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장. 물이 걷히고 드러난(4)
열 개의 칸으로 나뉜 원.
자세히 보니 각 진영에는 조그만 원이 한 개씩 그려져 있었다.
우리 진영은 애초에 칸이 하나뿐이었으니 의미랄 게 없었는데, 적 진영의 작은 원은 아홉 개 중 우리와 왼쪽에서 맞닿는 칸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 (!) 곧 첫 번째 휘젓기가 시작됩니다. ]
그게 무슨 표식인지 생각해 보는 사이 팝업창이 떴다.
파란색 칸과 빨간색 칸이 하나씩 선택되어 전구처럼 반짝였다.
선택된 빨간색 칸은 우리와 바로 붙어 있되, 표식이 없는 오른쪽 칸이었다.
“흐음, 그러니까 이 두 개가 곧 싸우게 되나 보지?”
지도를 내려다보며 호구별성이 말했다.
“Oh, 한 칸 대 한 칸으로 싸우는 시스템인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어.”
그림 리퍼가 혀를 차며 말을 보탰다.
“칸을 분배하는 방식은 108개의 던전 중 각 진영이 공략한 숫자에 따릅니다만, 저희는 가능한 한 효율적인 아이템 위주로 습득했지요.”
분위기가 가라앉은 가운데 단군이 차분히 말했다.
“그러니 저는 승산이 없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끝을 흐리던 그의 시선이 나를 스쳐 갔다.
“아니, 이건 첫 번째 휘젓기를 끝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단군이 말하려다 만 것이 신경 쓰였지만 그의 말대로 지금은 첫 번째 휘젓기에 승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절대 져서는 안 되는 첫판.
물러설 수 없는 싸움임을 실감할수록 천천히 압박이 차올랐다.
이대로 싸움에 이기며 차근차근 칸을 확보해 나가면 여유가 생길 테지.
그렇다 한들 정말로 여유를 가질 수는 없었다.
아군의 쪽수가 압도적으로 적으니 싸움이 길어지면 위험하다.
“당장 칸 하나에 적이 얼마나 있는지, 그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알 방법도 없다니. 참 시작부터 어렵게 돌아가는구나.”
사라가 무심한 얼굴로 불평했다.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일단 아이템부터 분배할까요.”
우리는 던전을 돌며 유해교반에서 탄생하는 것들로 만들어진 아이템을 얻었다.
던전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은 그 제한 덕인지 대개 효과가 좋았는데, 이번에는 애당초 전쟁을 위한 자원이다 보니 더욱 남달랐다.
“우선은 카우스투바.”
커다란 보석이 여럿 박힌 화려한 목걸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라는 카우스투바는 유지의 신 비슈누의 목걸이였다.
유지의 권능이 깃들어서인지 체력과 마력의 소모를 절반으로 줄여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건 강림 형이 착용하는 게 어떨까요. 형은 원래 모아둔 신성으로 상처를 치료하거나 마력을 회복할 수 있으니, 카우스투바가 더해지면 더 오래 버틸 수 있겠죠.”
내 말에 형의 시선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카우스투바의 효과가 좋은 만큼 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그런 형의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여 조금 장난스럽게 웃었다.
“형은 틀림없이 내 몫까지 싸우려 할 테니까. 더 잘 싸우려면 필요할 거예요.”
부러 가벼운 말투로 우리의 곪은 상처를 건드렸다.
형은 여느 때보다 서늘하게 느껴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침묵으로 내 뜻을 받아들였다.
“와씨, 저게 무슨 꼴이냐.”
형이 카우스투바를 목에 걸자마자 호구별성이 욕설을 내뱉었다.
“검은 정장에 화려한 금목걸이라니…… 그냥 조폭이잖아. 쟤 인상 더러운 거야 천 년 전부터 알았다만, 내 생각보다 더 대단했네.”
차갑다 못해 가혹한 평가였다.
꽤 심각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려고 했다.
지금 형을 보면 진짜로 실수할 것 같아서 어떻게든 시선을 돌렸는데, 그렇게 느낀 건 나만이 아닌지 모두의 시선이 방황하고 있었다.
“크흠, 그다음은 찬드라인데…….”
부러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찬드라는 파괴의 신 시바의 머리에 놓인 달 모양 장식이었다.
파괴의 권능이 담겨 공격력을 두 배로 높여주었다.
“당신이 쓰시는 게 좋겠습니다, 염라.”
단군이 말했다.
“찬드라는 당신의 지옥 스킬을 더욱 증폭시켜줄 겁니다.”
그의 말대로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공격기 중 하나인 지옥 스킬을 증폭시키는 것이 효율적인 터라, 내가 최선이 맞나 싶으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오, 머리핀이 됐네?”
