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66화 (166/187)

47장. 물이 걷히고 드러난(2)

헌터와의 전쟁이 끝났을 때.

나와 형은 한동안 형제자매들의 흔적을 수습하며 지냈다.

끈이 떨어진 갓, 찢어진 두루마기, 부러진 무기와 피로 물든 신분패.

그것은 그들의 유품이자 조각조각 부서진 혼이었고,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된 혼의 일부는 저승 전체에 흐르는 기가 되어 흩어졌더랬다.

우리는 대왕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의 부서진 혼을 거두어 한곳에 모아 두었다.

무슨 힘이 작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흩어졌던 혼은 시간이 흐르면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형태로 모여들곤 했다.

그렇다 한들 서천꽃밭의 혼살이꽃이 없는 이상 그들을 원래대로 온전히 되살리는 건 불가능했는데, 부서진 혼의 조각을 다시 하나로 엮을 방법은 있었다.

-환생문을 넘으면 된다.

곱게 갠 두루마기를 손에 들고 강림 형은 말했다.

-환생문을 넘는다면 혼에 쌓인 기억과 인연이 갈무리되어 새로운 혼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리하여 손수 거둔 형제자매들의 유품 위로 조각난 혼이 모이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와 형은 매일 저녁 해가 지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스물일곱 차사들의 흔적을 찾아 저승 곳곳을 돌아다녔다.

몇 년이 지나 더는 찾을 구석이 없어졌을 무렵에는 앞서 살폈던 곳을 거듭 들여다보았다.

다른 아홉 지옥의 차사들을 모두 돌려보낼 때까지 다시 몇 년이고, 몇 년이고.

우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둠을 두르고 있으니까.

해가 진 세상이 너무 어두운 탓에 전에는 못 보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고 되뇌면서.

사실은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어차피 우리가 의욕을 낼 만한 일은 이제 그것밖에 없었기에.

“내가 다치는 걸 형이 두려워하는 만큼, 나도 형이 다치는 게 두려워요.”

둘이서 형제들의 흔적을 찾아 저승 곳곳을 헤매던 나날.

명백한 답을 애써 부정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좇던 하루하루가 얼마나 쓰라렸는지를 되새겼다.

“형은 알잖아요.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기어이 흔적을 남긴 모든 형제자매를 돌려보내고, 끝끝내 찾지 못한 우리 형제들의 행방조차 그대로 묻어야만 했던 지난날처럼.

파문이 일어난 짙푸른 눈동자 앞에 선 나는 거친 파도와 마주한 기분에 휩싸였다.

업경이 엿볼 수 없게 단단히 걸어 잠근 감정과는 달랐다.

흉터는커녕 지금도 시시각각 곪아가는 상처의 흔적이었다.

“…….”

형은 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눈길을 돌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상처나 고통 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대왕님께서 저를 염려하시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나를 보지 않는 형의 눈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언제 적 일이냐는 듯 상흔을 빈틈없이 감추었다.

다시금 숨이 막히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으나 애써 모른 척했다.

아직은 실망할 때가 아니었다.

형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형이 완벽하게 감추려 할수록 가장 감추고자 하는 진심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그러니 괜찮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방어적인, 그래서 되레 약점을 드러내는 형을 지켜보며 말을 고를 때였다.

“여기들 계셨군요.”

문득 경직된 분위기를 흐트러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하얀 두루마기 코트를 걸친 남자가 우리가 향하던 어둠을 등지고 서 있었다.

“동굴의 입구가 하나가 아닌 듯해 살피는 중이었습니다.”

사라와 더불어 출구로 빠져나갔으리라 짐작했던 단군이었다.

줄곧 던전의 인과를 읽어 왔는지 그의 주위를 맴도는 문자열이 꽤 많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이어서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을 보자마자 피어오른 한 줄기의 감정.

말문을 막아버린 단군의 등장에 처음 떠올린 것이 아쉬움인지 반가움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깨달았다.

이를 악물었다.

이래선 안 되었다.

나까지 도망치려 해서는 우리는 언제까지고 제자리에서 맴만 돌게 될 것이다.

형은 아직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그의 과보호가 나아지지 않고 더 심해지기만 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상처가 곪아간다는 의미였다.

으뜸차사로서 모든 차사들의 맏이이자 발설지옥의 맏이.

그 무게를 짊어졌으니 홀로 상실을 견디는 것만으로 버겁겠지.

그렇다면 형과 함께 살아남은 나의 역할은, 적어도 서로의 상처를 모른 체하는 것 따위가 아닐 터였다.

