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장. 물이 걷히고 드러난(3)
뱀이 기어 온다.
주변을 경계하던 강림 형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꽃은 넣어 두세요, 염라.”
단군이 내 손목을 조심스럽게 놓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지장이 되지 않을 정도의 손상을 계산했습니다. 절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
아무렇지 않게 부드러이 반원을 그리는 고운 눈매가 붉은 눈물로 선명하건만.
나는 한 차례 닦아 내도 다시금 흐르는 피에 한숨을 삼켰다.
“말했잖아요. 꽃이 필요하다면 누구에게든 써야 한다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단군의 붉은 눈가를 응시하며 다시 한번 꽃을 들었다.
그는 제 가슴께에 꽃을 가져다 대는 나를 저지하지 않았다.
파앙!
서천의 꽃에서 뿜어진 신성이 그를 부드럽게 감쌌다.
눈과 코에 흐르던 피는 흔적도 없이 증발해 흩어졌다.
한순간 무수하게 늘어난 문자열이 단군의 몸을 어루만지듯 물결쳤다.
평소 그가 몰고 다니던 문자열과는 달랐다.
상처가 고쳐지는 과정에서 새로이 나타난 문자들이었으니, 아마 단군의 상처가 통상적인 상처와 다르다는 방증일 터였다.
“덕분에 피가 빠르게 멎었습니다.”
단군이 말끔해진 얼굴로 웃었다.
그 표정에선 언뜻 장난기까지 엿보였지만, 그의 기묘한 상처가 영 뇌리를 떠나지 않는 탓에 되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단군의 시선을 피해 강림 형이 가리켰던 어둠으로 눈을 돌렸다.
스스스!
스스스스!
벽을 따라 나 있는 크고 작은 굴 아홉 개 중 가장 커다란 구멍 속.
이제는 뱀의 기척이 내게도 선명하게 느껴질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보스 몬스터로군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린 단군이 말했다.
“보스의 정확한 출현 조건을 파악하지 못해 난감했는데, 이미 충족된 모양입니다.”
가만히 수긍했다.
보스가 출현하는 조건이 ‘파수꾼을 쓰러트리고 제단에 다다르는 것’이라기엔, 우리보다 한발 앞서 이곳에 당도한 단군에겐 아무 일도 없었지.
“정황상 ‘모든 인원이 제단에서 모이는 것’일 가능성이 높겠네요.”
단군과 같은 것을 상기한 내가 말을 받았다.
스스스!
스스스스!
뱀이 다가오는 기척이 점점 더 커졌다.
그것이 정말로 지척에 있음을 감지하자마자 커다란 구멍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머리부터 튀어나왔다.
“아……!”
아홉 개의 머리가 달린 거대한 뱀이었다.
각각의 머리가 천장을 물어뜯을 기세로 난폭하게 치솟는 가운데, 중앙에 고고히 멈춰 있는 머리만은 화려한 왕관을 쓴 채 눈을 붉게 빛내고 있었다.
나는 곧장 검을 들었다.
유해교반 신화에서 등장하는 거대한 뱀은 하나밖에 없었다.
“역시 바스키 던전이었어.”
[ (!) 화수和修吉이 깨어났벨까뇩받듬흐흐흐다. ]
바스키의 등장에 이어 한 박자 늦게 팝업창이 떴다.
“……화수길?”
생경하되 마냥 낯설지 않은 이름이 눈에 들어와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화수길(和修吉).
그것은 바스키의 다른 이름이었다.
다만 힌두교 신화에 등장하는 나가의 왕 바스키가 아니라, 수미산 끝자락에서 용을 잡아먹고 산다는 불교의 팔대용왕으로서의 이름일 뿐.
……힌두교의 유해교반에서 이제는 불교의 용왕이라니.
두 신화의 연결고리.
그 지점에 생각이 닿자 심장 부근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왜 바스키가 아니라 화수길일까.
그러한 의문을 품은 순간 업경의 권능을 통해 거대한 뱀의 본질이 흘러들었다.
“윽……!”
바위가 내려치는 듯한 충격에 작게 신음이 샜다.
우주의 시간을 품었다는 원천강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했다.
막대한 정보량이 휘몰아치며 의식을 덮쳐 왔다.
기이하게도 바스키…… 아니 화수길이 품은 본질은 억겁의 세월이 담긴 원천강에 비할 정도의 깊이가 있었다.
제대로 읽으려 들면 현기증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영겁의 시간이었다.
“우주퇴적물이 씌였어…….”
단군이 발견했다던 우주퇴적물이 화수길이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시선 끝에 암무트가 놓인 제단이 닿았다.
뒤늦은 깨달음에 작게 숨을 들이켰다.
생각지 못한 다른 신화의 존재에 의식이 쏠려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우주퇴적물의 기운이 느껴졌다.
