간 마지막 휘젓기가 시작되었다고 인식한 모양이었다.
쿠우우우웅!
도시는 다시 탁 트인 공터로 변했다.
[ (!) 왕을 쓰러벴까때벋렛흐흐흐거나 항복하벨깰민귁뜁흐흐흐오. ]
[ (!) 왕을 쓰러벴까때벋렛흐흐흐거나 항복하벨깰민귁뜁흐흐흐오. ]
[ (!) 왕을 쓰러벴까때벋렛흐흐흐거나 항복하벨깰민귁뜁흐흐흐오. ]
끊임없이 떠오르던 오류창은 일제히 스파크를 일으키며 사라져버렸다.
읽을 수 있는 글자는 한정적이어도 첫 번째 휘젓기 때 본 것이 있어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왕을 쓰러뜨리거나 항복시키란 뜻이리라.
새삼 유해교반의 신화를 곱씹었다.
유해교반의 신화는 아수라와 데바의 전쟁이지만, 그 전쟁은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선한 신 데바와 악한 신 아수라.
그 둘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태초의 바다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태어났다는 유해교반은 결국 선한 의지로 끊임없이 악을 다스릴 수밖에 없다는 신화다.
아수라의 왕으로 변해버린 남해 용왕.
그가 인간은 어찌할 수 없는 재해의 화신이라면, 사실은 완전히 없애지 못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것이 정상적인 신화였다면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의 왕을 마주했다.
한때는 남해의 용왕이었으며 지금은 아수라의 왕 브리트라가 된 존재.
마지막 칸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이 싸움은 결국 두 왕이 마무리하게 될 것이다.
“또 혼자로구나, 어린 왕이여.”
황금색으로 빛나는 용의 눈이 나를 향했다.
여섯 개의 검은 팔과 비늘이 덮인 꼬리가 여유로운 곡선을 그렸다.
전투가 시작되었음에도 조금의 긴장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또 시간이라도 끌어보려는 것이냐.”
그는 신화전에서 내가 카르마 등급 필드를 펼쳤던 때를 들추었다.
당시 나는 그가 일격몰살이라는 말도 안 되는 법칙을 완성하기 전에 그를 카르마 등급 필드에 가두었고, 재해 그 자체의 현신이 가진 압도적인 힘에 농락당했다.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수를 쓸 수도 없을 텐데.”
그가 유려한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한 차례 내 힘을 겪어 보았으니, 신화전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내게 질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방식으로 싸운다면 아직 나는 그를 이길 수 없다.
“항복하실 생각 없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태연히 물었다.
“당신이 항복하면, 저는 당신의 목숨을 거두지 않고 이길 수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나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