호구별성이 건넨 찬드라를 받자마자 착용자를 인식한 찬드라가 엄지만 한 머리핀으로 변했다.
그녀는 찬드라와 나를 번갈아 보며 짓궂게 웃었다.
“우리 전하, 귀엽게 사과 머리 한번 할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니, 제발 참아주세요, 누나!”
기겁하며 뒷걸음질 치자 잽싸게 다가온 호구별성이 내 손에 들린 찬드라를 쏙 뺐다.
그녀는 씨익 웃으며 날 겁주었지만 결국에는 그나마 무난한 옆머리에 꼽아주었다.
“이 나이에 이런 귀여운 머리핀이라니, 좀 부끄럽네요…….”
애도 아니고 달 모양 머리핀을 한 게 민망해서 어색하게 웃자, 호구별성이 내 뺨을 꾹 찌르며 강림 형을 흘겨보았다.
“넌 귀여우니까 괜찮아. 그걸 강림이 달았다고 생각해 봐라. 아주 끔찍하지.”
“…….”
음, 그것도…… 나름 볼 만할 것 같은데.
무심결에 그런 생각을 했다가 또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될 것 같아서 다시 헛기침을 했다.
“다음으로는 체력과 마력을 전부 회복시켜주는 소마가 세 병 있었죠?”
그림 리퍼와 호구별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역시 두 분이 쓰시는 게 좋겠어요.”
“아하, 죽음의 무도를 쓰라는 거지?”
단번에 알아들은 그림 리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가 두 병, 그림 리퍼님이 한 병을 가져가시면 되겠네요. 그럼 강림차사님을 포함해서 세 번을 쓰실 수 있어요.”
듣고 있던 바리가 말했다.
호구별성과 그림 리퍼가 첫 번째 죽음의 무도 후에 한 병씩 복용하면, 다시 채워진 마력으로 두 번째 죽음의 무도를 펼칠 수 있다.
이때 남은 한 병의 소마로 호구별성이 재차 마력을 회복할 경우 강림 형과 함께 세 번째 죽음의 무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지극히 마땅한 말이었으나 나는 살짝 긴장하며 형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줌 악의도 담기지 않은 소녀의 말에 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다만 뜻밖에도 그것이 전부였다.
내 명령이었다면 또 자결을 운운하며 항명했을 테고, 내가 아니더라도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언성을 높였을 텐데…….
예기치 못하게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죽음의 무도에 대한 답은 바리에게 있었다.
상황도 상황이고, 바리랑 같이 살살 구슬리면 이번에는 제법 쉽게 죽음의 무도가 성사될지도 모르겠다.
가장 어렵다는 처음을 해냈는데, 우리 형이 그보다 쉬운 두 번째를 못 할 리가 없다.
“카마데누는 제가 쓰는 것이 좋겠지요.”
단군이 말했다.
“신수의 분신을 만들어주는 아이템이니까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신성한 암소 카마데누 인형은 신수의 분신을 무려 세 개씩 만들어주는 능력이 있었다.
신수를 가진 헌터는 몹시 드물다 보니 카마데누를 쥐여줘도 제대로 쓸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는데, 단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계산대로라면 락슈미와 알락슈미 던전에서 얻은 무기들도 제법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쉽게 되었군요.”
그가 덧붙이는 말을 들으며 해상 카지노 던전에서는 실질적으로 얻은 게 없다는 걸 상기했다.
더군다나 락슈미의 상이 칼리로 변하면서 뜻하지 않게 바스키 던전에 떨어져버리기까지 했지.
“하지만.”
한데 순간 단군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잃은 것이 있다면 분명 얻는 것도 있겠지요.”
“저들이 던전을 조작한 게 우리에게도 득이 된다는 뜻인가요?”
나는 그 모호한 말에 곧장 되물었다.
“아직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그리 말하면서도, 재차 곁을 맴돌기 시작한 문자열을 보며 단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염라, 당신이 거둔 칼파브릭샤의 묘목은 계속 지니고 계십시오.”
그가 그것으로 답을 대신했기에 나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허용되지 않는 정보를 발설하면서 피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아직 의식 한구석에 선명히 박혀 있는 탓이었다.
“나는 그냥 파리자타를 몇 장 쓰마.”
사라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시들지 않는다는 꽃, 파리자타는 마력을 채워주는 효과가 있었다.
“싸움이 길어지면 필연적으로 내 힘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최소 아홉 번의 전투가 이어져야 하는 상황에 서천의 권능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제게는 바루니 던전에서 얻은 나가파사가 있어요. 적들의 발을 묶어야 할 때 이 포승줄을 쓸게요.”
또한 마지막으로 바리가 말함으로써, 우리가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의 분배가 완료되었다.