발생할 수 없는 사건을 불러오는 우주퇴적물로 이루어진 제단.
그리고 다른 신화의 존재로 이름이 변해버린 나가의 왕.
분명 무언가 연관되었을 것이다.
우주퇴적물이 있다며 우리를 안내한 단군은 제단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그가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제단과 화수길 사이에 얽혀 있을지도 모르지.
지독한 현기증 속에서도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해 나갈 때였다.
[ (!) 화수和修吉이 울부짖벨까뇩받듬흐흐흐다. ]
[ (!) 화수和修吉이 울부짖벨까뇩받듬흐흐흐다. ]
[ (!) 화수和修吉이 울부짖벨까뇩받듬흐흐흐다. ]
오류가 섞인 팝업창이 연달아 떴다.
화수길의 아홉 머리가 지체 없이 불과 독을 내뿜었다.
화르르륵!
시기적절하게 솟아오른 불의 벽이 화수길의 공격을 막았다.
“아홉 개의 머리를 알맞은 순서로 처치해야 합니다, 염라.”
그 짧은 사이에 화수길의 인과를 살핀 단군이 말했다.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불의 벽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화수길의 공격력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상당했다.
“정확한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머리는 다시 재생할 겁니다.”
불의 벽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였지만, 단군은 마력을 아껴야 한다고 판단했는지 구태여 주술을 강화하지 않고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역시 쉽지만은 않군요.”
“괜찮습니다. 이미 모두 파악했으니까요.”
단군이 옅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 새삼스럽게도 작은 안도를 느꼈다.
그가 공략법을 이토록 빠르게 읽어 내지 못했다면, 섣불리 아무 머리나 공격했다가 어떤 건 재생하고 어떤 건 재생하지 않는 상황에 혼란을 겪었으리라.
파앙!
단군에게서 세 갈래의 빛이 쏟아졌다.
“제가 순서에 맞춰 육해공을 보내겠습니다.”
육해공.
선글라스에 너클을 낀 두더지 육군.
나비넥타이를 맨 대왕쥐가오리 해군.
꽃핀을 꼽은 수리부엉이 공군.
생긴 것은 다르지만 똑같이 천부인의 하얀 두루마기를 펄럭이는 단군의 신수들이 다시 등장했다.
육해공이 공격하는 머리가 곧 각 차례를 가리킨다.
표적을 보다 확실하게 공유할 수 있는 방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와 저자로 충분합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강림 형이 앞으로 나섰다.
“칼파브릭샤 때처럼 제 신성과 저 신수들로 뱀의 머리를 치면 되겠습니다.”
하아.
소리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함께 싸우겠다는 내 말에 곧장 반대하지 않기에 이번에는 더 인내할 줄 알았더니.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형은 또다시 날 전투에서 배제하려고 들었다.
“검수지옥 스킬을 쓰시지요, 염라.”
물러서지 않고 항변하기 위해 형은 돌아보았는데, 그보다 빠르게 단군이 입을 열었다.
“제 차례가 아닌 머리를 죽여 봤자 곧 되살아나겠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의 손에서 연녹색 신성이 피어올랐다.
“108개의 던전 중에서 쿠르마 던전과 더불어 가장 난이도가 높은 던전입니다. 마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조금 더 설계가 필요합니다.”
파아앙!
단군의 발한 연녹색 신성이 삽시간에 새하얀 나무가 되었다.
색색의 꽃잎이 흐드러지는 아름다운 나무.
남해와의 신화전에서도 도움받았던 마력을 공급해주는 나무였다.
“제게 남은 마력을 모두 소진했습니다.”
나무가 피운 꽃잎이 내게로 와서 깃들었다.
“대신 당신의 마력을 두 배가량 증폭시킬 수 있을 테지요.”
카르마 포인트와 신앙을 자원으로 키웠던 당시에 비하면 적은 효과였으나,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바스키를 칼날나무의 숲에 가둬 움직임을 봉쇄해주시면 공략이 한결 수월해질 겁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단군이 피워준 꽃으로 마력이 증폭되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는 완벽한 공략을 위해 더 나은 방안을 입에 담은 것이겠지만, 워낙에 친절이 몸에 밴 사람이라서인지 배려받은 기분이 들었다.
“…….”
강림 형은 짙푸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그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나는 잠시 그 묵묵한 시선과 마주하다 먼저 눈을 돌렸다.
화르르륵!
화수길의 공격을 막아주던 불의 벽이 걷혔다.
-캬아아아악!
그 순간 벽이 걷히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제각기 흩어진 아홉 개의 머리가 일제히 불과 독을 뿜었다.
“바로 갈게요!”
떨어지는 불과 독을 피해 땅을 박찼다.
[ 검수지옥(L) ]
화수길의 중심을 향해 팔을 뻗으며 스킬을 시전했다.
손끝에서부터 새하얀 칼날의 나무가 솟구쳤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촤아악!