형을 보았다.

한 차례 나를 피했던 짙푸른 눈이 그새 깊이 침잠한 채로 내게 돌아와 있었다.

이제는 보였다.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도록 빛이 닿지 않는 바다 밑바닥에 억지로 가라앉힌 진심이, 너무도 선연하게.

그래, 오래된 상처째 도려낼 것이 아니라면 지금은 이것으로 좋았다.

지난 10년간 낫지 않았다고 해서 내버려 둘 마음은 더는 없으니까.

애써 억눌러 온 것을 건드리고 또 건드려서 더는 고름조차 나오지 않을 때까지 전부 짜낼 것이다.

“던전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서 저는 함께 싸울 거예요, 형.”

의인화된 죽음이 영원한 상실을 두려워하는 이유.

그것은 그가 곧 끝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수백 수천 번, 서로 등을 맞댄 우리가 다시 서로에게 돌아왔을 때.

발설지옥의 맏이와 막내는 비로소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던 밤을 극복할 수 있겠지.

“도령님이 주신 꽃은 물론 쓸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필요하다면 누구에게든 써야 하고요.”

형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대답을 하든 나는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날 위한 최대한의 인내임을 짐작했다.

우선 그것으로 만족하고 단군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여기도 우리가 공략하던 108개의 던전 중 하나인 거죠?”

“네, 그렇습니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나타나기 직전까지 우릴 둘러싼 분위기가 퍽 유쾌하지 못했음을 눈치챘을 텐데도 그는 여전한 태도로 미소 지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사라나 호구별성이 아니라 단군이라서 다행이었다.

우리가 무엇으로 갈등하든 그는 구태여 들출 마음도, 이유도 없는 사람이니까.

“태초의 바다 바깥과 연결되는 경우도 염두에 두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더군요.”

단군의 설명이 이어졌다.

“태초의 바다 바깥이요?”

“웃차이쉬라바스 던전이 비어 있었으니까요. 바다 무덤 던전과 연결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

곧바로 알아듣고 작게 탄식했다.

“그런데 그런 게 정말 가능한가요?”

단군의 깊은 눈이 차분히 나를 담았다.

“여기는 그러니까…… 좀 특별한 던전이잖아요? 규모도 크고, 특정한 조건을 충족해야만 열리는 던전인데 이미 누군가 손을 댔다는 게.”

“분명 논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당신과 저는 이미 보지 않았습니까. 발생할 수 없는 사건을 불러올 수 있는 무언가를. 또한 이 땅에 공존하는 원인과 결과를.”

자연스레 떠오른 면면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았지.

현무의 몸에 강림하려 했던 안보팀장 조금희.

그리고 조금도 닮지 않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던 무조신과 열다섯 살 인간 소녀를.

“그렇지 않아도 당신께 말씀드리려던 것이 있습니다, 염라.”

단군이 말을 이었다.

그새 또 뭔가를 읽어 낸 듯 그의 시야에 비친 문자열이 한층 더 늘어나 있었다.

“오는 길에 발견했거든요.”

“뭘요?”

“우주퇴적물 말입니다.”

그가 뒤편을 가리켰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시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와 다른 위치에 떨어진 그는 벌써 동굴 깊숙한 곳까지 살피고 온 모양이었다.

나는 동굴 반대편에서 던전을 공략하는 그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물었다.

“당신에게는 제대로 된 안내창이 떴나요?”

“아니요. 몬스터를 처리할 때마다 오류가 섞인 창이 뜨는 게 전부였습니다.”

일반적인 던전과 달리 이 던전은 클리어 조건을 안내하는 팝업창이 뜨지 않았다.

다른 위치에 떨어졌던 단군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독을 뿜는 뱀 인간을 쓰러트리고, 그 길로 연결된 넓은 공간에서 재차 전투를 벌인 뒤에 각각 파수꾼을 쓰러트렸다는 내용의 창이 떴을 뿐이라고.

“그럼 던전의 파수꾼은 전부 정리된 건가요?”

“보스 몬스터를 제외하면 그런 셈입니다. 다만 보스가 나타나는 조건이 좀처럼 읽히지 않습니다.”

설명을 잇던 그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졌다.

“역시 실마리는 이 너머에 있겠지요. 함께 들어가시겠습니까, 염라?”

그는 나를 배려하듯 물었지만 불안 요소가 있으니 들어가지 않겠다는 선택지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단군이 걸어온 길이자, 나와 형이 본래 가려 했던 어둠 너머로 마저 걸음을 옮겼다.