“아마 동서남북 네 개의 세력이 각각 동맹을 맺어가며 전쟁을 치렀다면 최소 아홉 번이나 이겨야 하는 상황은 오지 않았겠지.”
사라가 쯧쯧 혀를 차며 한마디 했을 때였다.
[ (!) 첫 번째 휘젓기가 시작됩니다. ]
주어진 시간이 끝나고 팝업창이 떴다.
쿠우웅!
쿠우우웅!
물에 잠긴 도시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이윽고 놀이기구라도 되는 것처럼 사방이 빠르게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미친! 어지러워! 싸우기도 전에 멀미로 쓰러지겠다!”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으며 신경질을 부렸다.
[ (!) 첫 번째 휘젓기가 시작되었습니다. ]
[ (!) 적들을 모두 쓰러트리거나 항복하십시오. ]
시작과 함께 떠오른 또 하나의 팝업창.
말 그대로 ‘전쟁’이라서인지 몰살당하기 전에 항복하면 칸을 내주는 대신 싸움을 멈출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쿠우우우웅!
정신없이 회전하던 속도가 천천히 느려졌다.
회전이 완전히 멈추었을 땐 본래 도시였던 풍경이 탁 트인 공터로 변해 있었다.
“허어.”
사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탄식했다.
“많기도 하구나.”
그의 말마따나 우리는 어느새 족히 백은 넘어 보이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야, 설마 아홉 칸 전부 이따위라고?!”
호구별성이 황당함이 그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천 명이나 있는데 던전 공략에 그렇게 시간을 끌었단 말이야? 다 허접들인가 보네!”
절망적이라면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오히려 농담을 던지는 것이 그녀다웠다.
나는 작게 웃고는 일행들과 등을 맞댄 채 적들을 살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용신이 아니네요.”
분명 남해의 용신들과 싸우게 될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우리를 둘러싼 적들은 갖가지 물고기를 닮은 용신들이 아니었다.
“또 뱀 인간들이 나올 줄이야.”
바스키 던전에서 봤던 첫 번째 파수꾼이 일제히 볏을 펼치며 독기를 뿜었다.
“남해 용왕만이 아니라, 남해의 용신들 전부가 변해버린 건가?”
북해 용궁에서 발견한 우주퇴적물이 떠올랐다.
혹시 그들은, 뱀 인간이 되지 못한 용신들이었을까.
-캬아아악!
앞서 경험한 뱀 인간들의 무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기에 다소 방심한 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틈을 노리듯 뱀 인간들이 볏을 펄럭이며 달려들었다.
파아아앙!
나와 달리 조금도 경계를 풀지 않았던 형이 검푸른 신성을 번쩍이며 제일 앞에서 달려드는 뱀 인간들을 쳐냈다.
“……!”
형은 단숨에 적 여럿을 쓸어버리고도 멈칫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바스키 던전에서 상대한 것들보다 강합니다.”
형의 말을 증명하듯 발설지옥의 신성에 짓이겨진 뱀 인간들은 몸통이나 팔, 꼬리가 으깨진 몸으로도 재차 독을 내뿜으며 덤벼들었다.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요.”
그새 육해공을 소환한 단군도 말했다.
파아앙!
파앙!
파아아앙!
카마데누의 힘으로 열두 마리가 된 육해공이 뱀 인간들을 향해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놈들은 쓰러져도 다시 몸을 일으키며 좀처럼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놈들, 독도 성가셔.”
독기에 독기를 맞부딪친 호구별성이 짜증스럽게 불평했다.
본디 통증만 심할 뿐 그다지 치명적이지 않았던 독기까지 강화된 모양이었다.
아쉬움에 마른침을 삼켰다.
통증뿐이라면 그냥 독 사이로 뛰어들 생각이었는데, 진짜로 큰 부상을 입어버리면 서천의 신성을 낭비하는 꼴이 된다.
“첫판에서는 항복할 수 없어요!”
나는 달려드는 뱀 인간들을 쳐내며 구태여 소리쳤다.
항복해서 싸움을 멈추더라도 유해교반에서 패하면 의미가 없으니 빨리 다른 방법을 강구하자는 뜻이었다.
“Fucking! 이러면 죽음의 무도밖에 답이 없겠어!”
검은 신성을 모래처럼 흩뿌리며 그림 리퍼가 말했다.
“첫판부터 싸움이 길어지면 지쳐. 우선은 빨리 끝내고 다른 작전을 짜야 해!”
분명 맞는 말이었지만 그 순간 우리는 아마도 모두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소마는 세 병.
강림 형이 나선다 해도 죽음의 무도를 사용할 기회는 최대 세 번.
그렇다면 결국 나머지 여섯 번은 가장 강력한 광역기 없이, 심지어 호구별성과 강림 형, 그림 리퍼는 마력을 소진한 채로 싸워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홉 번을 내리 이기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