단군의 나무가 마력을 증폭시켜주었기 때문일까.
은빛을 띤 나의 나무들 사이로 전에 없던 연녹색 빛무리가 번졌다.
-캬아아악!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의 나무들이 화수길의 몸통과 머리를 마구잡이로 꿰뚫었다.
머리마다 크고 작은 칼날이 꽂혀 약이 바짝 오른 녀석이 칼날의 숲에서 빠져나가려 거대한 몸을 꿈틀거리는 그때.
육해공이 하나의 머리에 달려들어 동시에 공격을 퍼부었다.
파아아앙!
잇달아 형의 검푸른 신성 또한 육해공이 지정한 표적을 향해 묵직하게 쏘아졌다.
어느새 다가온 형은 내 앞을 가로막은 채 화수길이 토해 내는 불과 독을 막고 있었다.
내가 일부러 들춘 상처 같은 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집스러운 등이었다.
됐어.
오늘은 그저 오래 곪은 상처를 확인했을 뿐.
한 번 툭 건드린 정도로 나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애써 의식을 돌려 화수길을 붙잡은 칼날의 숲에 집중했다.
육해공과 발설지옥의 신성은 그 자리에 못 박혀 크게 저항하지 못하는 놈의 머리를 하나씩 하나씩 어렵지 않게 쓰러트려 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홉 개의 머리를 모두 해치웠을 때.
[ (!) 화수和修吉의 모든 머리를 꺾었벨까뇩받듬흐흐흐다. ]
화수길을 쓰러트렸다는 팝업창이 뜨고,
[ (!) 바스키의 몸이 일자로 곤두섭니다. ]
뒤이어 오류가 사라진 정상적인 팝업창이 떴다.
“뭐야…… 다시 바스키가 됐잖아?”
화수길에서 바스키로 돌아온 이름에 의문을 내뱉는 찰나.
[ (!) 우유의 바다 휘젓기가 시작됩니다. ]
또 하나의 팝업창과 함께 동굴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동굴 벽에 금이 가고, 천장에서부터 하나둘 파편이 떨어져 내렸다.
“유해교반의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공간이 바뀌는 겁니다.”
당황해서 주변을 돌아보는 사이 단군이 천천히 걸어오며 설명했다.
“지금쯤 무대가 되었던 도시는 완전히 바다에 잠겼겠군요.”
갈라지기 시작한 틈새로부터 눈부신 빛이 쏟아질 즈음.
단군의 모습을 가리듯 크고 단단한 팔이 내 머리를 감쌌다.
***
“대왕님, 괜찮으십니까?”
눈을 깜빡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완전히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아, 네. 괜찮아요, 형.”
머리를 감싼 거친 손을 내리며 멍하니 대답했다.
형의 어깨 너머로 곳곳에 자리한 현대식 건물들이 보였다.
그가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 어느 담벼락에 맺힌 기포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바닷속?”
도시가 바다에 완전히 잠겼을 거라더니.
말 그대로였다.
우리는 정말로 가라앉아버린 도시에 들어와 있었다.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는 용신의 축복이 아니었다면 제법 힘들었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단군이 너무 태연해서 겸양인지 진심인지 헷갈렸다.
“전하, 무사했구나!”
아.
사실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꽤 오래 듣지 못한 것처럼 반가운 목소리에 바로 고개를 돌렸다.
길 건너에서 크게 손을 흔드는 호구별성과 함께 바리, 리퍼, 그리고 사라가 다가오고 있었다.
유해교반의 후반부가 시작되었으니 던전의 규칙에 따라 찢어졌던 일행을 다시 한자리에 모은 것 같았다.
“모두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네!”
검은 로브를 걸친 그림 리퍼가 밝게 말했다.
일행의 가장 뒤에서 걷고 있는 사라는 팔짱을 낀 채 나와 형을 번갈아 살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유해교반 후반부는 이런 식으로 이뤄지나 보네요.”
내 곁에서 멈춰 선 바리는 여느 때처럼 차분하되 약간의 걱정이 서린 어조로 말했다.
“이대로면 우리는 한 칸이라도 밀려나는 순간 패배해요.”
바리가 도시의 지도를 펼쳐 보였다.
우리는 바리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섰다.
108개 던전의 위치가 그려져 있던 지도는 열 개의 칸으로 나뉜 원형 시간표로 바뀌어 있었다.
열 개의 칸 중 아홉 칸은 빨간색, 한 칸은 파란색이었다.
우리의 위치를 가리키는 화살표는 파란색 칸을 향했으며, 적의 위치를 가리키는 화살표는 다른 아홉 개의 빨간 칸을 빠짐없이 지목하고 있었다.
한 칸이라도 밀려나면 패배라는 말은 그런 의미였다.
승리는 열 개의 칸을 모두 차지하는 쪽의 몫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