단군이 앞장서고 형은 묵묵히 내 뒤를 지키면서.

넘어지지는 않을 정도의 어둠을 헤치며 나아간 끝에, 우리는 갑자기 천장이 확 트이는 넓은 공간에 다다랐다.

단군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이야말로 동굴의 심층부이리라.

역시나 사방이 바위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는데, 우리가 나온 굴과 똑같이 생긴 입구가 벽을 따라 여덟 개 더 있었다.

첫 번째 파수꾼이었던 뱀 인간.

머리가 아홉 개 달린 뱀 바스키.

자연스레 떠오르는 연관성에 이 던전의 정체를 짐작하면서, 공간 한가운데 꾸며진 제단으로 다가갔다.

“이건…….”

제단 위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머리는 악어를 닮았으면서도 목에는 사자와 같은 갈기가 있었다.

상반신을 이루는 황색 가죽 또한 사자를 연상케 했으나 하반신은 육중한 하마와 똑같았다.

난생처음 보는 괴수였다.

함에도 어째서인지 나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암무트……?”

망자의 심장을 먹는 괴수, 암무트.

제단에 놓인 암무트는 반으로 갈라진 채 누워 있었다.

다만 피가 조금도 흐르지 않아 꼭 제를 위해 준비된 성물처럼 보였다.

“북아프리카의 괴수잖아…….”

나는 암무트를 내려다보며 손끝을 떨었다.

힌두교에 이어 또 다른 신화의 괴물이라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런 것이 왜 이곳에 존재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만.”

시야 가득 문자열에 둘러싸인 단군이 말했다.

“이 공간의 인과는 바다 무덤 던전과 무척 유사합니다, 염라.”

“바다 무덤 던전이라면…… 소환인가요?”

“네. 이곳은 무언가를 소환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어느새 차가워진 손을 그러쥐며 암무트를 돌아보았다.

바다 무덤 던전에서 깨어난 인드라 조각상을 물리쳤을 때는 인드라의 코끼리 아이라바타가 본체로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심장을 먹는 괴수 암무트도 그런 역할을 하는 걸까.

“제가 제대로 인과를 읽은 것이 맞다면 상당히 의아한 지점입니다만…….”

계속해서 인과를 살피던 단군이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이 공간을 안배한 자의 목적은 유해교반 퀘스트의 승리가 아닌 듯합니다.”

“네? 유해교반에서의 승리가 아니라니, 그건 또 무슨…….”

뜻밖의 말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우리 때문에 계획이 틀어졌다고는 하나, 유해교반 퀘스트에 대비해 아수라와 인드라까지 안배했던 이들이다.

그런데 정작 유해교반을 목적하지 않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이 부분은 저로서도 조심스럽습니다만, 사실 모든 던전은 이 땅의 인과율을 분배하기 위한 장치니까요.”

그 순간 말을 잇던 단군의 눈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깐, 단군, 피가……!”

나도 모르게 붉게 번진 그의 눈가에 손을 뻗었다.

따뜻한 피눈물로 젖어 드는 손가락과 부드러이 접히는 그의 눈매가 좀처럼 어우러지지 않았다.

“역시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나 보군요.”

허용되지 않은 말을 했다고 몸에 구멍이 뚫렸던 우주강도단의 공무원들.

북유럽에 가는 방법을 물었던 당시 때가 되면 알 것이라 말한 것만으로 피를 토했던 단군.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의 표정이 지난 기억을 끄집어냈다.

“적의 목적은 유해교반을 클리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해교반이라는 거대한 던전으로 분배되는 인과율이 필요한 거죠.”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요!”

피가 흐르든 말든 계속 말을 잇는 단군의 입을 다급히 막았다.

그러나 피눈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뱉어버린 말 때문인지 이제는 코에서까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이거 꽃으로 치료가 가능한가?”

느닷없는 출혈에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뒤늦게 서천꽃밭의 꽃을 꺼냈다.

그는 더 짙은 웃음을 띠며 내 양 손목을 잡았다.

“저는 우주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 선을 정확히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손을 얼굴에서 떼어 낸 단군이 꽃을 쥔 손마저 가볍게 내렸다.

나는 얼굴에 묻은 피를 대수롭지 않게 닦는 그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대왕님.”

그때 내내 침묵하던 강림 형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동굴을 울렸다.

“기척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계속 주변을 경계한 형의 날 선 눈이 어둠 속을 가리켰다.

“뱀이 기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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